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정말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증인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재판이란 얼마나 많은 허점을 갖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책 내용에 관한 기억은 더더욱 신뢰할 수가 없다. 호들갑을 떨며 재밌게 읽었던 책도 주인공의 운명들이 내맘대로 재구성되곤 하니까. 실제로는 두 연인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그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오랜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다. 처음엔 하루키 때문에 읽었고, 그때는 줄거리만 따라가며 주관도 없이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두 번째 읽을 때는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읽으면서는 이 소설 굉장히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의 정체성을 따지기 이전에 일단 문장들이 너무 모호하고 어려웠다. 처음에는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으로 읽다가, 아무리 읽어도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 부분은 친구에게 선물받은 방대수 씨의 번역(책만드는 집,2001)과 원서를 대조하며 읽었는데, 정말 귀찮았지만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처음 두 번의 독서에서는 굉장히 건조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가졌었는데,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짚어보니, 그 문장들은 공통적으로 자연환경이나 밤의 분위기, 미소 따위에 대한 세부적이고 시적인 묘사였다. 그런 것들은 관찰력이 뛰어나거나 평소 그런 것들에 섬세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잘 이해하기 어렵고, 또 읽으면서도 딴생각이 들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두 개의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고나니 번역의 스타일에 따라 글이 얼마나 다르게 읽혀질 수 있는가를 새삼 느꼈다. 정현종 시인의 번역은 호흡이 짧고 에둘러 번역했다 해야할까, 그래서 의미가 좀 한 번에 확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또 애석하게도 오역도 여러 군데 있었다. 그리고 방대수씨의 번역은 의미를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서 의미는 잘 들어오지만, 원본에는 없는 자의적 해석이 들어간 곳이 약간 보였다. 그 중에 재밌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먼저 정현종 시인의 번역을 읽고서 대체 저 '바람통'이란 것이 뭘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나무들을 뒤흔드는 그 날개 소리와 땅의 충만한 바람통[오르간의 바람통이라는 말을 전용했음]들이 개구리에게 생명을 가득 불어넣어 부풀게 하듯, 바람은 계속 오르간 소리를 내며 시끄럽고 밝은 밤을 연주하고 있었다. (정현종 역, 문예출판사, 35쪽)

역자는 친절하게도 '오르간의 바람통이라는 말을 전용했음'이라고 주석을 달았지만 어쩐지 내게는 시원한 설명이 되지 못해서 방대수 씨의 번역을 읽어보았다.

마구 불어대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밝고 시끄러운 달밤이 되었다. 숲에서는 새들이 날갯짓하고 대지의 힘을 한껏 빨아들여 풍선처럼 부푼 팔딱팔딱 생명이 고동치고 있는 개구리가 목청껏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방대수 역, 책만드는집, 45쪽)

도움을 얻으려던 것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여기서는 '개구리가 목청껏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분명 의미상으로는 바람 소리가 마치 울음주머니를 한껏 부풀려 우는 개구리 소리가 바람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오르간 소리에 '비교'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그래서 원서의 같은 부분을 찾아보았다.

The wind had blown off, leaving a loud, bright night, with wings beating in the trees and a persistent organ sound as the full bellows of the earth blew the frogs full of life. (25)

이렇게 두 단계를 거치고 나니 그 밤의 장면이 조금 쉽게 그려졌다.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말을 만들기도 훨씬 쉬워지는 것 같다. 나름대로 위의 문장을 번역해 보자면, "새들이 날갯짓으로 나뭇가지를 흔들고 생명력 충만한 개구리들이 대지를 울음소리로 가득 채우듯, 시끄럽고 환한 밤을 뒤로한 채 바람은 계속해서 오르간 소리를 내면서 불고 지나갔다."

문장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은 '재의 계곡'을 묘사하는 부분 외에도 아주 많았다. 그건 아마도 그 묘사의 대부분에서 특이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유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온전히 그 의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묘사도 많은데, 그 중에서 개츠비와 데이지가 처음 만났던 어느 가을날 밤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감각적이다.

집들의 고요한 불빛이 어둠 속으로 울려퍼지고 별들이 움직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밤이었다. 개츠비는 그의 눈가로 비쳐드는 시야 속에 보도 블럭이 정말 사다리가 되어 나무들 저 위의 신비한 곳으로 걸쳐져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정현종, 161쪽)

경험으로 비추어 이런 느낌은 가을보다는 한겨울 밤이 더 쉽게 상상되는데, 아무튼 이 장면은 개츠비가 처음으로 데이지에게 키스하기 직전의 광경이다. 저것은 그야말로 사랑에 홀린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도 꿈만 같았기에, 개츠비의 죽음은 대조적으로 너무나 비참했다. 두 번의 독서에서 개츠비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면 -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 이번에는 그의 죽음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죽음 이후의 상황들 말이다. 그는 정말 '위대한'이라는 수식을 받을만 했을까. 아니, 그렇게 외롭게 죽어간 그가 그깟 '위대한'이란 수식어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그 위대한 개츠비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세상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비열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것일 뿐. 그래도 위안을 삼아야겠다면, 이 비열한 세상에서 어차피 죽을 바에야 사랑에 모든 걸 바친 그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성취되었건 아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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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2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20년 전에 읽었네요. 수업을 하면서요.. 미문이 많았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정말 번역의 묘미란~~

부엉이 2006-07-2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서만 읽고, 또 한 번만 읽고 그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marine 2006-09-3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된 책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절망감이 드는군요^^

부엉이 2006-10-0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책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 서고 보니, 정말 더더욱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로그인 2006-12-1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위대한 개츠비'
미아 패로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았었지요.
개츠비의 죽음과 냉정한 여인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그네 2009-06-30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을 보다가 내용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 혼돈스러웠는데 위의 설명을 읽고 나니 저으기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