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부분 요약


1. 발자크 시대의 저널리즘
르 피가로 - 보수
마텡 - 사회당
위마니테 - 공산당
르 몽드 - 중립
; 프랑스의 저널리즘은 정치와 직결.

2.
① 라 가제트La Gazette - 프랑스 신문 제 1호
왕정복고시기(루이 18세) - 신문이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했음.
여당 - 왕당파/ 야당 - 자유당
②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
ébats - 후일 야당으로 회귀
③ 자유파의 입헌Le Législature, 꾸리에 프랑세, 르 나시오날 등이 진정한 야당지.
   --> 1830년 7월 신문 탄압에 반대하는 서명 항의문 작성, 혁명의 도화선이 됨.

3.
중도파 - 모레파 : 루이 필립 측근
              - 기조 지지 그룹 : 순이론파의 흐름 추종.
여당
중도좌파 - 티에르
야당 - 우파 : 정통왕조파
          - 좌파 : 과격공화파
좌파 : 왕조좌파
구좌파  : 연립거부
--> 위와 같은 다당화 현상으로 신문 분류도 복잡해짐.

4. 1842-1843 : 보수중도파의 기조 외상, 솔트 내각의 실권 소유. 중도좌파의 티에르는 야당으로.

※ 쥘 자냉, 생트 뵈브의 발자크에 대한 악평 - 발자크와 저널리즘의 대립 ; 전향한 좌익이 우익에 대해 품는 원망 같은 이중적 감정, 애증관계.

I.
1. 1821년 (발자크 21세)
오귀스트 르 푸아트뱅 - 왕정복고기, 삼류 저널리스트
1821~1824 - 발자크 필명 로르 룬Lord R'hoone 혹은 오라스 드 생토벵으로 통속소설 집필
폴 라크르와, 오라스 레송 등과 인연.
소설에서 저널리즘으로 방향 전환.
독서 클럽 : 비싼 책값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신문 열람, 책 대여 서비스. 이것이 책 유통 방해, 출판사는 부수를 줄이고 독서 클럽은 분책을 요구.
* 발자크는 문예비평Feuilleton des Journaux politiques에 문제점 제기
- 책값이 비싸기 때문에(유통 구조의 문제) 사람들이 책을 사보지 않음, 책을 써도 작가는 돈을 벌 수 없음. 
-->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저널리즘으로 전향.

2.1824년
근대 저널리즘의 거대한 세력, 그것이 내포한 커다란 악을 인식.
Feuilleion Littéral 등에 기고, 소책자, 법전 등 집필.
이 시기의 작품들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부 그의 것으로 확인된 작품에서 기질이 엿보임.
당시의 신문 - 대형 정치 신문이 탄압당하던 시절, '비정치 신문' , 문학 신문을 표방하지만 게릴라 저널리즘. 소자본으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신문 소유가 용이함.
신문 소설의 수용.

3. 1825년 - 출판업, 인쇄업, 활자 제조업의 잇다른 실패.
반면 르 푸아트뱅은 『르 피가로』를 인수, 정치 신문으로 전환, 대성공.
많은 빚을 진 발자크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올빼미 당원』(1829.3)을 집필. 
표절 신문 『르 볼뢰르Le Voleur』(1828 창간)에 짤막하게 소개.

4. Emile de Girardin(1806~)
본명 에밀 드라모트, 자전적 소설로 『에밀』이 있음.
친구와 함께 『르 볼뢰르Le Voleur』(표절자라는 뜻, 1828년) 창간.
-->비정치적인 중산계급이 실용지식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점, 지방 여성이 최신 유행정보에 민감하다는 점을 읽은 지라르뎅은 『Journal des connaissances utiles』, 『La mode』창간.

II.
1.
1829년 발자크와 지라르뎅의 만남.
1830-31 발자크는 각종 신문, 잡지에 기고, 소설 집필을 거의 하지 않음.
『Feuilleton des journaux politiques』(문예비평). 지라르뎅과 함께 공동출자. "저널리즘의 힘으로 소설이 벌이가 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저널리즘으로도 돈을 벌 수 있게 하자"는 취지. 예약 구독 시스템 시도.
--> 이러한 시도들은 소설가를 채산성이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음.
 
2. 1830년 7월 혁명(루이 필립)
정치 저널리즘 - 정치 경향이 뚜렷하지 않음.
입헌왕정 옹호/급진공화파적/정통왕조파
1830년 11월~ : 공화주의자 샤를 필리퐁의 『Caricature』에 기고. 저널리즘의 세계에서는 자유파로.
1831년 4월 :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정통왕조파 지지 ↔ 공화파적
저널리즘의 위험성, 폐해 인식. 저널리즘은 '천재의 재기를 빨아먹는 악마'라고 평.
1832년부터 저널리즘 탈출 방식 모색, 정치가로 변신, 소설로 복귀.

3. 1835-36
『Revue de Paris』
의 주간 프랑수아 뷜로가 『골짜기의 백합』 초고를 전매해버려 발자크는 『Revue des deux mondes』와 『Revue de Paris』를 상대로 소송. 저널리스트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뷜로의 조치로 발자크는 대부분의 잡지에서 거부당한다.
1835년 12월 『Chronique de Paris』의 사장이자 편집장이자 사주이자 발행인이 된 발자크는 소송에 승리했으나 1836년 파산한다. 

1836년 7월 1일 지라르뎅, 『La Press』창간.
광고게재로 구독료 인하 방법 창안, 성공, 여당.
정치 이외의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다양한 구미를 충족.
소시민 계급을 타겟으로.
vs『Le Si
ècle』(1836.7.1)의 알만 듀텍. 야당 왕조파.
7.22 지라르뎅, 『Le National』주간 알만 카렐 살해로 『라 프레스』구독률 저하. --> '연재소설'로 기사회생.

*발자크는 사상 최초의 신문 소설가(p.187)
『입헌』지, 자유파
『쥬르날 데 데바』 베론 박사, 으젠느 쉬 『떠도는 유태인』연재.
1852년 이후 '많은 부수, 싼 가격'의 소설 출간.

4. Revue Parisienne
1840년 발자크의 완전한 개인 잡지.
저널리즘에 있어서 패배.
1841년 『인간희극』 전집 계약.
1842년 한스키 백작 사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