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데이 : 무삭제판 (2disc) - 할인행사
양윤호 감독, 이성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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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강렬한 영화다. 줄거리나 배우들의 연기나. 다각적으로 변하는 이성재라는 배우의 캐릭터나, 오히려 이성재보다는 폭이 좁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악의 화신이라는 진부한 수식어로는 다 표현 못할 최민수의 캐릭터가 영화의 75%쯤 차지하지 않나 싶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구도가 너무도 극명하게 양분되기 때문에 뭐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강혁(이성재)이 김안석(최민수)에게 '불쌍한 놈'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안석은 죽도록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인간을 쓰레기와 청소부로 이분하며 자신의 컴플렉스를 그 쓰레기 치우는 일로 해소하는 인간. 예수를 밀고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유다처럼 오로지 평생을 남에게 분노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게다가 김안석은 영화 끝까지 자신과 화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 물론 그것을 기대한 바도 아니었지만 - 더 큰 연민이 느껴진다.

1988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그해 여름방학 담임 선생님과 우리들은 한학기 동안 쓴 글을 가지고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널리 보급된 시기가 아니라서, 선생님이 뽑아주신 반 아이들의 글을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수작업을 해야했다. 그 문집에 담긴 글의 주제는 다양했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올림픽 개최로 인한 노점상 철거에 대하여' 찬반의견을 논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대외적 이미지와 노점상 철거를 연결시키는 것에 숨겨진 의미를 그당시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로서도 문제의 원인을 애꿎은 데서 찾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어쨌든,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데모 때문에 대학교와 나란히 붙어있던 학교 안에 갇히기가 일쑤였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초등학생들에겐 상당히 급진적인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선생님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대통령은 곧 전두환, 전두환은 좋은 대통령이라는 등식으로 세뇌된 우리들의 의식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선생님께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때로 진실은 너무 꼭꼭 감춰져서 애써 파헤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하셨던게 아닐까 하는 뒤늦은 생각을 해본다. 

민주화가 무엇일까. 영화에서 지강혁의 동생은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잘못된 걸 '합리적으로' 잘된 상태로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치만 이 민주화에는 함정이 있다. 돈과 권력이면 진실도 살 수 있고, 합리도 조작할 수 있는 거다. 그 어떤 사회의 형태보다 민주주의가 조작될 가능성이 짙은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순이다.
민주화라는 거추장스럽고 왜곡의 혐의가 짙은 단어를 쓰기가 부담스럽다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모순이 없다고 느끼며 살 수 있는 사회라고 해두자. 아니, 영화의 막바지에서처럼 햇살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달린 마지막 잎새가 언제 떨어질지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는 곳이라고 하면 너무 낭만적일까. 그러나 이 간단명료하고 대단치 않고, 돈이라곤 한 푼 안드는 설명이 제대로 통용되는 사회는 불행히도 아직 까마득하다. 
그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 영화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흥행실패'라는 비극적 운명이 고스란히 증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재구성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회피, 더 나쁘게는 무관심. 이 영화의 성공 여부가 민주의식의 척도로 사용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눈뜬 장님처럼 살아왔던 내 자신이 더욱 부끄럽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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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2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에서 봤어요. 최민수의 악역 역할, 참 최민수아니면 하기 힘든 오버 카리스마였죠^^ 나중엔 웃음밖에 안 나오더군요. 이성재는 좋았어요. 깡마른 몸에 까칠한 얼굴, 현실과는 다르게 포장되었지만 괜찮은 영화로 그저 기억되네요. 88년 전 대학을 졸업한 해였죠. 인질극을 벌이던 장면에서의 쇠창살이 잊히지 않아요. 당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과 거의 흡사했어요..

부엉이 2006-07-20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시 어렸다는 것으로 무관심을 변명해도 될지... 저는 솔직히 이 사건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성재나 최민수는 무서운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딘가에서 배우란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을 읽었는데, 저 사람들 정말 혼란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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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그래도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는데, 뜨문뜨문 떠오르는 몇 장면은 줄거리를 엮는데는 별 소용이 없다. 우선 영화 포스터의 검은 드레스와 검은 안경을 낀 할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햅번)가 기억나고, 가짜인게 분명한 돌출 앞니의 일본인 유니오시가 할리를 내려다보며 버럭버럭 소리지르던 장면, 그리고 할리와, 그녀가 프레드 혹은 버스터라고 부르던 작가 '나'(조지 페퍼드)가 빗속에서 고양이를 찾아 헤매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난다. 헨리 맨시니의 Moon River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와 원작의 내용이 다소 다른 면도 있고, 좋지 않은 기억력이 오히려 도움이 되어서 이번에는 영화와 좀 덜 섞인 소설만의 재미를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것은 최근에 하루키의 『먼북소리』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아니 카포티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당시에는 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겠지 싶어 당장 읽고픈 마음은 생기지 않았는데, 서점에 갔다가 보고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몇달 전 일들을 돌이켜보니, <카포티>가 2006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영화의 배경 소설인 『인 콜드 블러드』가 출간됐다. 이것들이 내게 0순위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나를 스쳐가는 이 소식들에 나는 한쪽 귀를 열어두고 있었고, 이렇게 해서 내게 있어서 카포티의 처녀작은『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되었다. 책을 읽게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 같다고 본다. 어떤 상황과 조건이 맞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분명 동기가 있으며 잘 생각해 보면 그 바탕엔 분명 운명이나 인연이 존재한다.

제목만으로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발랄한 줄거리가 예상되지만 어쩌면 그런 섣부른 예상 때문에 책을 덮었을 때 더 진한 아이러니와 슬픔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로 본다면 할리가 티파니의 쇼윈도에서 아침을 먹던 모습이 제일 쓸쓸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쇼핑하기엔 너무 이른 아침이라 휑한 거리에서 조깅복이 아닌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빵과 커피를 들고 티파니의 보석을 바라보던 할리. 그녀가 티파니의 찬란한 보석들에 열광하는 속물스런 여자라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녀는 마흔 살 이전의 여자에겐 다이아몬드가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때론 분별도 있는 여자이다. 적어도 마흔 살 이전의 할리에게 보석은 내적 치장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두렵고 공허하고,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아득한 나날'이 계속될 때 티파니에 간다. 거기서 그녀는 티파니의 당당한 분위기로 헛헛한 마음을 채운다. 나는 이러한 그녀를 환상을 좇고 허영심에 찬 여자라고 비난할 수 없다. 티파니는 아무데도 정착할 수 없는 - 할리의 아파트엔 가구도 없고, 이제 막 이사를 온 건지 아니면 곧 떠날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방과 짐들이 놓여있으며, 문패엔 항상 '여행중'이라는 문구가 써 있다 - 그녀가 언젠가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안전함을 느낄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그녀 자신과 우리에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할리의 삶에 대한 불안감은 '내일 어디에 살지 어떻게 알겠냐'며 명함에 새겨넣은 '여행중'이라는 문구로 요약되는데, 이것이 안이함이나 포기 혹은 막연한 방랑벽 같은 걸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살고 싶다는 강한 애착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기를 바라는 따뜻한 애착이다. 사실 앞에서 티파니 쇼윈도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쓸쓸해보였다고 했지만,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두 눈이 어떤 빛을 띨지는 아무도 모른다.

카포티는 할리 골라이틀리를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소위 고급 창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은 그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사회적 통념상의 도덕성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관한 문제이다. 그녀의 삶은 기괴하고 불운한 운명으로 가득찼지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모르고 사는 우리는 어쩌면 그보다 더 불행한게 아닐까..

"난 그날의 즐거움에 도움이 된다면 보석이라도 훔치겠어요. 25센트짜리 동전이라도 훔칠 거예요. 내 자신에게 정직한 걸 말하는 거예요. 겁쟁이, 허풍쟁이, 감정 이상자, 창녀만 아니면 뭐든 되겠어요. 정직하지 않은 심장을 갖느니 암에 걸리겠어요. 좋은 예는 아니네요.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요. 암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정직하지 않은 마음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죠."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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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두 생명을 앗아가고도 야속하게 햇빛이 드는구나...
어째 반갑지 않다, 저 따가운 햇살이.
하늘의 두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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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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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지난번 '향수'에 이어 미용실에서 머리하면서 읽으려고 산 두 번째 책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날 좀 읽어주세요! 날 좀 읽어주세요'하며 끊임없이 유혹하는 책들이 있는데, 튕기는게 연애의 맛이라 했던가, 몇 번의 신경전과 실랑이 끝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1903년부터 구상한 소설은 1908년에 완성되었고,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1985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때 영화를 봤다. 그리곤 무조건 좋았었다. 책을 다시 읽어보니 줄거리가 영 새롭게 느껴지는데, 이렇게 아련한 이미지만 어렴풋이 남은 것은 배경에 잔잔히 흐르던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당시 언니와 나는 줄리안 샌즈(조지 에머슨 역)의 그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고운 금발머리에 열광했는데, 책 속에서 조지는 검은 머리였다. 그렇지만 실망스럽지는 않다. 피렌체에서 만난 염세적이고 낭만적인 청년 조지에겐 금발보다는 검은 머리가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너무도 청순했던 헬레나 본햄 카터(루시 허니처치 역)가 늙은 마녀(!)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 팀버튼의 '혹성탈출'에서 그녀의 눈매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빅피쉬'에서는 역시 괴기스러웠다. 새로운 캐릭터를 굳혀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강렬한 조연이었다. 그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몸가짐. 남들 다 즐겁게 노는 테니스장에서 우아한척 책을 읽던 세실 바이스를 너무도 잘 살려냈다. 

이런 경우 영화와 원작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장면들이 글자들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소설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장면으로 구성된다. 책을 읽다보면 으레 그렇긴 하지만, 이 소설은 활자의 이미지화가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조지를 처음 만난 프레디가 비브 목사와 함께 루시의 '신성한 연못'에서 목욕하는 장면과  조지와의 두 번의 키스와 세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 장면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특유의 영국적 수다스러움과 호들갑을 통해 드러나는 반면 조지 에머슨은 극도로 말이 없다. 그것은 그가 루시를 만나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뱉은 말들은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잘 소통되지 않는 독백같다. 그렇지만 그는 루시를 만남으로써 '다시 살고 싶음'을 느낀다. 어린 시절 루시가 동생 프레디와 함께 몸을 담그고 장난을 쳤던 '신성한 연못'에서 소년처럼 천진하게 물장난을 치는 조지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갇혀 있었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어둑어둑한 숲을 등지고 서서' 비로소 밝은 얼굴로 루시에게 인사한다. 분명 어딘가에 루시의 어린시절 체취가 남아 있고, 이 암울한 청년이 생의 에너지를 되찾는 연못은 바로 '젊음의 성배'이다.

"그날의 연못은 식은 피와 느슨해진 의지를 일깨운 외침이 되었다. 그것은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 축복이었고, 성스러움, 마법, 그리고 젊음을 위한 찰나의 성배(聖杯)였다."(164쪽)

이 소설에서 루시를 사랑하는 두 남자 조지와 세실은 극도로 대조적이다. 세실은 '중세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보호자와 피호자로 이루어지는 봉건적 관계가 전부였다."(189쪽) 세실은 모든 인간을 내려다보며 경멸하고, 루시에게 있어 자신은 항상 보호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루시는 항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9장의 제목은 '예술 작품 루시'인데, 여기서 예술 작품이란 말은 긍정적 의미보다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la nature morte'이라는 뜻의 정물화에 가깝다. 그에게 루시는 부대끼며 느껴야 할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두껍고 값비싼 액자 속에 가두어놓고 먼발치서 눈과 입으로만 이렇다 저렇다 감상하는 박제된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세실이 어찌 감히 쉽게 키스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루시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에게 키스하지 못했습니다."
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그의 표현이 섬세함과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보다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부탁해요...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세실. 진작 했어도 좋았을 거예요. 내가 먼저 나설 수는 없잖아요."
이 지고의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어색함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부적절했다. 그녀는 몹시 의무적인 태도로 베일을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에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금테 코안경이 떨어져서 두 사람 사이에 납작하게 끼였다.
포옹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실패한 포옹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134쪽)

예술적 섬세함과 감성을 그토록 중시하던 세실은 루시와의 첫키스를 너무도 김빠지고 밋밋하게 해버린다. 그는 구구절절 너무 말이 많고 불필요하게 예의바르다. 이런 남자와는 '생활'은 그럭저럭 함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랑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스터는 이 구제불능인 세실을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록 루시와의 사랑은 이룰 수 없었지만 - 그가 진실로 루시를 사랑했을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 바로 루시를 잃어버린 그 순간에나마 그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을. [...] 잔인한 아이러니였지만, 그녀는 관계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에게서 최상의 것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210-211쪽)

그에 비해 우리의 과묵한 조지는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가 루시에게 한 키스는 두번 다 자신의 열정을 이기지 못한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루시에게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던 진실은 루시의 몸과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는다.

"그때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그녀는 덤불숲 밖으로 떨어졌다. 빛과 아름다움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넓은 하늘 아래 끝에서 끝까지 온통 제비꽃으로 뒤덮인 작은 단구였다. [...]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86쪽)

피렌체의 제비꽃밭에서의 첫 번째 키스에 이어, 루시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이웃에 이사온 조지 에머슨이 테니스를 치러 루시의 집으로 놀러왔다가 그들은 두 번째 키스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앞장서자 세실이 그 뒤를 따르고, 조지가 맨 뒤에서 정원 길을 올라갔다. 그녀는 참사를 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사는 그들이 덤불 속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다. 엘리너 래비시의 책은 아직 의도한 장난이 모두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사람들에게서 잊혀 뒤에 남았다가 세실이 책을 찾으러 돌아가게끔 일을 꾸몄다. 그런 뒤 좁은 길에 들어서자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조지가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안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두 번째로 키스를 당했다. (197쪽)

이 두 장면은 모두 6장과 15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두 번의 도둑키스 뒤에 포스터는 그에 대한 설명이나 두 인물의 감정 교환 등을 생략하고 급속히 장면을 전환함으로써 키스를 당한 루시처럼 독자들 또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빛을 발하고 곧 사라지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고, 천둥이 번개에 이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울리듯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린다. 조지는 말보다는 열정 가득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134쪽)

루시는 예의범절의 노예인 세실을 경멸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조지의 열정이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같은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에 이끌리는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조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일관 좀 이상한 노인으로 오해를 받아왔던 에머슨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들키고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정말로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인가보다. 거기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샬럿 바틀릿은 조지와 루시의 사랑에 있어 그 꼭지점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진정한 의도가 숨겨진 그 미스테리한 개입들은 정말 이들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 보이지 않는 힘이었을까? 샬럿 바틀릿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반전의 묘미랄까, 아무튼 이 소설에서 예상치 못했던 복병같은 존재다. 

사랑과 진실. 너무도 많이 우려먹어서 진부하다고조차 할 수 없는 저 단어들이 결국 이 소설을 꿰뚫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도처에 있지만 누구도 정답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저 두 가지 사실로 돌아오게 되나보다. 성향에 따라 사랑과 진실은 우울하게도 발랄하게도 그려질 수 있고, 그 누구라도 자기 맘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유쾌하고 가볍게 그려진 사랑과 진실을 대할 때 나 역시 조지처럼 '다시 살고픈 욕망을 느낀다'. 비록 생명력이 짧은 열정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진실이 담겨있고, 세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망은 군중이다. 나무와 집들과 언덕의 군중이다. 이것들은 사람의 군중이 그렇듯이 서로를 닮게 된다. 그리고 바로 똑같은 연유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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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구판절판


그녀는 강둑 난간에 두 팔꿈치를 기댔다. 그러자 그도 그렇게 했다. 같은 자세가 된다는 것은 때로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영원한 우정을 암시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 -59쪽

그때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그녀는 덤불숲 밖으로 떨어졌다. 빛과 아름다움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넓은 하늘 아래 끝에서 끝까지 온통 제비꽃으로 뒤덮인 작은 단구였다. [...]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86쪽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에게 키스하지 못했습니다."
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그의 표현이 섬세함과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보다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부탁해요...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세실. 진작 했어도 좋았을 거예요. 내가 먼저 나설 수는 없잖아요."
이 지고의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어색함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부적절했다. 그녀는 몹시 의무적인 태도로 베일을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에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금테 코안경이 떨어져서 두 사람 사이에 납작하게 끼였다.
포옹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실패한 포옹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134쪽

하지만 그가 대답 없이 풀밭으로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질문이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조지의 머리를 지켜보았다. 그의 머리는 그녀의 무릎에 거의 닿다시피 붙어 있었는데, 그의 두 귀가 점점 빨개지는 것 같았다.-193쪽

그는 뚱한 세실을 그대로 두고 조지의 검은 머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머리를 쓰다듬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쓰다듬고 싶은 마음도 느껴졌다. 그건 아주 기이한 느낌이었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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