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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뉴욕 - 영화와 함께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원제 : Kissing Jessica Stein)'에 삽입된 엘라 피츠제랄드의 '맨해튼'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스티브 티렐이 부르는 맨해튼을 들어봤는데, 나쁘지 않다. 엘라보다 질퍽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맨해튼의 어딘가를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싶게 만든다. '뉴욕 삼부작'을 읽고 있으려니, 솔직히 소설 속 뉴욕은 그야말로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 배경이고, 또 별로 가고싶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이 얼마나 지독한지 한번 가서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은 비싼 공연표를 공짜로 준 친구에게, 표값의 반의 반도 못미치지만 성의표시나마 하려고 선물하려던 책인데, 주기 전에 슬쩍 훑어 본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끝장을 보고 말았다. 접힌 자국, 넘긴 흔적 없이 본다고 애쓰긴 했는데, 어딘가 내 지문이라도 남아있을까 마음이 쓰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첫 발을 내디딜 누군가가 정해져 있는 그 눈을 몰래 밟아버린 머쓱함이랄까. 이렇게 된 건 이 책이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매력적인 탓이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뉴요커의 사랑'이라는 그냥 그런 영화를 보다가 도대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정말로 세어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 뒀는데 내가 그렇게 게으름을 피운 사이 백은하 같은 발빠른 주자는 이런 멋진 책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나는 저자의 영화에 대한 사랑도 느끼지만, 뉴요커가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으로서 뉴욕에 대해 느끼는 애정, 혹은 일말의 동경심이 짙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 자신의 동경심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겠고. 뉴욕이나 파리 같은, 마치 모든 영화나 소설은 그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 같은 도시나 명소들은, 그 자체의 독특한 색채도 색채지만 그보다는 소위 뉴요커나 파리지엥들과 같은 도시민들이 그들 도시에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각별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관광객들에게는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뉴욕 같은 곳은 어쩌면 너무나 많은 이방인들이 정착해서, 낯설고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 이것은 긍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활기'로 탈바꿈한다 - 바로 그것이 도시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영화 속 장소들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때로는 다리품을 팔아 짚어나가는 걸 보면서, 그 도시의 주민이 아니거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호들갑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보다는 그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온갖 불편함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도시의' 투박함과 거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별난 것으로 만드는 이 묘한 기운 때문에 작가, 영화쟁이,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가 보다.
우리의 서울도 분명 그런 맛이 넘치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우리 서울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도 그만큼 넘칠까. 서울을 배경으로, 그 배경이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이 나와서 꼭 그곳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