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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그의 이름에는 언제나 얼마간의 부담이 붙어있다.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라느니 '사상의 은사'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뒤따른다.
진실을 추구하고 바른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름에 파란곡절한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사람.
그래서 첫만남이 쉽지만은 않다.
조금은 그를 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평전>이라는 두툼한 책을 접하게 되면
혹시 그를 미화하려는 편향된 성격의 자료는 아닌지
한번쯤 떨떠름한 마음으로 앞뒤를 살펴보게 되는 것도
'우상 타파'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그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1874~1948)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인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는 책의 서두에 이 표현을 빌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리영희를 아는 '리영희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이 표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말일까?
'사상의 은사'니 '의식화의 원흉'이니 하는 그간의 평가들은 잠시 흘려듣기로 하고
적어도 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하나만 남겨두고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포맷한 채, 책장을 펼쳐든다.
평전[評傳] :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던 시대가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펼쳐진다.
일제시대,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유신정권,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
그리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시대.
처음부터 매서운 눈매, 백발의 노학자로 각인되었던 그의 이미지는
얼핏 배우 류승용(?)을 연상케하는 눈망울 초롱한 20대 젊은이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격변하는 역사의 장면마다 서서히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통역장교로 6.25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군대의 야만성, 부패, 타락, 비인간적 실태'를 목격하고,
언론인(합동통신, 조선일보, 한겨레)으로 사회적 진실과 참상을 고발하며 갖가지 수난을 당하고,
교육자(한양대 신문방송학과)로서 냉철한 '이성'의 글쓰기와 더불어 사회운동에도 앞장을 선다.
그동안 '아홉 번 연행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 재판을 받아 총 1012일의 감옥생활을 하고,
언론계에서 두 번 퇴직당하고, 교수직에서 두 번 해직당하는 파란과 중첩의 수난사'를 경험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러한 과정 속에 골고루 등장하며 그 의미를 드러낸다.
베트남전쟁과 미국, 중국, 일본, 소련 등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중국어도 해독이 가능했던 뛰어난 어학 실력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빠르고 깊게 시대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던 '언론인'이라는 자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거기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글 하나를 쓰더라도 외국 대사관 도서실까지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고 개인 스크랩북까지 만들어가며 글을 썼던 그 열정과 성실함.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추상적인)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친다'는 교만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바탕이어야 한다.
- 평전 p.26; 리영희《역설의 변증》,1987
기자 시절 그는 '특급자료'들을 찾아 매주 미국·영국·프랑스 대사관 공보처 도서실 등을 '순례'했다. 거기서 신간, 논문, 정보저널 등을 읽고 복사하고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으니 그냥 앉아서 주어지는 자료만 소화해내는 기자들이나 대학에서 국제관계 연구를 하는 교수들보다도 앞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그는 해외의 인맥까지 뚫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입수해 들였다. 그는 이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챙겨 스크랩을 만들어둠으로써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인용 스크랩북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 평전 p.242~243;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 말》1995.
이러한 내공을 바탕으로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가려진 실상을 <워싱턴포스트>, <뉴리퍼블릭> 등
해외 언론의 기고를 통해 세계에 알림으로써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나아가
크고 작은 특종과 저술을 통해 국내외 외교관계나 정책 실행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으면서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한 것이나
귀국 도중 도쿄의 서점에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발굴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주요 서작들과 관련 자료에서 발췌된 상당히 많은 분량(평전 전체의 1/2 이상)의 인용문들이
장면 장면마다 생생하게 주인공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1960년대 중반) 그때 그 많은 후배 지식인들이 제기동의 내 집에 모인 까닭은 여러가지지만, 무엇보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국내외 시국정세를 앞서 내다보고, 그것을 설명해서
의미를 밝혀주고 내일의 전망을 예측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캄캄한 세상에 내가 한 줄이 빛이 되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상태였지요.
- 평전 p.201; 리영희《대화》311~312쪽.
그 시대를 암흑으로 몰아가는 권력에 눈이 뒤집힌 자들…(중략)…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위대한 우상 을 믿고 있었다. 반反 무슨무슨주의, 냉전논리, 흑백이분법, 총검숭배 따위가 그것이다. 평화는 약자의 도덕이라는 믿음에는 니체 숭배자였고, 권력의 의지만이 최고의 철학이라는 데서는 히틀러의 아류들이었다.
이들에 의해서 짓눌린 백성들은 이성을 믿고, 그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고, 뒤집혀 있고,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 이성의 빛이 활짝 비치기를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 평전 p.282; 리영희, 풍운아 <우상과 이성>의 일대기 中
…호소력을 갖고 많은 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추상적·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민족적·인간적 삶을 규정하는 문제적 구조를 제대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 추상성과 이론을 뒷받침하는 상황성이 있기에 책의 제목으로 《우상과 이성》이 되고, 저자가 투옥당하고 책이 수난을 당함으로써, 이 책은 문제작 또는 명저로 '만들어지고' '역사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은 이제 추상의 논리세계가 아니라 역사의 현실로서 이 시대 이 사회에 굳건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 평전 p.289; 김언호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만들면서>, 《책의 공화국에서》中
우리 사회, 특히 지식인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는 수많은 언급들이 직접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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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병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
길고 긴 독재정권시대 젊은이들의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 (김삼웅 평전 저자)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
한국 진보적 지식인들의 보편적 세계관 형성에 기여했다.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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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르몽드>는 '사상의 은사'라고 그를 칭했지만 뒤가 구린 권력자들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이라 불리며 탄압을, 보수언론과 보수 성향 지식인들에게는 그 자신이 새로운 '우상'으로 들어섰다는 공격과 비판을 잇달아 받게 된다.
그들에 의해 직장을 잃고 감옥에 수감되고 책들이 금서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는 힘든 시간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생각을 다듬고 세상을 살피며 더욱 명징한 글을 써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의 실천적 지식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일어났던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
독립운동과 사회개혁,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분들이 왜 대부분 '투사'이고 '저항'의 이미지인지, 왜 그토록 반항적이고 모난 사람들처럼 보였는지에 대한 의문들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해소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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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히 이념 편향적 사고에 따른 그릇된 용어를 바로잡는데 힘을 쏟았다. 지식인의 역할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쓰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논어》<정언正言>편에 나오는 "정치의 요체는 곧 정명正名(사물의 이름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라는 뜻에 따른 자세였다. -평전 p.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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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서민, 살리기 같은 단순한 용어들마저 그 뜻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사용되는 현재와 비교하면
1960~70년대에 이미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후배 언론인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요즘 쓰여진 글이 아닌가 시대를 의심케 하는 아래의 내용들은 또 어떠한가.
…식민지적 재산질서를 반영한 지주계층과, 식민지교육으로 '지식인'이 된 '식민지적 엘리트'가 모든 분야의 지배질서의 상층부를 그대로 장악해버렸다.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애국·독립지사들이 적잖게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국내의 대중적 기반이 없었다. 친일·수구·반민족적 세력은 기득권의 보존이라는 공통적 이해문제로 단결됐지만 개혁을 앞세운 세력은, 대중은 조직화되지 못하고 지도층은 분열되어 있었다.
- 평전 p.385; 리영희《우상과 이성》中, 1997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
- 평전 p.443; 리영희《自由人자유인》中, 1990
다만 나라(민족)의 운명을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서는 안 됐었다는 우리 국민의 '직무유기'를 개탄하는 것이다.…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이런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는 해방 직후와 그 후 오늘까지의 미국의 세계관이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 평전 p.349; 리영희《분단을 넘어서》中, 1984
80년대에 일본 교과서 문제의 본질이 '과거'에 있지 않고 '내일'에 있다고 간파한 글(p.350)이라든지,
1994년에 쓴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와 같은 글의 내용(p.475), 심지어
"분열주의자이지 통합주의자가 아니거든"이라는 절묘한 표현을 통해 이승만의 실체와 그들의 권력유지 형태를
예리하게 짚어낸 글(p.161~162)들을 보면, 그 지적에 감탄하면서도 어째서 수십년 전에 이미 비판받고 폭로된
그 장면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보기'로 재방송되고 있는지... 황당한 기시감 앞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 평전 p.27~28; 리영희《우상과 이성》서문, 1977
누가 살아 내었더라도 참으로 힘들었을 격동의 시대, 그 선택의 순간들.
편익보다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심지어 몇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단순하면서 확고한 기준 하나로 감당해온 험난한 여정.
냉전시대에 굶주리고 헐벗는 것으로만 묘사되었던 북한과 중국의 현실을 '미화'시켜 소개했다거나
'반공 친미'라는 대립적 구도를 통해서라도 한국 사회를 한 방향으로 묶어두려던 정치 권력에 대해
비민주성, 폭압통치 등 모나고 불편한 '유언비어'를 주장하여 젊은이들의 반공 의식과 건전한 사상을 '오염'시킨
'의식화의 원흉' 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그에게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비난하고
폄하를 한다고 쳐도 '치열하게 살아온 독립적인 시각의 언론인이자 학자 '임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부인,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님에 대한 회한, 가끔 드러나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은
늘 꼬장꼬장하고 강직했을 것 같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보여주는 듯하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차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 평전 p.517; 유홍준(미술사학자)의 결혼식 주례사, 1975
자신의 글에 책임지는 치열한 자세, 본질을 꿰뚫으려는 끊임없는 노력, 언행일치의 행동하는 양심.
직필 직언을 서슴지 않던 옛 선비의 이미지에 지식과 진실을 대중과 나누려는 근대 지식인의 모습까지.
또 다른 '우상숭배'를 염려하여 남들이 붙여놓은 '사상의 은사'란 표현을 굳이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에 이 정도로 투철한 문제의식과 실천정신을 가진 '지식인'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쯤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몸을 사려 이야기한다고 해도 응당 하나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좌·우의 어떤 정치·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날조·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하였다. 광적인 반공·냉전·전쟁애호·반통일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左와 우右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고, 인간 사유의 가장 건전한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평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 평전 p.481; 리영희《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中, 1994
<오마이 뉴스>에 연재되었던 때문인지 6~10페이지 간격으로 매듭이 되어있는 형태의 평전.
가끔씩 흐름이 끊어지고 단편화 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한 가지 이슈에 지나치게 늘어지지 않고 보기보다 쉽게 읽힌다는 것 또한 이러한 편집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요 저서에서 인용된 수많은 '명대사'와 함께 한 편의 영화나 대하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
<굿나잇 앤 굿럭>, <프로스트 vs 닉슨> 또는 <바더 마인호프> 같은 타입의 영화들이 머리속에 슬쩍 대비되어 떠오른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극적인 장면이나 반전은 아마 힘들것이다. 주인공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으니까...)
고민하는 20대 젊은이의 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시대를 염려하는 80대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끝을 맺을 때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그 의지는 한결같고 세상을 보는 눈과 양심은 늘 푸르다.
아직 그를 몰랐던 이들/이미 아는 이들에 상관없이, '은사'나 '원흉'이라는 세간의 평가보다는
치열하게 살았던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파란만장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시 짚어보면서
사건 이면의 진실을 추구하는 시각, 그런 생각이 빚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 주요 저서의 내용들까지
전반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찬양의 뉘앙스는 미리 걷어내고 읽으시길.)
그분의 책을 읽었다지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으로부터의 통찰'과 몇 가지 비판적 시각 외에는
어느새 흐릿한 기억속에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었던 '지나간 세대'의 독자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너도나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 시대에, 현대 지식인의 사표로 거론되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하여
한국의 근현대사와 그 시대의 '좌와 우'를 뒤흔든 사상적 개요까지 훑어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싶다.
장하준 교수의 교양 경제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부시2세가 '평화'의 이름으로 종교집회에 초빙되기도 하는 전근대적 상황이 가끔 펼쳐지지만, 신문을 뒤지고 대사관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클릭' 한 번으로 위키리크스며 동서고금의 엄청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지금.
지식이 있다고 '지식인'이 아니라 어떤 눈과 자세를 지녀야 참다운 지식인인가를 말없이 보여주는 그의 삶과 글들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 고민과 희생들을 바탕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전진해왔는지를 역사와 함께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다. 스스로 인지하든 못하든, '리영희와 무연한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현대 한국 사회와 이 땅의 지식인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이 너무도 크다.
오랫동안 그분의 서재에 걸려 있었다는 서산대사의 시를 읽으며,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다시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평전>을 덮는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길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내가 걷는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니
▲李泳禧 : 사진출처 ⓒ프레시안(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