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4일 집주변 봄을 만끽.
 

<조팝나무>
영어이름은 Bridal Wreath,
직역하면 '신부의 화관', 즉 부케. 
꽃핀 모양이 좁쌀을 튀긴 것 같다하여 조팝나무.
어린순은 나물로, 뿌리는 해열·수렴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도 조팝나무.
무리지어 있는 걸 보면 봄에 눈이 온것 마냥
정말 예쁘다.

 

 <할미꽃>
오늘 처음 알았다, 할미꽃이 '아네모네 속(屬)'이라는 사실을.
학명은 Pulsatilla koreana.
라틴어 Pulso(치다, 소리내다)는 종모양의 꽃의 형태에서 유래.
아네모네는 '바람의 딸'이라는 뜻.

 

<금낭화>
부르는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다.
강원도에선 며느리취,
영남지역에선 며느리주머니, 며늘취, 등모란, 금낭화
특히 횡성에선 며느리밥꽃, 
그리고 어르신들은 며늘취, 덩굴모란이라 부른다.

 


토양에 민감하여 산성에선 붉은색, 흰색 꽃이 핀다.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남획이 많이 된다"
이날 정말, 마실나온 동네 분이 끝내 분양해 가셨다.

 

 


<민들레>

민들레에 대한 안좋은 추억 하나.

지난해 이맘때 민들레가 다발로 있으면

예쁠 것 같아 대만 똑똑 따라 꽃병에 꽂아놨다.

잠깐 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처참하게 시들어있었다.

다시는 내 너를 따지 않으리라...

 

 


<딸기꽃>

정말 무섭게 번성한다.

그리고 딸기도 정말 많이 열린다.

여름 내내 딸기우유를 물릴 정도로 먹을 수 있다.

물론 모양새는 하우스 딸기에 비할 수 없지만,

갈아서 형채를 알 수 없게 만들면 그만이다.

 

 


<복숭아꽃>

벚꽃만큼이나 예쁘다.

저기서 열리는 복숭아의 반은 벌레들과 까치밥.

맛있는 과일에 벌레가 든다고 하는데 이상타.

정말 너무나 맛없어서 주로 조림을 해먹는다.

 

 


벚꽃보다는 듬성듬성 피지만

꽃모양새가 훨씬 단단하고 곱다.

 


지금은 헐벗었지만 한여름에는

가지가 휠정도로 복숭아가 열린다.

정말 휘어서 부러져버리기도 한다.

 

 


<은행나무>
은행나무에서 새잎에 돋고 있다.
정말 생명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꽃잔디>

집마당에 핀 꽃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봄분위기의 일등공신.

 

 

 

더 잘 자라라고 작년 한해 꽃을 피우고

죽은 줄기들을 잘라주었다.

집마당에 심어진 야생화들 대부분은

엄마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다.

어디서든 예쁜꽃을 보면 한삽 떠갖고 심으시는 엄마.

저것도 어디선가 얻어와 심은 것인데

저렇게 많이 퍼졌다.


 


꽃잔디 위에 뻗어있는 저 나무,

어쩐지 좀 외로워보여서.

 

 


<모종들>

농촌에서는 지금 이맘때가 가장 바쁘다.

올해는 좀 적게 심으시라 했는데...

 

 

 


마침 밭가는 날이라 곡괭이 들고 시늉만하고 내려왔다.

적당히 자라면 밭에 옮겨 심느라 또 애쓰시겠네.

땅에서 거둬 먹는 것들은 무엇하나

손 안가는 것이 없다.

 

 

아직은 저것들이 커서 뭐가 될지

난 분간하지 못한다.

콩 한가지만 알겠다.

 

 *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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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Namensprache)다.
  사물은 목소리가 없기에, 인간이 대신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2006년 2월 21일 

  

*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 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29일, 너는 뫼르소.

 

* 바벨의 언어는 사물의 고유성을 지우고 그것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넣어 분류한다.

 

 

2006년 4월 29일, 너는 카프카가 되어볼래?
           

 * 프레이저(James Frazer, 1854-1941)의 《황금가지》에 따르면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다.

  

 2006년 4월 29일, "On est toujours un peu fautif."

* 그들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사지를 뒤틀며 온몸으로 연기했다. 
   파도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파도가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적 '닮기', 이게 바로 '미메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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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6-05-0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념무상의 경지. 이름 붙인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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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가장 크나큰 매력은 바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인 것 같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습성, 성격, 감정, 그 변화, 행동, 번민, 혹은 환희를 마치 타인의 것처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사랑은 나를 대상화하고, 낯설게 느끼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이해하려고 해보는, 다양한 담론들을 파생시킨다. 
그런데 이 신비스러운 타자화의 심화가 사랑의 파국과 동반되면 그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그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나보다 더 사랑했던 '나'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로 결별을 선언하면, 원래의 나는 그 신비스러움과 똑같은 크기로 이번에는 고통을 느낀다. 사랑한만큼 고통받는다고나 할까.

   책을 읽다보면, 사랑인지 연애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지난한 것들이라고, 내심 그 상처만 부각시키며 되도록 안보이는 가슴 한구석에 감춰두려고만 했던 그런 것들을 다 끄집어 내게 된다.' 낭만적 운명론'을 거쳐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사이에서 한 번 투닥거리고, 극도의 '친밀성'을 확인한 뒤에는 '낭만적인(내가 보기엔 광기어린) 테러리즘'을 저지르는데, 재밌는 건 언제나 테러리스트 자신이 제풀에 지친다는 거다. 난 이 부분에서 알랭에게 감사했다. 늘 그냥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해봐도 별 수 없는, 나로서는 '미친짓'이라고밖에 명명할 수 없었던 그 행동들을 멋지게 포장해주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라는 낭만적 변론이 누군가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니 참 이율배반적이다.

   그런데 이 낭만적 테러리즘이 실로 무서워지는 건 테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자폭을 감행하려한다는 거다. 이 부분에선 좀 신파적이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나와 동일시했던 대상이 떨어져나갔으니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그저 논리로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불행히도 그건 내가 목숨을 걸 만큼 절절한 사랑을 해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할까봐 마음을 전부 주는 걸 미연에 방지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고, 또 다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죽으려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알랭은 꿋꿋하게 자아를 회복하고, 그렇게 또 다른 낭만적 운명의 대상을 찾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왠지 클로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때로는 나와 동일시하고, 때로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던 클로이. 나라면 이렇게 섬세한 남자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클로이의 태도를 보면 사랑은 자기만족적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상호교감이라기 보다는 그냥 자기가 주는 것을 즐기는 것. 이상하게도 사랑만큼 give-and-take의 원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뭐, 그 이상한 마르크스주의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암튼 이건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를 악하다 할 수 없고, 배신자라 부를 수 없는 거다. 

사랑의 교훈.  모든 걸 토막내고 끊어서 단절시켜버린 과거들을 현재완료의 시점으로 끌어올리는 것. 내가 죽어버리지 않는 한 어쨌든 짝사랑이라도 하긴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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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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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끼리는 상호교감한다. '아발론 연대기'와 '미사고의 숲'의 경험을 통해 교감에 동참한다. 미사고의 숲 심장부에는 불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라본디스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아발론(성배가 숨겨져 있는 신비의 섬), 천국, 혹은 티르나노우라는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원초의 세계이다. 그곳은 '인간의 영혼이 계절에 얽매여 있지 않은 장소'로 인간 세계의 시공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신석기인부터 왕당파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의 신화적 인물들이 섞여 움직인다.

기독교의 윤색을 거치지 않은 켈트 신화는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처럼 정제되지 않고, 기독교의 신화처럼 천상의 신화가 아닌 땅의 신화, 숲의 신화이다. 여기서 귀네스는 '카멜롯의 전설' 등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왕비 귀네비어의 이미지가 아니라 '킹 아더'에서 나타나는 녹색과 흰색의 도료로 얼굴을 가린 강인한 여전사의 이미지와 가깝다. 그녀가 대지의 딸을 상징하는 것처럼 켈트 신화는 땅과 자연으로부터 아직 인간이 덜 분리된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제되지 않은 이러한 이미지들은 수많은 매체를 통해 우리의 뇌리에 '야만 savage(英), sauvage(佛)'이라는 단어로 폄하되었다. 요즈음 켈트 신화가 부쩍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지금의 문명의 자연파괴를 억제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흐름의 일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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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4-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4년전 리뷰 썼던 책이네요. 무척 인상깊었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부엉이 2006-04-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녘에 읽을 땐 공포영화 뺨치게 무서운 느낌도 들더군요~^^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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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반을 달리며 읽었다. 하루키가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리면서,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 그 세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하루키처럼 가벼운 조깅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리면서는 책을 읽을 수 없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버스는 거의 타지 않지만) 혹은 자전거를 타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자전거란 실내에 고정되어 있는 운동기구용 자전거를 말한다. 

아직 우리의 문화는 조깅이 자연스럽지 못하기도 하고, 또 나는 달리는 것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키는 차를 타고 달리는 것은 너무 빠르고, 걷는 걷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 낯선 도시를 둘러보는 가장 좋은 속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일단 달리면 너무 숨이 차고 걷는 것보다는 집중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달리기는 잡념을 없애고 싶을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중력이 형편없는 나는 지하철에서도 옆사람의 이야기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하면 (그러니까 내가 그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흐름을 파악하게되면),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 정도가 모르긴 몰라도 남들보다 심하다. 그러니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 내겐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처음에는 바른 자세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고, 책상 앞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바닥 혹은 침대로 그러다보면 마지막엔 누워서 책을 읽게 된다. 눕기는 또 거기서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엎드렸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하는, 온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여러 자세로 변형된다. 그런데 이런 자세들은 안경알은 점점 두꺼워지고, 눈은 점점 작아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므로 절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장시간 꼼짝 않고 있으면 몸이 둔해지고 살도 찌고 근육도 약해진다. 그래서 한때는 집에 휴대용(?) 무중력실이 있었으면 했었다. 거기선 온갖 자세가 가능하고, 특히 누워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으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운동기구용 자전거 위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여러 모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루키가 움직이며 쓴 이 책을 '달리며 읽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색다른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기한 건 가만히 앉아서 읽을 때보다 달리며 읽을 때 집중이 더 잘됐고, 왠지 더 즐거웠다는 점이다. 짧지만 깊은 몰입의 순간, 실제 비포장의 오솔길을 달리는 착각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번은 아주 미세한 현기증과 더불어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쉽게도 이런 환각과 취기를 방해하는 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언급이었다. 하루키는 여행지의 표정 묘사를 작품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로 대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펫체스 섬의 수수한 옷차림에 건강하고 혈색좋은 그리스인들을 '조르바계 그리스인'이라고 부른다. 운좋게도『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탕하고 거칠지만 순수한 조르바를 떠올리며 하루키식 유머에 가볍게 동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운나쁘게도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비관광철에 스펫체스섬에 들를 사람들에게 문닫은 상점에 대한 괴괴함은 아쉽고 빈약한 상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또, 하루키는 여행지에서의 무료함을 독서로 달래는데 하루키의 여행이 무료해질수록 그의 독서 목록도 늘어난다. 그런데 그는 '심심해서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꼭 '누구누구의 무슨무슨 책을 읽었다'고 쓴다. 이러한 언급들은 『먼북소리』라는 에세이 전체의 방향과는 무관하므로 건너 뛰고, 이탈리아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어린 짜증을 가볍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나는 간선도로의 분기점 같은 그 표지(판)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그(작가)들이 누군지 작품의 내용이 어떨지 궁금했고, 그 표지를 따라 이탈을 시도했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들은 그의 다른 소설들은 물론, 서양의 고전과 현대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깨워주는 책 속의 숨어있는 지도 같다. 그 지도에는 내가 가야할 지점들만이 단순하게 X자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나보다 먼저 그 지점들에 도달했던 하루키는 내게 있어 미지의 땅인 그곳엔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고, 그곳에서 너의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지 않느냐고 내게 말한다. 이 여행기가 나를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떠나고 싶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니랄 수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소심한 나는 정말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가도될지 망설이게 된다) 나를 또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안내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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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1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해보시길, 일석이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