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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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이라는 사실을 또 잊고 있다가 책을 펼쳐본 후 '아! 맞다' 하곤 약간의 후회어린 탄성을 질렀다. 두 권 넘어가는 장편은 힘들어하고 한 권 속에 단편을 모아놓은 건 시시해하니 좀 해괴한 기호랄 수 있겠다.

어찌됐든. 여기저기 주워들어 내가 상상한 그런 유쾌함은 아니었다. 지독한 편견일지는 모르지만, 한 얼을 공유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나면 웃겨도 종국엔 눈물을 보고야 마는 그런 아이러니가 있다. 그걸 우리들만의 '정서'라고 말해도 될지... 소위 시대를 통틀어 세계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남의 나라 작가들의 '고전'이라는 것을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우선 황만근과 계철, 남가이는 바보든 미남이든 뭐라고 불리든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들의 순수함과, 그것이 잔잔한 듯 하면서도 오래 그리고 멀리까지 전달되는 호수의 파동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돈과 권력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부릴 수 없는 도인의 괴력이랄까. 더불어 우리의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해학미 짙은 인물들이 성석제의 펜끝으로 되살아난 듯, 무의식의 원형을 슬그머니 깨워낸 듯 몽롱한 시차를 느끼게 된다.

그 와중에 '동환'과 '당숙'의 에피소드는 사실 무엇을 말해주는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다. 그게 단편의 약점인지 헛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과 결말의 사이에 놓여져야 할 해결의 과정이 생략되어있다고 해야할까. 연방 '문학'을 통해 전화를 해도될지를 물어오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시종일관 폐허같은 변두리 술집 속에 처박아두는 동환에게 성질을 부리는 그와 함께, 나도 '동환'에게 성질이 났던 것만은 사실이다. 또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벌써 그 시작부터 약간 자폐적인 당숙의 책 이야기는, 그 당숙이 초점인지 아니면 책을 이사하는 과정의 소소한 번거로움이 초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 '소소한 번거로움'의 황당함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모랄까 이 단편집의 재미는 몇 개는 인물과 스토리의, 또 몇 개는 성석제식 입담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종합선물세트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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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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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보다는 남들의 이목에 신경쓰는 두려움 많은 한 여자와, 치유의 능력과 맑은 영성을 소유한 한 남자가 사랑을 이루어간다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정신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연애소설일 것이다. 거기에 코엘료 식의, 이번에는 종교를 통한 자아의 발견과 사랑의 신비를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보편 종교가 아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의 방식을 따르는 이 사랑은, 먼저 자신을 되찾는 작업을 전제한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연습'이란 반대로 '자기 자신을 찾는 연습'이랄 수 있다. 완전하게 나 자신의 생각대로, 의지대로 행동한 적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에 조차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닥 중요치 않은 이유 때문에 그 말을 다음 기회로 미룬다. 자신을 찾는 연습이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집착'과 혼동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본보기였으며, 자기 증오는 지나친 이기심과 똑같아서 종국에는 끔찍한 고립과 절망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p.21

필라가 자신을 발견하길, 성모님의 사랑을 통해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길 그는 인내롭게 기다린다. 비로소 사랑이란 타인에게 '주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애를 통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것임을 증거하면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여자가 아닌 그가 여성의 심리를 너무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작가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그가 성모신심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더불어 확신에 찬 다음의 말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한 몰이해를 종식시켜주길 바라면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하느님은 사랑이셔. 하지만 이걸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성모님이지."
"성모님은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신비를 정확히 이해했어. 당신 자신이 사랑하고 고통받았기에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고."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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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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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신화는 폭력적이고, 성서는 폭력의 싸이클을 종결짓는다는 얘기다. 외국소설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르네 지라르의 또 다른 책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의 욕망은 타인을 매개로 하여 욕망하는' 모방의 욕망이다. 거기서부터 남의 것을 '탐하는' 경쟁이 발생하며, 이 경쟁이 심화되면 하나의 집단 폭력이 된다. 그 해소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하며, 집단은 그 희생양을 죽임으로써 집단 내 극에 달한 경쟁을 일단락짓고 경쟁의 휴지기에 들어간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유대인들에 의해 희생양이 된 '예수'이다. 허나 이러한 희생양의 예는 성서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신화들 속에서 두루 살펴지는 전형이다. 단, 이 책이 밝히고자 하는 주요점인 그 둘의 차이는 바로 '희생양이 유죄인가 무죄인가'하는 것에 있다.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유죄의 희생양'이 됨으로써 신화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반면 예수는 유대인들의 집단적 광기에 의해 본보기로 희생된 '무고한 희생양'이 됨으로써 '희생양'을 만드는 집단의 경쟁관계와 광기의 실체를 밝히고 모방의 싸이클을 멈추게 한다.
사탄은 바로 집단을 경쟁관계에 빠져들게 하고, 희생양을 만들도록 부추기는 존재이다. 바로 그 희생양을 죽이는 행위를 통해 사탄은 살아남는다. 즉 하나의 싸이클을 어느 수위에서 멈추게 함으로써 자신의 파멸을 막고 또다른 싸이클을 준비하는 것이다. 허나 예수는 그 싸이클을 초월하여 '부활'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싸이클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래 리뷰쓰신 분의 의견처럼 이 책은 '호교론' 성격이 강하다. 그렇지만, 성서와 신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론서인 반면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복음서는 물론, 신화 관련 서적을 읽는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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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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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읽기 좀 난감한 책이다.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이니 말이다.
이 책의 에피소드들은 우리 모두 겪는 일이지만, 그런 경우 십중팔구 화를 내버리고 말지 이렇게 넉넉하게 웃어넘길 줄은 모른다. 특히 그 우스꽝스러운 행위에 '동참'하는 것은 박장대소의 끝에 잔잔한 여운마저 느끼게 해 준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지낸 시간들을 악몽으로 생각하는 이 유태인 작가는 고통의 극한을 경험하였기에 모든 것을 웃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꽁해지는 내 일상을 돌아보니,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일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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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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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상권, p.256)
꿈 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서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무라 카프카-나카타 사토루를 축으로 한 두 개지만 하나인 이야기. 주인공이 둘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다른 점은 이들이 공시적으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잠'을 통해 같은 꿈을 공유하며, 그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아니 그렇게 짐작해 볼 수 있다.
15세의 '오이디푸스' 다무라 카프카는 신탁이 아닌 아버지의 저주를 피해 모험을 떠나지만, 이 21세기의 카프카 역시 정해진 운명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딱히 그렇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저주의 현실화가 구체적 증명은 불가한, 주인공들의 심증만으로 확신하게 되는 모호한 실현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는 눈알을 파내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다무라 카프카군은 세계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진짜 세계에서 가장 터푸한 15세 소년이 되어 또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한편 전시에 집단 혼수상태에 빠진 후로 기억의 일부를 잃고, 다무라 카프카군과 정신의 일부를 공유하게 된 것으로 짐작되는 나카타 사토루는 인간의 언어에 서투른 대신 고양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이한 노인이다. 문명화 이전의 순수한 심성과, 초능력을 지닌 나카타는 꿈의 세계에서 하드코어적으로 고양이를 살해하는 조니 워커-다무라 고이치를 죽이고, 떠나본 적이 없는 도쿄시 나카노 구를 벗어나 정신적 자아인 다무라 카프카를 찾아 고무라 도서관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고리' 속에서 다무라 고이치(조니 워커)-사에키 상- 다무라 카프카-나카노 사토루의 관계성이 드러나고, 사쿠라-오시마-호시노는 이들이 현실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끈의 역할을 한다.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에서 느꼈던 '알고보니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알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알고,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잘 짜여진 게임판의 말들과 같은' 필연적 관계에 놓여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속에는 다양한 공간들이 설정되어 있다. 먼저 현실의 다무라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 다무라 고이치의 집. 이 곳은 어머니와 누이가 사라져버리고, 아버지와 소통이 부재한 폐쇄적 공간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저주를 피해 공간 이동을 하지만, 고무라 도서관 또한 응축된 감정들이 고여 표출되지 못하는 소용돌이 같은 곳이다. 오시마 상이 안내해주는 숲 속의 집과 그 숲에서 연결되는 비현실계의 공간 또한 폐쇄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됴쿄시 나카노 구도 나카타에겐 보이지 않는 경계로 둘러쳐진 한정된 공간이었다. 이들은 모두 폐쇄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하지만, 옮겨간 곳 또한 열려진 곳은 아니다. 마치 하나의 큐브에서 또다른 큐브로 이동한 듯한 답답한 느낌이다. 그래서 하루키가 말하는 '세계의 끝'이란 그 단어가 내포한 무한의 이미지 보다는 그 끝에 실제로 낭떠러지가 있을 것만 같은 막막함이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성방식, 초현실적 인물들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문장들로 우리들의 다양한 지적 욕구들을 채워준다. 책을 읽고나니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환상특급열차를 타고 이상한 세계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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