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구판절판


또 누구한테나 여행은 중요하지만 미국 사람한테는 특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미국은 초강대국이지만 미국 바깥이 어떤지 잘 모르거든요.-74쪽

왜냐하면 불교는 뭘 이루려고 하지 않잖아.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요구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신을 바라보길 권하지. -98쪽

내가 유럽에서 왔다는 게 부끄럽고 슬펐어. [...]
서구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들 나름대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들은 서구보다 더 풍부한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몰라.-102쪽

가족이나 친구들에겐 연락할 수 있지만 고양이들한테는 아무 소식도 전할 수 없잖아.-137쪽

자기 자신을 위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해주는 것에 인색하다.-214쪽

살면서 의도적으로 찾아야 할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필요한 건 자연스럽게 다가오거든. 내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상관 없어. 내가 뭔가 찾는 게 있다면, 그건... 늘 깨어있기를 바라는 정도랄까.-262쪽

라오스 사람들은 매일 저녁이 되면 강에서 목욕을 해. 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강에서 목욕을 한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강에서 몸을 씻음으로써 서로 연결된다는 건 경이롭지 않아?-264쪽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나와 다르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어. 사람들을 나와 구별하려고 하면, 정작 힘들어지는 건 자기 자신이거든. 나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면 그냥 안아주는 거야.-268쪽

"사람이 살다보면 무엇인가에 마음이 속아 넘어가거든요. 그러면 힘들어지죠. 그럴 때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스승이나 도반이 필요해요. -280쪽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숨쉬기가 편해진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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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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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비운 사이 택배기사가 다녀갔나보다. 연락도 없이 좁다란 우편물함에 억지로 넣은 흔적이 역력한 누런 종이봉투만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쪽지만 덜렁 남겨두고 가버린 뒤의 쓸쓸함. 혹시라도 봉투 속 책에 흠이라도 났을까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행히 책은 아주 멀쩡하다.

우선 책날개를 훑고 'from writer'를 살짝 건너뛴 뒤 contents로 넘어갔다. 인터뷰이들의 사진을 곁들인 목차를 펼치는 순간 뭔가가 목구멍으로 확 치미는 통에 소름이 돋고 울컥했다. 뭐냐 대체, 이 느낌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의 그 막막하고 설렜던 느낌일까, 또다시 떠나고 싶은 욕망일까, 지금 나의 불안감 때문일까, 이 여행자들의 용기에 대한 부러움일까.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는 '여행에 대한 에너지, 저마다 가득한 사연을 안고 있을 여행자들을 보며 느끼는 마음 찡한 그 무엇'이 분명 존재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내 자신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자꾸만 목이 멨다.

나를 가장 감동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미소였다. 햇볕에 그을리고 화장기 없는 그들의 얼굴에는 정말 순수하고, 만족감이 흘러넘치는 미소가 있었다. 가짜가 아닌 웃음, 자신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삶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여행을 통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부정적인 찌거기들을 비워낸 가볍고도 맑은 웃음 말이다. 특히 자메이카에서 온 트레이시아의 이야기와 조촐한 세면도구 사진(265쪽)은 여행이란 바로 그렇게 '무소유'를 배워가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유와 재산의 개념이 정착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무소유는 여행자와 유목민의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책 속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한다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고 양극화는 잦아들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자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이 책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도발적이다. 최근에 본 이병률의 '끌림'은 잔잔하고 일기같은 여행기였는데, 이 책은 환경운동가나 노동운동가의 외침처럼 독자를 마구 선동하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이 책을 덮고 문득 얼마전에 가입한 연금보험 생각이 났다. 여행이야말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삶의 지반이 되어줄 보험같은 게 아닐까하고. 20년 후 그 돈은 삶에 물론 보탬이 되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정말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안주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여행이 내 삶을 전적으로 바꾸어줄 거라고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분명 그것이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며 그런 의구심과 두려움을 버리라고 심하게 나를 유혹한다. 

이 책을 읽고 한 번 떠나볼까하는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는 서울 시내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에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문제는 언제 떠나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겐 아주 '위험한 책'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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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10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리뷰네요^^ 서평단에 뽑히셨던가요? 전 탈락 ㅠㅠ
떠나고 싶은데 그게 언제일런지.. 위험한 책으로~~

부엉이 2006-07-1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 요즘 통장 잔고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

2006-07-11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7-1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은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해요, 그 기회를 잡아야지요 ㅎㅎ !
 
안녕 뉴욕 - 영화와 함께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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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원제 : Kissing Jessica Stein)'에 삽입된 엘라 피츠제랄드의 '맨해튼'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스티브 티렐이 부르는 맨해튼을 들어봤는데, 나쁘지 않다. 엘라보다 질퍽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맨해튼의 어딘가를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싶게 만든다. '뉴욕 삼부작'을 읽고 있으려니, 솔직히 소설 속 뉴욕은 그야말로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 배경이고, 또 별로 가고싶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이 얼마나 지독한지 한번 가서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은 비싼 공연표를 공짜로 준 친구에게, 표값의 반의 반도 못미치지만 성의표시나마 하려고 선물하려던 책인데, 주기 전에 슬쩍 훑어 본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끝장을 보고 말았다. 접힌 자국, 넘긴 흔적 없이 본다고 애쓰긴 했는데, 어딘가 내 지문이라도 남아있을까 마음이 쓰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첫 발을 내디딜 누군가가 정해져 있는 그 눈을 몰래 밟아버린 머쓱함이랄까. 이렇게 된 건 이 책이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매력적인 탓이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뉴요커의 사랑'이라는 그냥 그런 영화를 보다가 도대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정말로 세어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 뒀는데 내가 그렇게 게으름을 피운 사이 백은하 같은 발빠른 주자는 이런 멋진 책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나는 저자의 영화에 대한 사랑도 느끼지만, 뉴요커가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으로서 뉴욕에 대해 느끼는 애정, 혹은 일말의 동경심이 짙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 자신의 동경심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겠고. 뉴욕이나 파리 같은, 마치 모든 영화나 소설은 그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 같은 도시나 명소들은, 그 자체의 독특한 색채도 색채지만 그보다는 소위 뉴요커나 파리지엥들과 같은 도시민들이 그들 도시에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각별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관광객들에게는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뉴욕 같은 곳은 어쩌면 너무나 많은 이방인들이 정착해서, 낯설고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 이것은 긍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활기'로 탈바꿈한다 - 바로 그것이 도시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영화 속 장소들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때로는 다리품을 팔아 짚어나가는 걸 보면서, 그 도시의 주민이 아니거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호들갑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보다는 그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온갖 불편함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도시의' 투박함과 거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별난 것으로 만드는 이 묘한 기운 때문에 작가, 영화쟁이,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가 보다.

우리의 서울도 분명 그런 맛이 넘치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우리 서울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도 그만큼 넘칠까. 서울을 배경으로, 그 배경이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이 나와서 꼭 그곳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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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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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실체가 그러한 것처럼 가면은 자신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데 있다. 무도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한 시간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신분을 떠나 꿈처럼 살기를 원했던 '이상'에 걸맞은 문화 코드였던 것이다. [...]
미뤄보건대 축제 기간만큼은 공동체 의식을 우선시한 것으로 보인다. 축제 기간 동안 신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한 입장이 되어 어울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가면의 힘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너나 할 것 없이 흥겨운 축제에 참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맘 놓고 뒤탈을 생각하지 않고 어울릴 수 있기가 쉽지 않았던 한 시대를 돌아본다면 가면이 일개 소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관계에 있어 출구 역할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귀족도 되어보고 예술가도 되어보고 교황도 되어보면서 누군들 그 묘한 아찔함을 즐기지 않았겠는가. [...]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19쪽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선 뭔가를 자꾸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과[...]-29쪽

앞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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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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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복잡하기 그지없고 평신도의 수준에서는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논쟁의 논리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믿음'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적 믿음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 을 믿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하려는 자체가 모순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약간의 진동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신앙과 종교를 분리시키려는 의식적 행위를 하게 된다. 나는 분명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절망에서 끌어내며 타인들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신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하느님이며, 인간으로 태어나 죽고 '부활'한 예수이다.

그런데 역사가 얘기하는 종교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단'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보편'의 종교 '가톨릭'의 모순이 아닐까. 그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붙일 수 없고, 종교라는 이름도 부적합한 피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란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의 창조주는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악마이며 인간의 정신은 육체(물질세계에 속한)에 갇혀있다는 그노시스파의 이원론 신화는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노시스파는 가톨릭의 폭력적 탄압을, 그들의 신이 악마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로 삼았고, 저자들의 논거에 따르면 그들이 탄압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은 예수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마치 신이 선악과-인간을 앎의 세계로 이끄는-를 따먹은 인간을 벌하듯, "신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그노시스를 얻은 자들을 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지식에 대한 탐구는 계속 이어졌고, 메디치 가문의 플라톤과 이집트 고전 연구가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파르미자니노와 같은 예술가들이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나 헤르메스 사상과 관련하여 소설화되는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가르는 이원론 사상을 통해 그노시스파와 헤르메스 사상이 연결되고, 이는 또 천국의 원형을 본따 지상의 신전을 건설하여 악의 허울에 갇힌 인간의 정신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고대 이집트의 사상과 만난다. 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도시를 건설하는 신성한 임무는 표면적으로 석공, 건축가 조합으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스런 입문단체와 연결되어 탤리즈먼의 도시를 탄생시킨다. 파리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라는 사실과,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며 의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도시 건설에 숨겨진 비밀들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프랑스 혁명의 숨겨진 목적이 탈기독교화에 있었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데, 결론적으로 이단이란 무자비한 배타주의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종교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단이라는 말이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으로 정의될 때 거기에는 힘의 논리가 개입된다. 즉 누가 이단이 될 것인가는 힘을 가진자에 의해서 수없이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가 헤르메스와, 성모 마리아가 고대의 여신들과 동일시되는 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주의 신은 진짜로 하나이거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모순적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단을 논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비교적 상세한 문헌 연구의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사실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문제로 남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련 서적들,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소설들을 읽는데는 좋은 참고서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그동안 미뤄둔 크리스티앙 자크의 『프리메이슨』을 읽어봐야겠고, 앨리슨 쿠더트의『연금술 이야기』와,  이단논쟁도 볼거리였던『장미의 이름』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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