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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제아무리 복잡하기 그지없고 평신도의 수준에서는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논쟁의 논리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믿음'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적 믿음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 을 믿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하려는 자체가 모순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약간의 진동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신앙과 종교를 분리시키려는 의식적 행위를 하게 된다. 나는 분명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절망에서 끌어내며 타인들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신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하느님이며, 인간으로 태어나 죽고 '부활'한 예수이다.
그런데 역사가 얘기하는 종교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단'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보편'의 종교 '가톨릭'의 모순이 아닐까. 그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붙일 수 없고, 종교라는 이름도 부적합한 피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란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의 창조주는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악마이며 인간의 정신은 육체(물질세계에 속한)에 갇혀있다는 그노시스파의 이원론 신화는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노시스파는 가톨릭의 폭력적 탄압을, 그들의 신이 악마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로 삼았고, 저자들의 논거에 따르면 그들이 탄압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은 예수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마치 신이 선악과-인간을 앎의 세계로 이끄는-를 따먹은 인간을 벌하듯, "신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그노시스를 얻은 자들을 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지식에 대한 탐구는 계속 이어졌고, 메디치 가문의 플라톤과 이집트 고전 연구가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파르미자니노와 같은 예술가들이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나 헤르메스 사상과 관련하여 소설화되는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가르는 이원론 사상을 통해 그노시스파와 헤르메스 사상이 연결되고, 이는 또 천국의 원형을 본따 지상의 신전을 건설하여 악의 허울에 갇힌 인간의 정신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고대 이집트의 사상과 만난다. 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도시를 건설하는 신성한 임무는 표면적으로 석공, 건축가 조합으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스런 입문단체와 연결되어 탤리즈먼의 도시를 탄생시킨다. 파리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라는 사실과,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며 의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도시 건설에 숨겨진 비밀들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프랑스 혁명의 숨겨진 목적이 탈기독교화에 있었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데, 결론적으로 이단이란 무자비한 배타주의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종교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단이라는 말이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으로 정의될 때 거기에는 힘의 논리가 개입된다. 즉 누가 이단이 될 것인가는 힘을 가진자에 의해서 수없이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가 헤르메스와, 성모 마리아가 고대의 여신들과 동일시되는 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주의 신은 진짜로 하나이거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모순적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단을 논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비교적 상세한 문헌 연구의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사실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문제로 남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련 서적들,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소설들을 읽는데는 좋은 참고서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그동안 미뤄둔 크리스티앙 자크의 『프리메이슨』을 읽어봐야겠고, 앨리슨 쿠더트의『연금술 이야기』와, 이단논쟁도 볼거리였던『장미의 이름』도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