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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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도 기록된 적 없다면, 그 시절을 살았었던 혼령에게라도 물어봅시다!
   그 어떤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역사 속 사건이 있다면, 조금 오싹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았지만 지금은 죽어서 혼령이 된 존재를 불러내어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존재가 입은 옷차림만 잘 분석해도 민속학적인 자료가 되지 않을까요?
   고고심령학이란, 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해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혼령을 불러내어 관찰한 뒤 그 혼령이 살았던 시대의 생활양식이나 그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언어들을 고증하는 것이죠. 고증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학문인 고고학에서 심령현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니 다소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기발한 방법인 것 같기는 합니다.

   소백산 천문대에는 이렇게 고고학을 연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문인지 박사와 그의 제자, 조은수. 그곳에서 그들은 고대에 살았던 아이 혼령을 불러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인지 박사가 갑자기 죽고 나자 더 이상 아이 혼령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은수는 혹시 박사의 죽음에 아이 혼령이 관여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산속 천문대에 있던 은수를 서울로 불러낸 것은 서울 한복판에 난데없이 출몰한 거대한 성벽입니다. 이 성벽은 실제로 볼 수 있거나 어떤 관측 장비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곳에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성벽과 마주쳤을 때는 성벽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그것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성벽이 출현한 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매사에 냉철하고 좀처럼 감정 기복이 없던 은수조차 성벽에 가로막혔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막막해서 좌절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은수는 문인지 박사와 친분이 있었던 스위스 학자 한나 파키노티에게 힌트를 얻어 성벽이 나타날 때는 항상 코끼리와 눈이 함께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이른바 '혼령 3종 세트'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고고심령학'은 어디에도 없는, 배명훈 작가가 만들어 낸 학문입니다. 더운 계절에, 이렇게 오싹한 상상력을 발휘해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지경인데 끝을 향해 갈수록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소설입니다. 시작은 SF를 표방하며 장대했으나 끝은 동화로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소재와 전개는 좋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고 물음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게다가 작가는 꽤 불친절한 편입니다. 해마다 문인지 박사가 이끌고 있는 이 고고심령학과에는 '조은수'라는 이름의 학생이 들어왔따고 하는데, 왜 '조은수'여야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명 없이 설정된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메모지를 든 발굴 전문가나 훈련된 고고심령학자가 일반인 목격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 밑바탕은 물론 공부였다. 역사학, 인류학, 언어학, 건축학, 종교학, 그리고 때로는 미술사나 공학까지도. 170쪽

   이것은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변명 같습니다. 우리 같은 독자들은 똑같은 힌트를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고고심령학자들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어 보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게 해줍니다. SF 소설, 과학소설이라고 하면 으레 공상과학이나 사이버 같은 환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런 SF가 아니라는 사실. 또, 등장인물들에 중성적인 이름을 적용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흔히, 고고학 같은 학문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으레 남자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특히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과학자들은 모두 여자라는 사실. 유일하게 처음부터 성별을 알 수 있었던 이한철 대표는 문인지 박사나 조은수와는 달리 고고심령학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무리 작은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천문학자라도 어느 밤 권태에 지쳐 그 일을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됐다. 그가 보지 않으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그 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지 모른다. 하필 그 순간 그 천체가 무슨 특별한 신호를 발산하기라도 한다면, 불운하게도 인류는 그 신호를 놓치고 마는 셈이다. 33~34쪽

   『고고심령학자』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입니다.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되는 일. 이 문장을 여러 일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책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 둔 책 속에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축에는 경사가 져 있었다. 시간은 한쪽으로만 흐르는 강이었고, 그 위에 놓인 존재는 누구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방향이 한쪽으로만 정해져 있었다. 과거로는 갈 수 없고, 미래 쪽으로는 누구나 느린 속도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여행.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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