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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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한밤중에 히치콕 영화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유료여서 미뤄뒀던 <현기증>이 무료로 풀렸길래 냉큼 바로보기를 눌렀다. 


<현기증>의 오프닝타이틀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봐서 그런지 배경음악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지금 봐도 그닥 촌스럽지 않은 그래픽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아마도 내가 <현기증>을 본 다음, 의식하지 못한 채 《나사의 회전》을 집어든 건 나선은하 같은 그 오프닝타이틀 그래픽 때문이었을 거다. 영화의 3분의 2 지점까지 시종 느리고 정적인 템포로 간당간당하게 진행되다, 매들린이 교회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뒤부터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주디 역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그리고 허무하게 영화 끝. 처음에 줄거리와 결말을 모르고 봐서 사뭇 황당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의 구조처럼 주디 역시 매들린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더 좋은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스카티가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내(매들린)를 미행하는 내내 우리는 매들린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과 다중의 복선들에 스카티가 속아넘어가듯 우리도 속아넘어간다. 

이 '알 수 없음'은 《나사의 회전》에서 더 심화된다. 이번에 읽은 판본은 열린책들 판본인데, 2006년에 처음 읽은 건 민음사 판본이었다. 줄거리와 소설 작법 자체가 '알 수 없음' 투성이인지라 진짜 어렵게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읽기 어렵기는 했지만 유령이 출몰하고, 시종일관 쫄깃하고, 도대체 결말이 어찌 될 것인가 독자를 안달하게 만드는 그 밀당에 매료돼, 더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집념으로 저런 짓(?)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책이란 사물도 궁합이 맞는 시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번 독서는 성공적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읽힐 게 아닌데, 혹시 몇 분 몇 시간이 지나면 가독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어 가능한 한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열린책들 판본을 다 읽은 뒤 민음사 판본을 살짝 훑어보니 역시 다시 읽어도 어려웠다. 판형, 문체 등등의 문제일까. 이러나 저러나, '심리 소설의 아버지'라는 작가의 타이틀에 걸맞게 주인공인 가정교사의 널뛰는 감정변화를 묘사한 부분은 심하게 말하면 진짜 미친여자 헛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그 흐름대로 받아적는다고 하면, 그걸 읽는 타인은 도무지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헛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읽기 어렵다, 번역이 엉망이다 이런 아우성이 나오는 것 같다. 원문 자체가 그러할진대, 나는 이 정도 번역이라면 진짜 훌륭하게 하셨다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아직 시공사 판본은 읽지 않았는데,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내게 어떤 감동을 가져다줄지 좀 아껴뒀다 읽으련다(확실히 민음사 판본에 대해선 하나같이 번역을 문제삼고 있는 듯하다).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만화세계명작'으로 처음 출간됐다는 것과, 이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낼 때 '유령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가정교사의 심리묘사를 다 빼고 줄거리만 요약하면 유령이 출몰하고 어린아이 두 명이 등장하니 아마도 어린이책으로 타깃을 잡았나보다. 그러다 비유적으로만 등장하는 나사의 회전이라는 모호한 제목보다는 훨씬 으스스하고 언뜻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 '유령의 집'으로 출간했다는 게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령들을 동화 속 고블린이나 요정, 도깨비로 인식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이라는 제목은 작품 내용과 별로 관련없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히려 영어 제목보다 우리말 제목이 이 작품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어릴 적에 본 <어셔 가의 몰락>에서 관뚜껑 나사 풀리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책에서 나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두 번이다(적어도 내가 찾은 바로는). 첫 번째는 액자소설인 이 이야기의 액자부분에서, 가정교사가 썼다는 이 이야기를 묘사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8쪽)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207쪽)


사실 '나사'는 사전적 정의 이상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이 주로 '조이다'나 '돌리다'라는 동사와 짝으로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긴장을 증폭하는 매개체로도 보인다. 그 자신이 비평가였던 작가가 무리하고 무례한 해석(비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또한 다양하고 열린 해석이 가능하도록 사건의 흐름, 인물의 심리에 공백과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심어둔 면이 있으니 나사에 대한 해석도 마음대로 해보라는 영리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요전에는 미드 한니발과 영화 양들의 침묵과 책 한니발 라이징으로 홀린 듯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이번엔 이 두 편의 영화와 책이 주는 흥분감으로 이렇게 주절대고 있다. 
알라딘 북플 앱에 보면 다들 핫한, 들어보지 못한 책들을 읽고 계시던데 나는 왜 이리 고리타분한 고전이 좋은지. 것두 요즘엔 읽었던 거 또 읽고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도 약간 든다. 영화도 옛날 영화가 좋고, 심지어 80년대나 90년대, 휴대폰이 나오기 이전 전화번호부를 뒤지거나 쪽지로 연락을 남기는 그런 아날로그 시대가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가는 증거일 텐데, 그렇게 싫지는 않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P8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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