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① 시간적 배경 : 1822년 가을 초엽의 어느 토요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
② 장소적 배경 : 파리의 앙갱 거리 '은사자 호텔'에서 출발하는 이륜 소형 마차 안.


2. 등장인물
① 피에로텡
- 외적 특징 : 40세. 한 집안의 가장.
1815년 군대 해산기에 기병대 제대 -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이 몸에 뱀.
릴라당-파리 구간 마차의 마부, 마차 소유주. 여인숙 딸과 결혼.
/ 말재간 / 부르주아를 상대할 때는 유순한 어조, 목소리는 거침없음.
여성들에 대한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적인 존경.
- 내적 특징 : 영리한 머리, 군대식 정확성 ; 마차 2대중 하나만 세금 신고.
- 백작의 신분을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받고, 그 댓가로 마차대금을 뇌물로 받음.

②드 세리지 백작
- 백작의 부친 : 대혁명 이전 고등법원 원장. 1794년 임종.
- 백작 : 1787년 22세때 대심회의 참사원 의원.
1794년경 500인 위원회 선출.
1799년경 국가 위원회, 백작 상원의원, 지방 총독을 지냄.
1806년 결혼, 드 롱크롤 후작의 누이, 고베르의 미망인, 드 루브르 후작과 동서지간.
1814년 관직 포기, 파리로. 왕정복고, 루이18세 정무장관으로 임명
1815년 백일천하. 민간 자문위원회 의원으로 복귀, 참사원 의원, 부의장, 청산인
-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유용한 사람.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괴로워함. 아내는 그에게 혐오감을 갖고 있으나 그는 어쩌지 못하고 과부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내버려둠.

③ 모로
지방 검사의 아들, 대혁명 때 베르사유의 검사, 시민대표.
아버지 모로는 혁명당시 귀족이었던 드 세리지 부자(父子)의 목숨과 재산을 구함. 당통파에 가담했던 모로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처형당함.
아들 모로는 1통령(나폴레옹) 반대 음모에 가담, 사형선고를 받으나 드 세리지 백작에 의해 구출. 1804년 드 세리지 백작이 나폴레옹에게 요구한 사면이 수락되어 목숨을 구함. 그 뒤 백작은 모로를 비서로 고용하고, 백작이 결혼한 뒤 백작부인의 시녀와 결혼. 백작은 모로를 전적으로 신임, 후한 급료 여러가지 혜택을 줌.

④ 드 레이베르

3. 사건
물리노 영지 - 프렐르 대저택 내에 있는 영지로 주인은 보몽-쉬르-우아즈의 부르주아 마르그롱이고, 소작농은 레제영감. 1799년 마르그롱과 레제가 맺은 계약이 끝나가자, 백작은 늘 문제를 일으키곤 하던 이 영지를 일개 세리였던 마르그롱의 아들에게 상리스 도의 재정 특별 징세관직에 앉히는 조건으로, 매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레제가 마르그롱에게 재정 특별 징세관직을 능가하는 액수를 제시하며 물리노를 사들인 뒤, 그 땅을 세리지 백작에게 96개의 조각으로 되팔아 더 큰 이득을 보려는 심산임을 백작이 알게 된다. 공증인 알렉상드르 크로타, 소송 대리인 데르빌은 모로의 비리를 의심하고, 그를 거치지 않고 백작이 직접 일을 처리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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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 대한 묘사

예언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바퀴로서 놀라운 환영을 보았다. 그 환영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된지 30년 4개월 5일째 되는 날 그발 강가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달력으로는 BC 560년 경이다. 중세 학자들은 에제키엘의 환영에서 바퀴 혹은 옥좌로 알려진 천사 등급의 유래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가장 높은 등급이다. 이것은 기록된 것 중에서 가장 흥분되는 천사에 관한 묘사 중 하나이다.


에제키엘 1장 4절~12절
4그 순간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이 막 밀려오는데 번갯불이 번쩍이어 사방이 환해졌다. 그 한가운데에는 불이 있고 그 속에서 놋쇠 같은 것이 빛났다.
5또 그 한가운데는 짐승 모양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춘 것이 넷 있었는데
6각각 얼굴이 넷이요 날개도 넷이었다.
7다리는 곧고 발굽은 소 발굽 같았으며 닦아놓은 놋쇠처럼 윤이 났다.
8네 짐승 옆구리에 달린 네 날개 밑으로 사람의 손이 보였다. 넷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따로 있었다.
9날개를 서로서로 맞대고 가는데 돌지 않고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10그 얼굴 생김새로 말하면, 넷 다 사람 얼굴인데 오른쪽에는 사자 얼굴이 있었고 왼쪽에는 소 얼굴이 있었다. 또 넷 다 독수리 얼굴도 하고 있었다.
11날개를 공중으로 펴서 두 날개를 서로 맞대고, 두 날개로는 몸을 가리고
12돌지 않고 앞으로 날아가는데, 바람 부는 쪽을 향해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구약성서에서는 천사가 보통 사람처럼 생겼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천사는 다른 모습을 취하게 되었고, 천상의 존재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관해 여러 작가들은 다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이사야보다 200년 후에 에제키엘의 특이한 환영은 각각 네 명의 천사 혹은 하느님의 바퀴가 네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사람의 얼굴, 나머지는 각각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옥좌에 대한 에제키엘의 묘사는 하나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동물인 네 개의 얼굴과 함께 분명 BC 600년~1100년에 있었던 아시리아의 그리핀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 날개달린 존재는 때로 제니genii(조로아스터교의 진jinn(이슬람교 신화의 정령, 신령)과 매우 유사한)로 불리기도 한다. 뉴욕의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에 있는  원통 인장(the cylinder seal, 조각이 새겨져 있는 소형 원통)에는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BC 700~600)를 가꾸는 두 제니가 보인다. 이 형상들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수염을 길렀으며, 투구를 쓰고, 각각 날개가 두 개 있다. 그러나 BC 1100년~900년에 아시리아에서 행해진 훗날의 묘사를 보면 네 개의 날개에 새의 머리(아마도 독수리 머리)를 한 인간이 똑같이 생명의 나무에 물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14세기 단테의 『신곡』에는 천국의 신령한 나무에서 동물(아마도 사자)의 몸에 새(아마도 독수리이거나 매)의 머리를 한 형상의 삽화가 들어있다. 

                 「피에트로사의 주발」 
   흥미로운 것은 1837년 루마니아의 피에트로사 마을 부근 묘지에서 훈족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에트로사 주발로 알려진 오르페우스 제기(祭器)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에제키엘의 환영과 비슷한 이미지가 나타나있다는 것이다. 조셉 캠벨이 『신령한 이미지The Mythic Image』에서 묘사한 것처럼 "신의 발치에 일조(日鳥), 일수(日獸), 독수리와 사자가 결합된 그리핀"이 한 지역에 모두 있는 것은 복잡하고 흥미로운 상징적 작업이다. 
  구약의 이사야서처럼 보다 이전의 성서적 환영에는 세라핌이 묘사되어 있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의 옥좌 위에서 경외심을 표하며 서 있다. 그들에겐 날개가 많이 달려있는데, 실제로 6개나 된다. 두개는 얼굴을 덮는데 사용한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영광을 더럽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죄많은 인간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Some say against the glory of God, others for shame at human sinfulness.) 다른 두 개의 날개는 존경을 표하는 몸짓으로 그들의 발을 덮을 때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성소의 가장 높으신 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한 쌍의 날개는 날 때 사용하는데, 그것은 신의 메세지를 전할 때 빨리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성서 속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케루빔이 묘사되어 있는데, 하느님은 에덴 동산 동쪽 끝에 있는 불멸을 약속하는 두번 째 나무에서 아담과 이브가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케루빔을 두신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창세기 3장 24절)
중세 상징에서 세라핌은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태우는 임무의 상징으로서 세 쌍의 날개와 불칼을 지니고 붉은색으로 묘사된다. 분명한 것은 옥좌, 케루빔, 세라핌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에 꼭 들어맞는 묘사는 없다. 성서 속 이야기는 천사의 모습을 보통 사람이나 반짝이는 빛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모두 빛나는 흰 옷을 입었다고 말한다. 어떤 천사는 날개를 가졌지만 어떤 천사는 날개가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날개를 가진 천사는 이따금씩 성서속에 등장할 뿐이다. 즉 날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4세기 말 경이 되면 천사에게 후광이 생기는데, 특히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성화에서 천사를 그릴때 후광이 외적 규칙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후광'이라는 단어는 성서 속에 있지도 않고, 성서에는 천사들이 후광을 지녔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그러나 후광이 특별한 존재나 신성함(동정녀 성모 마리아 역시 늘 후광을 지니고 있다)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 이래로, 그리고 성서의 천사가 자주 빛과 함께 등장한 이래로 후광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날개는 특히 르네상스 이후로 천사의 기본 장비가 되었는데, 르네상스의 대화가 라파엘이 인자한 얼굴에 깃털로 뒤덮인 커다란 날개가 달린 천사를 그림으로써 "아름다운" 천사의 시대를 열었다.
천사들은 육신을 지니지 않았는가(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들은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천사, 신의 비밀 요원』에서 "천사는 인간에게 알려진 그 어떤 것도 능가하는 아름다움과 종류를 가지고 있다고 추론한다. 이 말은 문학적인가 은유적인가? 아마 어느 정도 둘 다를 의미할 것이다.


천사의 이름
천사의 이름은 교회가 인정한 무수한 성인들의 이름만큼이나 그 수가 많다. 이 주제에 대해 조금만 조사해 보아도 몇 십개가 아닌, 수 백개의 기록된 천사들의 이름과, 변형된 여러 천사들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대천사(그리스 정교에서는 천사장)인 라지엘Raziel은 아크라지엘Akraziel, 사라카엘Saraqael, 수리엘Suriel, 갈리수르Galisur, 니쯔리엘N'Zuriel, 우리엘Uriel로도 불린다. 치품천사 세먀자Semyaza의 변형된 이름은 사미아자Samiaza, 셰마자이Shemhazai, 아메쟈락Amezyarak, 아자엘Azael, 아자지엘Azaziel, 우짜Uzza이다. 메타트론Metatron은 비즈불Bizbul이라는 신비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백개가 넘는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일곱 개의 천국
헤브루어와 민간전승에는 일곱 개의 천국과 일곱 개의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 첫 번째 천국은 샤마임Shamayim이라 불리는데, 이 곳은 가브리엘Gabriel이 다스린다.
2. 두 번째 천국은 라키아Raqia라 불리는데 자샤리엘Zachariel과 라파엘Raphael이 함께 다스린다. 라파엘은 근동지방에서는 치유의 천사로 여겨진다.
3. 세 번째 천국은 셰하킴Shehaqim인데, 통치자는 아나헬Anahel이다. '생명의 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은 이 세번 째 천국에 있다.
4. 네 번째 천국은 마코논Machonon이라 불리는데, 그 통치차는 미카엘Michael이다. 터키인들은 그를 위대한 의사로 여긴다.
5. 다섯 번째 천국은 마테이Mathey이고 산달폰Sandalphon이 다스린다.
6. 여섯 번째 천국은 제불Zebul이라 불리는데, 세 명의 통치자가 있다. 제 1 통치자는 자키엘Zachiel이고 그 아래 두 명의 통치자가 있다. 제불은 낮을 다스리고, 사바쓰Sabath는 밤을 다스린다.
7. 일곱 번째 천국은 아라보쓰Araboth인데 카시엘Cassiel이 다스린다.

일곱 대천사
일곱 대천사에 대한 최초의 참고문헌은 에티오피아의 에녹Enoch에서 발견되었다. 다음의 순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정도에 따라 다르다.
1. 우리엘Uriel
2. 라파엘Raphael
3. 라구엘Raguel(또는루히엘Ruhiel, 루아겔Ruagel, 루아헬Ruahel)
4. 미카엘Michael
5. 제라키엘Zerachiel(또는 아라카엘Araqael)
6. 가브리엘Gabriel
7. 레미엘Remiel(또는 제레미엘Jeremiel, 제라밀Jerahmeel)

헤브루의 에녹 3장에는 천사들이 다음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1. 미카엘Mikael
2. 가브리엘Gabriel
3. 샤트키엘Shatqiel
4. 바라디엘Baradiel
5. 샤카키엘Shachaqiel
6. 바라키엘Baraqiel(또는 바라디엘)
7. 시드리엘Sidriel(또는 파즈리엘Pazriel)

솔로몬의 성서(열왕기? 역대기?)에는 좀 다른 일곱 천사의 이름이 나온다.
1. 미카엘Mikael
2. 가브리엘Gabriel
3. 우리엘Uriel
4. 사브라엘Sabrael
5. 아라엘Arael
6. 이아오스Iaoth
7. 아도나엘Adonael

기독교 그노시스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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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사촌 베뜨 La Cousine Bette"에 나타난 부르조아 지배 사회속의 여성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문학전공, 손경애

1. 사회 모습
*루이 필립하의 7월 왕정 - 부르주아지의 승리, 권력/사회적 위치 정착
*신분질서의 붕괴, 귀족의 쇠락
*귀족의 부르주아지화
→ 이런 사회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냄으로써 발자크의 사회 현상 인식력을 볼 수 있다.
*금권사회, 물신숭배, 이기주의 팽배(돈을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고라도 올라서는 분위기), 사회의 부정부패 ;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병패가 드러나기 시작함
→ 발자크가 제시한 해결책 : 종교심의 회복
*부의 불균등 현상 : 부자들의 무위도식으로 사회가 타락, 불안정.

2. 여성들의 사회적 제 양상
*부르주아 결혼과 귀족 결혼의 차이
-부르주아 : 재산의 연결, 사랑과 실리적 이익의 연결, 일종의 계약(contrat de Mariage)
-귀족 : 기사도적 이상, 가문과 혈통의 전달 
*부르주아 결혼에서 여성에게는 지참금이 문제.
 
*결혼에 대해 여성들은 사회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음. 여자는 남편에 의해 사회적 지위 획득, 신분 상승의 도구로 여성에게 열려진 것은 결혼 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어떤 결함으로 결혼을 '못한' 여성이 되고 사회에 설 땅이 없음.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됨. 부르주아 여성의 최고 목표점은 결혼. 교육도 결혼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

*여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립 불가능. 결혼을 통해 한 남자에게 종속. 재산의 일부가 됨.

*부르주아 가정 : 남편의 절대적 권위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 따라서 아버지/가장의 권위가 실추되면 가정이 붕괴.

→ 엥겔스의 해석 : 획득하는 것은 남자의 몫. 거기서 생긴 잉여가치는 남성의 것. 이에 비해 여성의 가사 노동은 가치를 상실. 남자가 우위. '돈을 벌어야 하는 부양자'의 역할이 남편에게 지배적 지위 부여. 남편은 부르조아지/아내는 프롤레테리아. 계급 형성의 원인을 '경제적 지배' 때문으로 봄.

*금전을 주로한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르는 사랑 없는 결혼은 당사자의 계급적 위치에 의해 규정되며, 언제나 타산적이다. 부부가 서로 외도를 함으로써 겉모습만 가정을 이룸(마르네프와 발레리의 결혼)

*사랑에 기반한 가정도 금전이 없으면 살기 힘든 현실에 부딪혀 파탄에 이름(오르땅스와 벤세슬라스의 결혼) 이혼은 법적으로 금지. 따라서 여성은 부정한 남편을 앞에 두고도 현실을 박차고 나올 수 없었고, 또한 가정이 없는 여성은 실제 사회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 발자크는 가족이란 애정, 존경, 관용 속에서 사랑의 창조이며, 두 부부의 합의에 의해 존재할 것이라고 말함.

*봉건사회의 가정 : 기본적인 경제단위. 자본=노동, 생산-소비, 직장-가정, 노동-가사, 공동생활-사생활의 통합 공간. 남편과 아내의 노동과 관리에 의해 유지됨.

*부르주아지의 가정 : 소비 공간으로 축소. 여성은 생산에 참여 불가. 경제력이 사회의 지배력이 된 부르주아 사회에서 생산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남편에 종속될 수 밖에 없음.

→ 발자크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경제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

3. 여성노동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은 가사일도 하인에게 맡긴 채 가정을 지킨다(고로 거의 생산적인 일에서는 배제됨). 그러나 수입이 불충분하면 일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결혼 후 여성은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 혼전 여성은 고도의 지적, 기능적 능력이 요구되는 교육보다 부덕한 여성이 되는 것에 전념. 가정에 갖혀 전문적 직업활동 안함. 할 일이 없는 여성들은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몸치장하는 데 열중. 노동은 보조적 성격. 여성 노동에 대한 사회의 반대. 이로써 가정부를 무상으로 확보.

생산에서 제외 : 여성의 모성적 역할 - 가족 - 생산과 공공생활로부터의 소외 - 성적 불평등
여성의 육체적 연약성으로 인해 여성도 노동의 제약을 받았지만 일 자체를 안한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의 형태에 크나큰 제약을 받았을 뿐이다.

가난한 계층의 여성은 생계를 위해 필수적으로 노동해야 했지만 그 댓가는 남성에 비해 형편 없었다. 19세기 초반 노동 여성들은 성차별주의로 인해 고통받음.

여성은 자본가에게 노동 착취의 한 수단을 제공. 발작은 이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서 노동자들에 대해 표현 안함.
부의 혜택을 받는 부르주아 여성들의 직업으로는 가사와 육아를 제시함으로써 여성의 독립에 관하여 건설적인 생각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발자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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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 요약


1. 발자크 시대의 저널리즘
르 피가로 - 보수
마텡 - 사회당
위마니테 - 공산당
르 몽드 - 중립
; 프랑스의 저널리즘은 정치와 직결.

2.
① 라 가제트La Gazette - 프랑스 신문 제 1호
왕정복고시기(루이 18세) - 신문이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했음.
여당 - 왕당파/ 야당 - 자유당
②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
ébats - 후일 야당으로 회귀
③ 자유파의 입헌Le Législature, 꾸리에 프랑세, 르 나시오날 등이 진정한 야당지.
   --> 1830년 7월 신문 탄압에 반대하는 서명 항의문 작성, 혁명의 도화선이 됨.

3.
중도파 - 모레파 : 루이 필립 측근
              - 기조 지지 그룹 : 순이론파의 흐름 추종.
여당
중도좌파 - 티에르
야당 - 우파 : 정통왕조파
          - 좌파 : 과격공화파
좌파 : 왕조좌파
구좌파  : 연립거부
--> 위와 같은 다당화 현상으로 신문 분류도 복잡해짐.

4. 1842-1843 : 보수중도파의 기조 외상, 솔트 내각의 실권 소유. 중도좌파의 티에르는 야당으로.

※ 쥘 자냉, 생트 뵈브의 발자크에 대한 악평 - 발자크와 저널리즘의 대립 ; 전향한 좌익이 우익에 대해 품는 원망 같은 이중적 감정, 애증관계.

I.
1. 1821년 (발자크 21세)
오귀스트 르 푸아트뱅 - 왕정복고기, 삼류 저널리스트
1821~1824 - 발자크 필명 로르 룬Lord R'hoone 혹은 오라스 드 생토벵으로 통속소설 집필
폴 라크르와, 오라스 레송 등과 인연.
소설에서 저널리즘으로 방향 전환.
독서 클럽 : 비싼 책값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신문 열람, 책 대여 서비스. 이것이 책 유통 방해, 출판사는 부수를 줄이고 독서 클럽은 분책을 요구.
* 발자크는 문예비평Feuilleton des Journaux politiques에 문제점 제기
- 책값이 비싸기 때문에(유통 구조의 문제) 사람들이 책을 사보지 않음, 책을 써도 작가는 돈을 벌 수 없음. 
-->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저널리즘으로 전향.

2.1824년
근대 저널리즘의 거대한 세력, 그것이 내포한 커다란 악을 인식.
Feuilleion Littéral 등에 기고, 소책자, 법전 등 집필.
이 시기의 작품들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부 그의 것으로 확인된 작품에서 기질이 엿보임.
당시의 신문 - 대형 정치 신문이 탄압당하던 시절, '비정치 신문' , 문학 신문을 표방하지만 게릴라 저널리즘. 소자본으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신문 소유가 용이함.
신문 소설의 수용.

3. 1825년 - 출판업, 인쇄업, 활자 제조업의 잇다른 실패.
반면 르 푸아트뱅은 『르 피가로』를 인수, 정치 신문으로 전환, 대성공.
많은 빚을 진 발자크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올빼미 당원』(1829.3)을 집필. 
표절 신문 『르 볼뢰르Le Voleur』(1828 창간)에 짤막하게 소개.

4. Emile de Girardin(1806~)
본명 에밀 드라모트, 자전적 소설로 『에밀』이 있음.
친구와 함께 『르 볼뢰르Le Voleur』(표절자라는 뜻, 1828년) 창간.
-->비정치적인 중산계급이 실용지식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점, 지방 여성이 최신 유행정보에 민감하다는 점을 읽은 지라르뎅은 『Journal des connaissances utiles』, 『La mode』창간.

II.
1.
1829년 발자크와 지라르뎅의 만남.
1830-31 발자크는 각종 신문, 잡지에 기고, 소설 집필을 거의 하지 않음.
『Feuilleton des journaux politiques』(문예비평). 지라르뎅과 함께 공동출자. "저널리즘의 힘으로 소설이 벌이가 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저널리즘으로도 돈을 벌 수 있게 하자"는 취지. 예약 구독 시스템 시도.
--> 이러한 시도들은 소설가를 채산성이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음.
 
2. 1830년 7월 혁명(루이 필립)
정치 저널리즘 - 정치 경향이 뚜렷하지 않음.
입헌왕정 옹호/급진공화파적/정통왕조파
1830년 11월~ : 공화주의자 샤를 필리퐁의 『Caricature』에 기고. 저널리즘의 세계에서는 자유파로.
1831년 4월 :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정통왕조파 지지 ↔ 공화파적
저널리즘의 위험성, 폐해 인식. 저널리즘은 '천재의 재기를 빨아먹는 악마'라고 평.
1832년부터 저널리즘 탈출 방식 모색, 정치가로 변신, 소설로 복귀.

3. 1835-36
『Revue de Paris』
의 주간 프랑수아 뷜로가 『골짜기의 백합』 초고를 전매해버려 발자크는 『Revue des deux mondes』와 『Revue de Paris』를 상대로 소송. 저널리스트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뷜로의 조치로 발자크는 대부분의 잡지에서 거부당한다.
1835년 12월 『Chronique de Paris』의 사장이자 편집장이자 사주이자 발행인이 된 발자크는 소송에 승리했으나 1836년 파산한다. 

1836년 7월 1일 지라르뎅, 『La Press』창간.
광고게재로 구독료 인하 방법 창안, 성공, 여당.
정치 이외의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다양한 구미를 충족.
소시민 계급을 타겟으로.
vs『Le Si
ècle』(1836.7.1)의 알만 듀텍. 야당 왕조파.
7.22 지라르뎅, 『Le National』주간 알만 카렐 살해로 『라 프레스』구독률 저하. --> '연재소설'로 기사회생.

*발자크는 사상 최초의 신문 소설가(p.187)
『입헌』지, 자유파
『쥬르날 데 데바』 베론 박사, 으젠느 쉬 『떠도는 유태인』연재.
1852년 이후 '많은 부수, 싼 가격'의 소설 출간.

4. Revue Parisienne
1840년 발자크의 완전한 개인 잡지.
저널리즘에 있어서 패배.
1841년 『인간희극』 전집 계약.
1842년 한스키 백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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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é de Balzac


ÉTUDES DE MOEURS AU XIXe SIÈCLE


scènes de la vie privée ;* tomes III et IV.


[ Extrait du *Magazine Français/Nouvelle Bibliothèque des Romans,* tome V,
(=*Nouvelle Bibliothèque des Romans*, 1833 et 1834, Tome troisième), Crapelet
(Fournier), 1834, p. 254-266. Orthographe du texte.

Les mots entre deux '*' sont en caractères italiques dans l'imprimé.
Les mots entre deux '|' sont en exposants dans l'imprimé.
Les mots entre deux '' sont en petites majuscules dans l'imprimé. ]





Quoique nous l'ayons dit à chaque publication de cet ouvrage, comme ces
publications ne paraissent que de loin en loin, il faut le répéter toutes les
fois qu'il en paraît une nouvelle : les *Études de moeurs au XIXe siècle* sont
un recueil des productions que M. de Balzac a déjà fait insérer, à diverses
époques, dans diverses *Revues* ou recueils périodiques ; mais seulement, des
deux volumes dont se compose chaque livraison de cette collection, l'un est
consacré aux *nouvelles* anciennes, l'autre renferme un roman inédit ; le
vieux fait passer le neuf, ou le neuf fait passer le vieux, selon que l'auteur
a été, naguère ou maintenant, plus ou moins en verve. La livraison où s'est
trouvée *Eugénie Grandet* a servi de passeport à *Ferragus* et à *l'Histoire
des Treize dévorans.* Aujourd'hui, c'est *la Recherche de l'absolu* qui doit
servir de manteau ou de garde d'honneur à des nouvelles que déjà le public
connaît ou peut connaître, puisque chacune de ces nouvelles a vu le jour en
1831-32, ou 33. Précédemment, M. de Balzac avait fait deux grandes divisions
de ses *Études de Moeurs au XIXe siècle* : l'une, *Scènes de la vie de
Paris ;* l'autre : *Scènes de la vie de Province.* Il semble qu'il a renoncé à
cette classification ; du moins, les deux volumes que nous avons sous les yeux
ne font mention ni de l'une ni de l'autre, et sont réunis sous le titre de
*Scènes de la vie privée.* C'est donc uniquement de la *Recherche de l'absolu*
que nous avons à occuper nos lecteurs, puisque cette nouvelle, ou ce roman,
est le seul ouvrage nouveau de la livraison actuelle.

L'action se passe dans la Flandre française, à Douai, et comprend une
période de dix-neuf années, depuis 1812 jusqu'à 1831. L'origine de la famille
Claës, quoique bourgeoise, avait une antiquité nobiliaire toute respectable.
Elle remontait, d'une part, à une branche espagnole, les Molina de Nourho,
dans le royaume de Léon ; et d'autre part, à Claës, échevin de la ville de
Gand, lors de la révolte des Gantois contre Charles-Quint, et qui perdit la
tête à la suite de cette révolte, suscitée pour la liberté, c'est-à-dire pour
les priviléges de la ville et des corporations que l'empereur voulait en
dépouiller. Dans les villes libres de la vieille Flandre, les bourgeois
pourvus des fonctions municipales constituaient une sorte de corps de noblesse
qui s'alliait ou entre elle ou avec les familles les plus nobles des autres
provinces, et si les titres de féodalité leur manquaient, un juste orgueil et
des écussons ne leur manquaient du moins pas. Telle était la position des
Van-Claës, mi-Espagnols et mi-Flamands, lorsque, dans le XVI|e| siècle, le
chef de cette famille fut décapité pour un fait qui, loin d'emporter
l'infamie, rehaussait singulièrement la puissance et la gloire de cette
maison. Van-Claës, en politique habile, en chef de famille prévoyant, et en
négociant consommé, avait soustrait toute sa fortune pécuniaire et mobilière
aux confiscations qui pouvaient suivre son supplice. Toutes ses richesses, et
elles étaient considérables, avaient été envoyées à Douai, où la famille
s'était établie de nouveau, et avait ajouté par de nouveaux bénéfices et de
nouvelles acquisitions aux biens de leurs ancêtres ; tellement, qu'au
commencement du XIX|e| siècle, elle possédait environ quatre millions en
propriétés de toute nature. Ce n'était pas seulement de numéraire, bois,
fermes et maisons que se composait cette fortune, partie intégrante du drame
de M. de Balzac, c'était aussi de richesses intérieures et domestiques. Les
moeurs flamandes s'étaient conservées et perpétuées dans les Van-Claës, mais
les moeurs élevées et aristocratiques. Les plus beaux tableaux de toutes les
écoles y formaient une galerie magnifique ; toutes les curiosités que le
commerce avec la Chine avait pu rapporter de ce pays et qui ont tant de prix
dans notre Europe, foisonnaient dans les parloirs et dans les chambres ; les
diamans et les dentelles héréditaires n'étaient pas moins abondans, et la
vaisselle d'argent des Van-Claës était citée comme la plus nombreuse et la
plus belle, dans un pays où la vaisselle est un objet de recherche et de luxe.
Enfin, ils possédaient un inestimable ouvrage d'artiste. Le parloir principal
était garni d'une boiserie sculptée par le célèbre Van-Huysium, dont les
moindres morceaux sont aujourd'hui payés au poids de l'or. On disait que le
vieux Van-Claës, qui avait fait faire son portrait par le Titien, aurait pu,
lors de sa condamnation, racheter sa vie et sa liberté, en abandonnant le
chef-d'oeuvre de la sculpture et de l'amitié au capitaine chargé de sa garde
et de son exécution ; mais l'échevin-tisserand avait déjà dirigé sur Douai
cette boiserie qui décorait maintenant le salon de son arrière-petit-fils.
Cette accumulation séculaire de richesses uniques dans la même famille, était
devenue un sujet d'orgueil pour les Douaisiens, qui n'en parlaient qu'avec
respect et qui citaient *la maison Claës* comme le Muséum, le Versailles, et
le château seigneurial de la ville. *La maison Claës !* c'était tout dire,
sous le rapport de la richesse, de l'antiquité, de la vénération et de la
vertu.

Car les moeurs de cette famille ne s'étaient pas moins conservées nobles et
pures que les richesses grandes et irréprochables. Presque toujours, les gens
de cette maison s'étaient alliés entre eux avec mélange de la branche
espagnole, laquelle, aidée par les secours de la branche flamande, avait
trouvé le moyen de rétablir sa fortune de caste en Espagne, où elle tenait un
rang prépondérant. Toute cette succession de probité commerciale, de noblesse
héraldique et bourgeoise, de richesses foncières, aristocratiques et
patrimoniales, avaient fini, pour la lignée flamande, par se concentrer entre
les mains de M. Balthazar Claës de Molina-Nouhro qui, en 1783, était à la fois
le plus beau, le plus instruit et le meilleur des jeunes gens de la Flandre.
Pour compléter son éducation et de science et de monde, il était alors venu à
Paris, où, bien accueilli de madame d'Egmont, du prince d'Arembeerg, de
l'ambassadeur d'Espagne, du comte de Horn, et de tous les Français distingués
originaires de la Belgique, il avait fréquenté aussi toute la société
philosophique du temps et s'était attaché surtout à Lavoisier, que sa mort
funeste a rendu plus célèbre comme chimiste que comme fermier-général opulent.
Balthazar Claës s'abandonnait avec passion à l'étude de la chimie, sans cesser
de polir ses manières dans la haute et la meilleure compagnie, lorsque la mort
de son père et de sa mère le rappela en Flandre. Après un certain temps donné
à la douleur filiale et au soin de son immense fortune, il songea à se marier.
Son choix tomba sur mademoiselle Joséphine de Temninck, d'une des plus grandes
familles de Bruxelles. Mademoiselle de Temninck avait vingt-cinq ans ; elle
boitait un peu, et la grosseur de l'une de ses épaules la faisait, avec
quelque raison, passer pour bossue. Elle avait déclaré qu'elle ne voulait
point se marier, et elle avait renoncé à l'opulente succession de ses grands
parens pour assurer le rang et la position de son frère récemment devenu duc
de Casa-Réal. Mais, malgré ces désavantages, mademoiselle de Temninck avait un
beau visage, les plus belles mains du monde, et, ce qui valait mieux que tout
encore, la plus belle âme et les plus belles qualités du coeur et de l'esprit,
jointes à une piété toute catholique, aussi profonde qu'éclairée et soutenue
dans tous ses actes. On ne peut pas être médiocrement amoureux d'une femme
pareille, et Balthazar Claës en fut éperduement épris. Joséphine avait
renfermé en elle tous les sentimens que lui inspirait la recherche de l'homme,
à tous égards, le plus parfait de la Belgique ; elle craignait que, malgré la
solidité du caractère de Balthazar, sa passion ne fût un caprice, dont elle
deviendrait la victime avant ou après le mariage, si elle se laissait aller à
tous les mouvemens qu'elle éprouvait, elle, dont l'âge, le bon esprit et le
miroir avaient pour jamais éloigné toute idée de mariage. Elle mit à une
longue épreuve, l'amour et la constance de Balthazar, qui en sortit
triomphant, et enfin, en 1795, elle épousa Balthazar, ne lui apportant alors
pour dot que quelques tableaux de Murillo et de Velasquez, les diamans de sa
mère et les magnifiques présens que lui envoya son frère le duc de Casa-Réal.

Balthazar emmena sa femme à Douai ; *la maison Claës* fut un paradis sur la
terre. Rien n'égalait la noble et profonde tendresse des deux époux, si ce
n'est le grand et charitable usage qu'ils faisaient de leur immense fortune,
laquelle s'accroissait encore chaque année par l'impossibilité de la dépenser
tout entière et par l'excellente gestion de l'époux à l'extérieur et de
l'épouse à l'intérieur. Quatre enfans vinrent successivement montrer la
bénédiction du ciel sur cette maison patriarcale. Deux filles et deux garçons,
le dernier, né en 1809, Marguerite, Félicie, Gabriel et Lucien, furent élevés
sous les yeux de leurs parens nageant, avec une sage entente des choses de la
vie, au milieu d'une opulence inouïe, d'une domesticité nombreuse et de tous
les avantages dont leurs parens jouissaient avec une parfaite modération. Le
frère de madame Balthazar vint à mourir, et la  loi espagnole ne lui permettant
pas à sa soeur de lui succéder dans les domaines inféodés, elle en reçut
pourtant soixante mille ducats, avec lesquels *la maison Claës* acheta, aux
environs de Douai, une forêt considérable et abandonnée, dont le temps devait
doubler et tripler la valeur ; de sorte que ce mariage qui, dans l'origine,
semblait une espèce de folie de la part de Balthazar, était devenu, pour lui,
la source de toutes les prospérités.

Il en jouissait comme il faut, au surplus. Toute la beauté de sa personne
était rehaussée par le soin sans prétention qu'il y apportait ; toutes ses
études, son instruction et ses talens étaient mis à profit pour embellir son
existence domestique. Possesseur de la plus belle galerie de tableaux et des
plus beaux plans de tulipes que la Flandre et la Hollande lui enviaient sans
que jamais l'idée lui fût venue de se séparer d'une seule de ces richesses,
qu'il augmentait encore, c'était par une noble hospitalité habituelle, par
quelques brillantes fêtes annuelles, que se déployait sa magnificence sans
orgueil ; et tout son bonheur était concentré auprès de ses enfans et de sa
femme, qu'il adorait toujours, tandis qu'elle, comme on le pense bien, avait
pour le génie, le caractère et les vertus de son époux, un amour et une
vénération que venaient encore fortifier sa nature et sa piété espagnoles,
jointes aux moeurs soumises des femmes  flamandes. Tous les habitans de Douai
ne parlaient du bonheur et du mérite de la famille Claës qu'avec respect et
orgueil. Deux d'entre eux seulement étaient dans la familiarité de cette
famille : l'un, M. de Solis, parent de madame Van-Claës, son confesseur et son
directeur, ecclésiastique riche, entièrement retiré du mouvement social, d'une
sainteté parfaite, élevant auprès de lui son neveu Emmanuel ; l'autre, M.
Pierquin, parent très éloigné de M. Van-Claës, homme de vingt-six ans environ,
qui était devenu notaire à Douai et qui, à ce titre, faisait les affaires de
la famille.

Cette félicité de quinze ans, non démentie un instant et fondée sur la
vertu, semblait devoir être à tout jamais durable. Cependant, depuis un an ou
deux, tout était changé dans l'intérieur de la maison ; Balthazar ne passait
plus auprès de sa femme et de ses enfans tous les momens qu'il leur consacrait
jadis ; son esprit, sa gaîté, ses ouvertures de coeur, avaient disparu ; il
n'était plus l'amant de sa femme, tout au plus en était-il l'époux. Déjà deux
fois l'anniversaire de leur mariage était revenu et passé sans la fête
solennelle qui jusque-là l'avait toujours célébré. M. Van-Claës ne songeait
plus à ses tulipes, il ne s'arrêtait plus à ses tableaux ; ses lectures et ses
occupations habituelles étaient abandonnées ; une saison s'était écoulée sans
que sa famille allât la passer dans la délicieuse maison de campagne qu'elle
possédait non loin de la ville. M. Claës paraissait absorbé dans une
préoccupation constante ; il était distrait et rêveur, ne répondait que
rarement et vaguement aux questions qu'on lui adressait ; sa toilette était de
plus en plus négligée, tout lui semblait indifférent, et enfin le notaire
Pierquin se crut obligé de venir dire en confidence à *sa cousine* Balthazar
que déjà les biens de son mari étaient hypothéqués pour trois cent mille
francs, et que toute la ville était inquiète et consternée de la voie dans
laquelle la maison Claës était engagée.

On pense bien que Joséphine avait été la première à remarquer le changement
qui s'était opéré dans les manières de son mari ; elle, habituée à être tout
dans la vie de Balthazar, et méfiante toujours dans les infirmités dont elle
était affligée et qui pouvaient plus tôt ou plus tard lui enlever la tendresse
de son époux : l'inquiétude dévorait son âme. Elle avait toujours régné sans
rivale, et Balthazar n'avait jamais eu d'autre passion que Joséphine, à
laquelle tous ses instans étaient consacrés. Maintenant, il restait enfermé
depuis le matin jusqu'au soir dans un grenier de sa maison, et bien souvent
encore il y passait une partie de la nuit, avec son valet de chambre
Lemulquinier, vieux et laid domestique que ses camarades ne pouvaient souffrir
à cause de la confiance que M. Claës avait en lui, et des économies
considérables qu'il avait trouvé le moyen de faire dans la maison, où il ne
prenait plus aucune part dans les travaux journaliers, affectant, au
contraire, de se faire servir par les autres domestiques et de se renfermer
dans son égoïsme et dans ses conférences avec son maître.

L'inquiétude de madame Claës allait jusqu'au désespoir, et quand le notaire
Pierquin vint lui annoncer que tous les biens de son mari étaient hypothéqués
pour des sommes considérables, cette inquiétude et ce désespoir prirent une
tournure plus grave encore. Ils s'aggravèrent de nouveau lorsque, par suite
des renseignemens que Pierquin se procura, elle découvrit une facture de cent
mille francs dus à MM. Protez et Chiffreville, fabricans de produits chimiques
à Paris. Une seule fois, Pierquin avait essayé de parler à son cousin avec
tous les ménagemens exigés vis-à-vis d'un homme si justement considéré, d'une
situation si étrange, et M. Claës lui avait répondu, une fois pour toutes,
qu'il travaillait à la gloire et à la fortune de sa famille.

Si Balthazar eût été un sot, un prodigue, un débauché, le chagrin de madame
Claës aurait pris une autre tournure et d'autres espérances ; mais son mari si
spirituel, si plein de génie, de bon sens, de bons sentimens, n'avait pu
s'enfoncer dans une telle voie que par des motifs d'une haute portée. L'amour
et le respect de Joséphine pour M. Claës, et les habitudes de déférence et de
timidité qu'elle avait contractées envers lui, ne lui permettaient pas d'oser
lui parler et de violer ni le silence que gardait son mari sur ses projets et
ses dépenses, ni, encore bien moins, la retraite où il se tenait constamment
renfermé, et de laquelle madame Claës voyait s'échapper des torrens de fumée.
Judicieuse et d'un esprit élevé, madame Claës, qui possédait quelques talens
de femme, n'avait reçu cependant aucune instruction et n'avait nulle idée des
sciences que Balthazar, au contraire, avait cultivées toujours avec soin et
succès. Retenue par la crainte, et voyant, d'un autre côté, son mari si
tranquille et si plein d'un bonheur auquel elle s'était juré à elle-même de
tout sacrifier, madame Claës resta donc dans le silence. Elle préféra
s'imposer quelques sacrifices ignorés plutôt que de risquer de troubler la
paix qui régnait dans sa maison. Depuis six mois, Balthazar ne lui donnait
plus d'argent pour les dépenses domestiques. Joséphine fit vendre secrètement
à Paris ses diamans pour pourvoir à tout sans rien demander à son mari. Elle
renvoya la gouvernante de ses filles et la nourrice de son dernier enfant ;
elle mit bas, chevaux et voitures, sous prétexte, pour la ville, qu'ils lui
étaient devenus inutiles et que s'occupant déjà de faire faire un grand
mariage à sa fille aînée, Marguerite, elle devait apporter de l'économie
partout. M. Claës ne s'apercevait de rien ; le soin de sa femme à lui dérober
la gêne de sa maison et les ressources qu'elle s'étaient procurées, le
laissaient dans une illusion complète, entretenue d'ailleurs par sa
préoccupation continuelle et dirigée sur des objets bien différens.

Mais pourtant les choses empirèrent ; les revenus des biens hypothéqués ne
suffisaient plus à payer les intérêts ; une nouvelle livraison de MM. Protez
et Chiffreville, s'élevant à trente mille francs, était arrivée et devait être
acquittée. Il ne restait plus à engager que la maison et le mobilier de la
ville. Madame Claës, après mille combats, se décida à surmonter ses
répugnances et ses craintes, et à avoir un entretien avec son mari. Elle se
trouvait d'autant plus fondée à exiger cette conférence que, par un héroïque
effort d'amour conjugal, et afin d'être toujours de moitié dans les idées et
les occupations de son mari, elle s'était mise depuis quatre mois à lire et à
étudier tous les livres de chimie pour pouvoir suivre et comprendre ce que lui
dirait Balthazar sur ce sujet, dont elle le voyait si préoccupé. M. Claës ne
déclina pas la confidence que sa femme lui demandait ; elle fut remise au soir
ou plutôt à la nuit où les deux époux,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longtemps, devaient se trouver réunis. Seulement, dans la causerie préalable
qu'ils eurent ensemble avant le dîner, et où la question capitale fut
légèrement touchée, M. Van-Claës se montra très gai et très confiant sur ses
futures espérances ; et sur ce que sa femme lui disait qu'ils étaient ruinés,
il se mit à sourire et lui répondit : « Mon ange, demain peut-être notre
fortune sera sans bornes ; *je crois avoir trouvé le moyen de cristalliser le
carbone, la seule substance du diamant.* » La pauvre madame Claës, stupéfaite
de cette révélation, mais toujours soumise à la puissance de tendresse et de
fascination que son mari exerçait sur elle, attendit avec impatience la fin du
dîner et de la soirée, pendant lesquels elle crut remarquer, à travers tous
ses chagrins, que le notaire Pierquin regardait Marguerite avec une attention
qui semblait indiquer des projets ultérieurs de mariage, et pendant lesquels
aussi Balthazar se montra avec sa femme et ses enfans, aussi aimable, aussi
caressant, que dans les beaux jours du bonheur de cette noble famille.

Enfin le moment de ce tête-à-tête si désiré arriva, et les deux époux,
enfermés dans la chambre à coucher de madame Claës, se mirent à causer
intimement des sujets qui les intéressaient si vivement tous les deux. Là, et
au milieu des exaltations que lui causait l'espoir des résultats qu'il
recherchait, M. Van-Claës, fou de science, rappela au souvenir de sa femme,
qu'en 1809, un officier polonais, M. de Wierzchawnia, avait logé chez eux ;
madame Claës ne l'avait point oublié, la figure et les discours de cet homme
l'avaient frappée d'une telle impression, qu'elle avait cru voir en lui le
Diable et ses cornes. C'était cet homme, chimiste habile et ruiné par les
travaux cabalistiques auxquels il s'était livré, qui, par quelques mots jetés
dans l'imagination de Balthazar, avait conduit celui-ci à s'enfoncer dans les
profondeurs fantastiques de la chimie, la fusion et la transformation des
métaux, par la combinaison des gaz, afin d'arriver à la formation du diamant,
substance qui les renferme toutes, dernier produit de la nature et de ses
combustions successives, que la science doit arriver à composer elle-même
quand elle sera parvenue au dernier terme de la décomposition de tous les
élémens. En un mot, c'est le secret de Dieu, c'est la pierre philosophale des
alchimistes que M. Claës veut trouver, c'est à *la recherche de l'absolu*
qu'il se livre, et quand il l'aura découvert, ce qui ne peut tarder, il aura
pour lui-même et il laissera à ses enfans autant de gloire que de fortune, car
ce n'est pas la cupidité qui peut tenter une âme comme celle de M. Claës,
c'est la gloire, c'est la célébrité, c'est l'immortalité qu'il ambitionne. Que
sont donc, auprès de ces deux mobiles, les biens actuels dont il a déjà
dissipé la plus grande partie, et qui, d'ailleurs, seront rétablis et
centuplés par la découverte de l'absolu ! Encore quelques efforts de science
et d'expériences, encore quelques sacrifices pécuniaires et Balthazar est
assuré du succès dont son domestique Lemulquinier, témoin de ses travaux et de
ses progrès, n'est pas moins enthousiaste et persuadé que son maître.

Lorsqu'un homme de la trempe de M. Claës est adonné à une idée fixe qu'il
lui est possible de défendre par les calculs de la science et par la puissance
de l'imagination, il faut renoncer à l'en dissuader. Cette idée, c'est une
folie, mais une folie sublime que l'on ne peut enfermer et guérir ; c'est
celle de Don Quichotte qui a bien raison de vouloir rétablir sur la terre le
règne de la justice et du bon droit, mais qui, pour y parvenir, emploie les
moyens qui ruinent ses biens et sa santé sans pouvoir amener la réalisation de
cette idée d'un homme de bien et de génie, parce que cette idée ne peut être
réalisée. Pour que rien ne manque à la similitude des deux héros, l'un de la
justice, l'autre de l'*absolu,* le personnage de Lemulquinier, auprès de M.
Van-Claës, vient faire le pendant de celui de Sancho auprès de Don Quichotte.
Mais l'auteur n'a pas suivi la voie de comique et de gaîté de Michel
Cervantes. C'est dans l'intérêt et dans le drame qu'il a renfermé l'imitation
de cette *donnée* philosophique qu'il avait, d'ailleurs, puisée dans un procès
célèbre plaidé il y a quelques années à la Police correctionnelle, entre un M.
Anson et un M. Hoëné Wronsky, savant polonais, qui, livré à *la recherche de
l'absolu,* que M. Anson voulait absolument connaître, avait déjà dépensé à
celui-ci plus de 200,000 fr. pour trouver la chose probablement introuvable.

A la suite de cette scène, la pieuse et angélique madame Claës voit bien
que ni ses remontrances, ni ses prières ne pourraient détourner son mari de
ses déplorables projets, dans lesquels il a placé désormais tout le bonheur de
sa vie. Entraînée elle-même par sa tendresse aveugle et maladive pour M.
Claës, elle se dévoue à ce bonheur fantastique, et quoique pénétrée de la
folie de son époux, elle y cède et s'impose les plus cruels sacrifices pour
que Balthazar puisse continuer ses expériences. Il faut voir dans l'ouvrage
même les efforts héroïques, les soins touchans auxquels se livre cette noble
femme pour cacher à tous la monomanie désastreuse de M. Van-Claës, pour
subvenir, par la vente successive de tous ses biens mobiliers et immobiliers,
aux dépenses qu'entraîne la *recherche de l'absolu,* pour conserver à ses
enfans quelques morceaux de pain que la ruineuse folie de son mari ne leur
laissera même pas, et pour leur dérober à eux-mêmes la connaissance de tous
ces désastres, afin qu'ils ne sortent jamais vis-à-vis de l'auteur de leurs
jours, du respect qu'ils doivent à la tendresse et à l'autorité paternelles.
L'analyse ne peut donner qu'une faible idée des combats et des efforts que
madame Claës soutient contre la folie de son mari. Ils sont inutiles même, car
après avoir une fois rétabli les affaires de sa maison, madame Claës les voit,
de nouveau, dévorées par *la recherche de l'absolu,* et elle meurt de chagrin
et de misère, après avoir pourtant concerté avec le vieux M. de Solis, les
moyens de laisser une somme assez considérable à ses enfans, dont elle remet
l'avenir à sa fille aînée, Marguerite, en la chargeant, par son testament, de
prendre sur sa maison et sur son père tout l'empire qu'elle-même n'a pas su
exercer dans l'intérêt de sa famille.

La manie, les recherches et la misère, ne dégradent pourtant pas le
caractère de M. Van-Claës ; tout en le maudissant, non seulement on ne peut le
haïr, mais il plaît et intéresse. Il se bat contre *l'absolu* comme le
seigneur de Quexada contre les moulins à vent ; et aussi comme lui il conserve une noblesse et une dignité qui lui attirent toutes les sympathies du lecteur.
Rien ne décourage ni lui, ni son fidèle Lemulquinier, qui, soupçonné de
bassesse, d'égoïsme et d'avarice, n'est au contraire qu'un fanatique, un dévot
de son maître, auquel il croit, qu'il aime, qu'il soigne et nourrit, et dont
il partage si bien les illusions, qu'il sacrifie aussi à *la recherche de
l'absolu* toutes les économies qu'il a faites depuis trente ans.

Quatre millions enfin ont été à peu près engloutis dans cette idée fixe, et
cette famille jadis si riche et si considérée en est à manquer des choses les
plus nécessaires à la vie. Les tableaux, l'argenterie, les tulipes, la
boiserie de Van-Huysium, tout y a passé. Le vol, le jeu ou le libertinage,
n'auraient pas causé plus de dévastations dans la famille Claës, que la
funeste manie de Balthazar. Mais après la mort de sa femme, et le gouvernement
de la maison ayant passé entre les mains de Marguerite, les choses prennent
une autre tournure. Comme sa mère, et élevée dans le respect de M. Van-Claës,
Marguerite commence bien par céder, et entre autres, elle lui abandonne la
somme réalisée que la pauvre Joséphine croyait, pour ses enfans, avoir mise à
l'abri des besoins dévorateurs de *l'absolu.* Mais cette première faiblesse
accomplie, Marguerite résiste à son père, pour lui-même et pour les autres
enfans. Un personnage qui a grandi pendant le cours de ces événemens vient à
son tour y jouer un rôle ; c'est Emmanuel de Solis, le neveu de l'abbé, qui
est amant et aimé de Marguerite, laquelle ne veut l'épouser que quand elle
aura vingt-cinq ans. Secondée par ce dévoué et religieux jeune homme, qui
devient proviseur du collège et inspecteur général des études ; secondée aussi
par M. Pierquin, le notaire, qui a renoncé à ses prétentions sur la main de
l'aînée, pour offrir ses hommages agréés à la cadette Félicie ; pleine enfin
de résolution et de courage, Marguerite entreprend de relever la fortune de sa
famille. Des biens engagés, d'autres auxquels on n'avait pu toucher, sont
libérés, exploités et mis en telle valeur, que peu à peu les désastres sont
réparés : on se croit revenu au bonheur. L'aîné des garçons, Gabriel, entre à
l'Ecole Polytechnique, l'autre s'élève et prospère, Félicie va épouser
Pierquin ; Marguerite va être unie à Emmanuel... Mais deux fois la manie
scientifique et cruelle de M. Claës vient culbuter et déranger cet édifice si
laborieusement et si religieusement élevé par les vertus et la fermeté de
Marguerite. C'est une lutte entre la folie et la sagesse, où celle-ci succombe
deux fois par des péripéties de surprise et d'intérêt.

Enfin Marguerite et ses amis, un oncle de la branche de Bruxelles,et
Gabriel, qui s'est marié avec la fille de cet oncle, parviennent cependant à
faire ouvrir les yeux à M. Van-Claës. Il rougit de ses erreurs ; il veut aider
à les réparer, il jure d'être sage. On obtient pour lui une recette
particulière dans la Bretagne, ce qui, occupations et séjour, le détournera
des tentations qu'il aurait pu encore éprouver à Douai en face de ses
fourneaux et de ses alambics. Il abandonne une expérience commencée, et bon
gré mal gré, il va, avec Lemulquinier, gérer sa recette bretonne. De nouveau
tous les biens sont recouvrés avec le temps ; la maison Claës a repris toute
sa splendeur et son ancienne physionomie ; la fortune même est augmentée. Les
meubles et les tableaux, les services de linge et d'argenterie ont repris leur
place, et M. Claës est remis en possession de toutes ses jouissances
domestiques passées lorsqu'il quitte sa recette et est triomphalement ramené à
Douai pour accomplir le mariage de ses deux filles avec Emmanuel et Pierquin.
Lui-même, quoique toujours mentalement préoccupé de la *recherche de
l'absolu,* a repris sa belle figure, ses bonnes manières, son amabilité
parfaite. Chose incroyable ! cette expérience qu'il avait laissée en train au
moment de son départ pour la Bretagne, elle s'est achevée en son absence, et
la combinaison des gaz et des métaux a produit un diamant que Lemulquinier
trouve au fond du creuset et qu'il rapporte à son maître, devant tout le monde
au moment de la signature des contrats. Ce n'est pas le produit que M.
Van-Claës avait tant cherché ; mais enfin, c'est un produit ! Cette fois
néanmoins la paternité l'emporte sur la science, le père est au-dessus du
chimiste, et M. Van-Claës ne songe qu'au bonheur de ses enfans, auxquels il
doit la réhabilitation de son honneur, de sa fortune et même de sa raison. Il
reprend à Douai toute la considération dont ses ancêtres et lui avaient joui
si longtemps. Le bonheur de sa famille s'accroît encore même. Marguerite et
son mari sont appelés, par des décès successifs, à l'héritage de leurs parens
maternels, titres et biens. Ils se rendent en Espagne pour recueillir cette
opulente succession ; leur séjour s'y prolonge naturellement. Que trouvent-ils
à leur retour !...... M. Van-Claës, plus ruiné, plus dépouillé que jamais,
dans un dénuement complet ainsi que sa maison, où il ne laissait plus entrer
personne afin de cacher à tous les yeux les ventes journalières qu'il faisait
de tous ses effets pour subvenir aux dépenses que nécessitait *la recherche de
l'absolu,* à laquelle il se livrait avec plus de fureur que jamais en
l'absence ou dans l'éloignement de tous ses enfans. Sa tête même n'avait pu
définitivement résister à l'opiniâtreté et à l'inutilité de ses poursuites scientifiques. Il était tombé dans une sorte d'égarement et de dégradation
personnelle, partagés par Lemulquinier, et qui ne pouvaient plus suffisamment
le protéger contre le ridicule et la risée publique. Le peuple et les enfans
de la ville en faisaient un sujet de moquerie et de superstition vulgaire, car
on le prenait pour le Diable ou pour un sorcier. Marguerite et Emmanuel,
prévenus de ces nouveaux désordres, quittent sur-le-champ l'Espagne et
accourent en toute hâte à Douai. Le jour même où ils arrivent, leur père,
objet des insultes et des mauvais traitemens de quelques polissons de la
ville, est frappé d'une attaque de paralysie, à laquelle il succombe après
avoir cependant laissé échapper quelques paroles d'un ton inspiré et qui
donnent à croire qu'il avait enfin trouvé cet objet de la recherche de toute
sa vie, L'ABSOLU, dont le secret se dérobe ainsi à l'univers avec
l'existence de son Christophe Colomb.

Les critiques dont cet ouvrage pourrait être le sujet, tomberaient
principalement sur quelques uns des moyens exagérés que l'auteur a employés,
avec une habile confusion, pour parvenir à la réparation multipliée de la
fortune de Balthazar, afin de donner plus de développemens à ce caractère. Il
faudrait aussi reprocher à M. de Balzac des négligences de style qui ne
devraient point échapper à un écrivain tel que lui ; mais les personnages de
madame Claës et de Marguerite, sont si touchants et si bien tracés, l'intérêt
des scènes principales est si bien ménagé, que quoique cet ouvrage ne soit pas
aussi complétement satisfaisant qu'*Eugénie Grandet,* on peut le lire à tous
égards après ce dernier roman, et avec un plaisir à peu près égal.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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