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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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한밤중에 히치콕 영화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유료여서 미뤄뒀던 <현기증>이 무료로 풀렸길래 냉큼 바로보기를 눌렀다. 


<현기증>의 오프닝타이틀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봐서 그런지 배경음악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지금 봐도 그닥 촌스럽지 않은 그래픽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아마도 내가 <현기증>을 본 다음, 의식하지 못한 채 《나사의 회전》을 집어든 건 나선은하 같은 그 오프닝타이틀 그래픽 때문이었을 거다. 영화의 3분의 2 지점까지 시종 느리고 정적인 템포로 간당간당하게 진행되다, 매들린이 교회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뒤부터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주디 역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그리고 허무하게 영화 끝. 처음에 줄거리와 결말을 모르고 봐서 사뭇 황당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의 구조처럼 주디 역시 매들린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더 좋은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스카티가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내(매들린)를 미행하는 내내 우리는 매들린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과 다중의 복선들에 스카티가 속아넘어가듯 우리도 속아넘어간다. 

이 '알 수 없음'은 《나사의 회전》에서 더 심화된다. 이번에 읽은 판본은 열린책들 판본인데, 2006년에 처음 읽은 건 민음사 판본이었다. 줄거리와 소설 작법 자체가 '알 수 없음' 투성이인지라 진짜 어렵게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읽기 어렵기는 했지만 유령이 출몰하고, 시종일관 쫄깃하고, 도대체 결말이 어찌 될 것인가 독자를 안달하게 만드는 그 밀당에 매료돼, 더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집념으로 저런 짓(?)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책이란 사물도 궁합이 맞는 시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번 독서는 성공적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읽힐 게 아닌데, 혹시 몇 분 몇 시간이 지나면 가독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어 가능한 한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열린책들 판본을 다 읽은 뒤 민음사 판본을 살짝 훑어보니 역시 다시 읽어도 어려웠다. 판형, 문체 등등의 문제일까. 이러나 저러나, '심리 소설의 아버지'라는 작가의 타이틀에 걸맞게 주인공인 가정교사의 널뛰는 감정변화를 묘사한 부분은 심하게 말하면 진짜 미친여자 헛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그 흐름대로 받아적는다고 하면, 그걸 읽는 타인은 도무지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헛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읽기 어렵다, 번역이 엉망이다 이런 아우성이 나오는 것 같다. 원문 자체가 그러할진대, 나는 이 정도 번역이라면 진짜 훌륭하게 하셨다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아직 시공사 판본은 읽지 않았는데,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내게 어떤 감동을 가져다줄지 좀 아껴뒀다 읽으련다(확실히 민음사 판본에 대해선 하나같이 번역을 문제삼고 있는 듯하다).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만화세계명작'으로 처음 출간됐다는 것과, 이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낼 때 '유령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가정교사의 심리묘사를 다 빼고 줄거리만 요약하면 유령이 출몰하고 어린아이 두 명이 등장하니 아마도 어린이책으로 타깃을 잡았나보다. 그러다 비유적으로만 등장하는 나사의 회전이라는 모호한 제목보다는 훨씬 으스스하고 언뜻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 '유령의 집'으로 출간했다는 게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령들을 동화 속 고블린이나 요정, 도깨비로 인식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이라는 제목은 작품 내용과 별로 관련없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히려 영어 제목보다 우리말 제목이 이 작품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어릴 적에 본 <어셔 가의 몰락>에서 관뚜껑 나사 풀리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책에서 나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두 번이다(적어도 내가 찾은 바로는). 첫 번째는 액자소설인 이 이야기의 액자부분에서, 가정교사가 썼다는 이 이야기를 묘사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8쪽)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207쪽)


사실 '나사'는 사전적 정의 이상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이 주로 '조이다'나 '돌리다'라는 동사와 짝으로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긴장을 증폭하는 매개체로도 보인다. 그 자신이 비평가였던 작가가 무리하고 무례한 해석(비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또한 다양하고 열린 해석이 가능하도록 사건의 흐름, 인물의 심리에 공백과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심어둔 면이 있으니 나사에 대한 해석도 마음대로 해보라는 영리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요전에는 미드 한니발과 영화 양들의 침묵과 책 한니발 라이징으로 홀린 듯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이번엔 이 두 편의 영화와 책이 주는 흥분감으로 이렇게 주절대고 있다. 
알라딘 북플 앱에 보면 다들 핫한, 들어보지 못한 책들을 읽고 계시던데 나는 왜 이리 고리타분한 고전이 좋은지. 것두 요즘엔 읽었던 거 또 읽고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도 약간 든다. 영화도 옛날 영화가 좋고, 심지어 80년대나 90년대, 휴대폰이 나오기 이전 전화번호부를 뒤지거나 쪽지로 연락을 남기는 그런 아날로그 시대가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가는 증거일 텐데, 그렇게 싫지는 않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P8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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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일공일삼 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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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와 제이미는 우체국에서 나와 그랜트 센트럴 역으로 걸어가서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실멍이 컸다. 차라리 그 편지가 정중하지 않은 게 나았을 것이다. 무례한 편지였거나 비꼬는 편지였더라면 화라도 낼 수 있겠지만, 정중하기 그지없는 거절의 편지를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울었다.

제이미는 클로디아를 잠시 내버려두었다. 제이미는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다독이려 애쓰며 긴 의자의 숫자를 세었다. 클로디아는 계속 울었다. 제이미는 의자에 앉은 사람의 숫자를 세었다. 그래도 클로디아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제이미는 의자 한 개당 몇 사람씩 앉아 있는지 계산했다.

마침내 닭똥처럼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그치자, 제이미가 말했다."(p.157~158)


다시 읽어도 참 좋다. 

이번에 읽으면서 유독 와 닿았던 부분은 "제이미는 클로디아를 잠시 내버려두었다"는 저 구절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밑도 끝도 없이 우는 때, 적어도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하지 못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 '가만히 내버려두기'일 것 같다. 이제는 세 아이 다 그럴 나이가 지나서 우는 일도 드물지만, 기쁨이건 슬픔이건 그 감정을 온전히 소화할 만큼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참지 못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끝내고 재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중요한 과정들을 생략해버리기 일쑤였다. 

제이미가 클로디아를 기다리며 하는 저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돌연 나는 저만큼 견뎌내고 기다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든든한 '부'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만 바라봐' 할 자신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하기 쉽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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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 특별판,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 기념판
법정 지음 / 샘터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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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집을 떠났다가 언젠가는 영영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날이 올 것입니다. 도중에 마주치는 어떤 사건 사고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몸을 바꿀 때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게 이쪽 정류장에서 저쪽 정류장으로 가듯이 그렇게 갈 수 있습니다.˝(27쪽)


*

법정 스님의 글이야 굳이 수식어가 필요치 않지만, '스스로 행복하라'는 저 따스한 명령은 지금의 내게 아주 소중한 화두가 된다. 책 제목도 좋고, 책 속에 담긴 투박하지만 결기 있는 꾸짖음도 참 좋다. 신종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에 동네 이곳저곳을 걸어서 탐방하고 다녔는데, 걸을 때마다 '와 이런 데 이런 게 있었다니' 연방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늘 다니는 익숙한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생각이 틔고 몸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바지런히 몸을 놀리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은 주변에 널려 있다는 깨달음이다. 

*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질박ㅁ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밖으로 흩어져 안으로 여물 기회가 없다. 침묵의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47쪽)

*

나는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이다. 지나칠 정도로 많다. 심지어 연속극처럼 이어서 꾸거나, 늘 같은 배경이 나오거나, 같은 주제가 반복되거나 해서 혹시 내가 두 개의 현실을 살고 있거나 혹은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심할 때는 하룻밤 잠 속에서 몇 개의 다중적 꿈을 꾸는 일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꿈은 유쾌하기보다 괴이쩍고 야릇하고 말로 옮기는 순간 말도 안 되는 게 되어버리는 비논리투성이다. 유난히 그런 꿈을 많이 꾸는 때는, 돌아보면 너무 생각이 많거나 걱정이 많거나 정신이 산란한 때다. 머리가 '망상과 번뇌'로 가득 차면 꿈의 빈도도 늘고 내용 또한 해괴망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거나 하면 꿈도 잦아드는 것 같다.

*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데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61쪽)

*

다시 이 땅에 태어나고 싶은 이유가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니, 참 스님다운 생각이다. 요즘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게 새삼 자랑스럽지만, 수년 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괴감을 느끼던 당시에는 자못 이 땅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다. 스님의 이 이유를 듣고 보니, 그것 참 아름답고 합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


"관세음청세음시자비부세만물무비관세음보살

觀世音世音施慈悲浮世萬物非觀世音菩薩

세상의 소리를 살피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비를 베푸니 이 풍진 세상의 만물이 곧 관세음보살 아닌 것이 없더라.˝(112쪽)

*

관세음, 관세음 많이 그리고 쉽게 들어본 말이지만 이 참에 그 뜻을 오롯이 새겨본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굳이 교리로 따지자면 부처의 가르침에 마음이 더 간다. 부처는 신이 아니란 것과, 부처를 따르지 않아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 경계와 구속이 없어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 서양의 유일신은 뭔가 '답정너'의 느낌이고 지복이라는 조건이 붙는다는 게 요즘 내가 종교에 회의적인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어떻든 '구도'란 누가 해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중요할 터. 

*


스님은 이제 열반에 들었고 그 좋은 말씀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말씀들을 읽는 동안 미천한 어느 인간이 몹시 행복했으니 너무 못마땅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집을 떠났다가 언젠가는 영영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날이 올 것입니다. 도중에 마주치는 어떤 사건 사고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몸을 바꿀 때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게 이쪽 정류장에서 저쪽 정류장으로 가듯이 그렇게 갈 수 있습니다." - P27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질박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밖으로 흩어져 안으로 여물 기회가 없다. 침묵의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 - P47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데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 - P61

"뒷등성이로 올라 오리나무 숲을 찾아갔다. 오리나무 숲도 잎들을 어지간히 떨쳐 버리고 옹기종기 모여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훨훨 벗어 버린 나목(裸木)의 숲속을 거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무들의 체온이 다가선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는데,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에서 도리어 따뜻함을 감촉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한테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 인간미를, 조촐하고 맑은 가난을 지니고 사는 사람한테서 훈훈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가난은 주어진 빈궁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는 선택된 청빈일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악덕이고 부끄러움일 수 있지만, 선택된 그 청빈은 결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 P92

관세음청세음시자비부세만물무비관세음보살
觀世音世音施慈悲浮世萬物非觀世音菩薩
"세상의 소리를 살피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비를 베푸니 이 풍진 세상의 만물이 곧 관세음보살 아닌 것이 없더라."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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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무라사키의 이름은 세계 최초의 훌륭한 소설 《갠지 이야기》를 쓴 여성 소설가 무라사키 시키부에서 딴 것이다. 작중에서 레이디 무라사키는 오노 고마치와 아키코 요사노의 시를 인용한다. 그녀가 한니발에게 작별인사 대신 읊는 시는 《갠지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_토머스 해리스, 《한니발 라이징》, ‘감사의 말’ 中에서, 459쪽




"『마지막 강의』의 표지엔 그 사람, 롤랑 바르뜨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시가를 피우는 바르뜨의 사진으로, 그 사진이 인쇄된 흑백톤 껍데기를 벗기면 뜻밖에 연보라색인 하드커버가 나타난다. 껍데기는 벗겨 선반에 꽂아두고 알맹이로 두거나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이 책은 내게 흑백이 아닌 연보라색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연보라색인 책. 롤랑 바르뜨는 본인의 마지막 ‘말’들이 한국에서 옅은 무라사끼紫색 커버로 묶였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가 무라사끼 시끼부의 「켄지 모노가타리」를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라사끼紫가 자주색과 보라색을 의미하는 글자라는 것도 그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 연보라색을 처음 확인했을 때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롤랑 바르뜨가 게이였다는 점이 그의 강의록 표지가 보라색으로 결정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까가 나는 궁금했는데 그것은 무슨 영문이었을까."

_황정은,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34~244쪽



*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연히 고른 두 개의 소설이 공유한 하나의 인물. 무라사키 시키부.

창비는 외래어 표기를 국립국어원을 따르지 않아 처음에는 그 무라사끼가 그 무라사키인 줄 한 3초 정도 고민했다. 

《한니발 라이징》에서 레이디 무라사키로 등장하는 이 여성은 전쟁의 무자비함(이 말보다 더 무자비한 말은 없을까)이 할퀴고 간 한니발의 정신세계를 일본 특유 정중동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인물이다. 《한니발 라이징》에서 사무라이나 하이쿠로 정화(?)된 어른 한니발의 행동 방식은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보다는 매즈 미켈슨의 한니발이 더 가깝게 구현하는 것 같다. 그야,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은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가 한니발의 탄생을 설명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한니발 라이징》의 마지막 장을 덮고, 《아무튼, 하루키》와 《스스로 행복하라》를 독파한 뒤 시간 순으로는 가장 오래 묵혀둔 《디디의 우산》의 읽다 만 부분을 펼쳤다. 두 책의 장르는 《디디의 우산》에서 표현을 빌려오자면, 묵자의 세계와 점자의 세계만큼이나 다른데도 두 책을 읽을 때의 내 감정선이나 에너지 소모량은 아주 비슷했던 것 같다. 아마도 뇌파를 검사했다면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레드 드래곤》《양들의 침묵》《한니발》을 읽지 않았고(영화만 봄), 읽어본 분들에 따르면 그 결이 한참 다르다고 하는 《한니발 라이징》을 먼저 읽었다. 영화만 보고 비교한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의 공포감보다는 연민과 슬픔이 함께했다. 이 프리퀄은 자신이 탄생시킨 괴물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애정이 담긴 변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어른 한니발의 '범죄'가 용인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


 《디디의 우산》의 두 이야기에서  첫 번째 이야기  「d」는 사실 잘 읽히지 않아, 읽다 말다 하다가 두 번째 이야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넘어오면서 단숨에 읽었다. 아마도 전편에 등장하는 인물, 장소, 감정이 좀 낯설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후편의 이야기는 접점이 더 많아서인지, 마치 침침한 촛불 아래에서 전편의 이야기를 읽다가 누군가 형광등을 탁!하고 켜준 듯한 느낌이었다. 

황정은의 책이 처음이라, 그녀만의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중 인물의 이름이 도드라진다는 점이 낯설고 어려우면서도 재미나고 독특했다. 주인공 이름은 차치하고라도, 엄마나 아빠, 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인물들까지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저마다 이름이 있다. 평볌한 이름도 있고, d나 dd처럼 이니셜로 처리된 인물도 있지만 '여소녀' 같은 60대 아저씨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강렬한 이름도 있다. 아마도  「d」가 읽기 어려웠던 건 저마다의 인생과 무게를 갖고 있는 이 등장인물들의 이름 때문이 아니었나,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이 다루는 우리 사회의 아픈 사건들. 나 역시 그 시대에 대학생이었고 어리지 않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법도 했는데, 어떤 일은 기억나고 어떤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되게 부끄러웠다. 그런 사건들을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 아닌, 김소영과 서수경이라는 구체적 인물들이 겪은 아픈 기억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작가에게 솔직히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어제 우연히 세월호를 기록한 다큐 <부재의 기억>을 봤다. 세상 사람들이 얘기한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 했어도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보상금 바라고 저러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한다는 건 정말 말이 서툰 나같은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다. 


"김소리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자기는 그 일을 말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한 집에서 아이가 자란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김소리는 말했다. 아이가 얼마나 더디게 자라는지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 그걸, 언니는 모른다, 라고. 부모는 아이와 같은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아이의 흔적을 목격한다고 김소리는 말했다. 아이와 같이 산다는 건 매일 숱한 감정적 소용돌이와 아이의 흔적에 휩쓸린다는 거야.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잔뜩 있어. 내 아이가 엉뚱한 장소에 넣어둔 장난감, 이로 씹은 물건들, 아이 옷에 일어난 보푸라기들, 펼쳐진 그림책, 낙서들. 내 집에서 내 아이의 자국들을 볼 때마다 난 그 애들이 생각나. 나처럼 그런 걸 하나하나 목격하며 그 나이로 자랄 때까지 아이를 키웠을 엄마아빠들이. 그러니까 내가 그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처럼 내게 말하지 마. 나는 그 일을 생각해. 그 사람들의 집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생각해. 그래서 말할 수 없어. 무서워서."


_황정은,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98쪽.


작가란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을 속시원히 대변해주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 감정을 말로 하지 못하고(김소리처럼 무서워서였건, 표현 방법을 몰라서 하지 못했건)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한 일말의 변명이자, 그럼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정당화란 느낌을 대신 말해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그럼에도 '그래선 안 됐어'라는 두 생각이 충돌했다. 


*

나는  「d」를 읽을 때, 처음에는 d와 dd가 여고생일 거라 생각했고, d와 dd가 동거를 시작했을 때는 d가 남자이고 dd가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가 d가 dd의 집으로 LP 판을 찾으러 가면서야, 거기에서 구체적인 명사를 발견하고 성별을 알 수 있었다. d와 dd가 이성이라고 생각했을 때 둘의 관계에서 오는 애틋함을 5정도라고 느꼈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감정은 10정도로 치솟았다. 이 또한 어쩌면 편견일지 모르지만, 아니 그런 게 분명하지만 나의 동성 친구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그 아름답고 처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의 소수만이 가지는 감정, 달라서 싫은 관계, 묵자는 모르고 점자만 아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점자에 대한 시각. 이런 소외와 상실의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부터 한 개인의 삶까지를 오가면서 유별나지 않게, 담담하게, 원래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나치에 희생된 동성애자 추모관. 이런 게 있었구나. 나치는 혐오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찾아내 철저하게 혐오했구나. 게이에게는 핑크 트라이앵글을, 레즈비언에게는 '유대인과 섹스한' 아리아인의 낙인인 블랙 트라이앵글을 달아 철저하게 짓밟았구나.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철저하게 상투적인 '위 캔트 저지 뎀'이라는 말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구나.



*

무라사키 시키부가 이어준 이 두 권의 이질적인 소설은 나에겐 이상하게도 상실과 소외의 문제에서 맞닿았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순간의 연민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위안하는 어제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다. 어제의 세계를 살인과 식인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청산하는 한니발은, 그래서는 결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디디의 우산은 "다른 날일 가능성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서로의 무사귀환을 날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벗어나자고, 벗어날 수 있다고, 벗어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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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
스탕달 지음, 강주헌 옮김 / 이마고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그 시대는 예술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발전시켰다. 예술의 모든 유형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다른 유형의 것으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에 온 정열을 쏟았다. 말하자면 회화를 통해서 가장 생생한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배양시켜준 시대였다. 평온한 삶의 시기를 알기 쉬운 즐거움으로 더욱 윤택하게 해주고, 슬픔이 닥칠 때에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회화라는 예술을 그 시대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회화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P55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이라도 예술작품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회화의 역사를 애국심과 연결시키려는 오늘날 이탈리아 작가들의 이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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