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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집을 비운 사이 택배기사가 다녀갔나보다. 연락도 없이 좁다란 우편물함에 억지로 넣은 흔적이 역력한 누런 종이봉투만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쪽지만 덜렁 남겨두고 가버린 뒤의 쓸쓸함. 혹시라도 봉투 속 책에 흠이라도 났을까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행히 책은 아주 멀쩡하다.
우선 책날개를 훑고 'from writer'를 살짝 건너뛴 뒤 contents로 넘어갔다. 인터뷰이들의 사진을 곁들인 목차를 펼치는 순간 뭔가가 목구멍으로 확 치미는 통에 소름이 돋고 울컥했다. 뭐냐 대체, 이 느낌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의 그 막막하고 설렜던 느낌일까, 또다시 떠나고 싶은 욕망일까, 지금 나의 불안감 때문일까, 이 여행자들의 용기에 대한 부러움일까.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는 '여행에 대한 에너지, 저마다 가득한 사연을 안고 있을 여행자들을 보며 느끼는 마음 찡한 그 무엇'이 분명 존재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내 자신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자꾸만 목이 멨다.
나를 가장 감동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미소였다. 햇볕에 그을리고 화장기 없는 그들의 얼굴에는 정말 순수하고, 만족감이 흘러넘치는 미소가 있었다. 가짜가 아닌 웃음, 자신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삶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여행을 통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부정적인 찌거기들을 비워낸 가볍고도 맑은 웃음 말이다. 특히 자메이카에서 온 트레이시아의 이야기와 조촐한 세면도구 사진(265쪽)은 여행이란 바로 그렇게 '무소유'를 배워가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유와 재산의 개념이 정착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무소유는 여행자와 유목민의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책 속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한다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고 양극화는 잦아들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자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이 책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도발적이다. 최근에 본 이병률의 '끌림'은 잔잔하고 일기같은 여행기였는데, 이 책은 환경운동가나 노동운동가의 외침처럼 독자를 마구 선동하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이 책을 덮고 문득 얼마전에 가입한 연금보험 생각이 났다. 여행이야말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삶의 지반이 되어줄 보험같은 게 아닐까하고. 20년 후 그 돈은 삶에 물론 보탬이 되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정말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안주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여행이 내 삶을 전적으로 바꾸어줄 거라고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분명 그것이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며 그런 의구심과 두려움을 버리라고 심하게 나를 유혹한다.
이 책을 읽고 한 번 떠나볼까하는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는 서울 시내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에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문제는 언제 떠나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겐 아주 '위험한 책'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