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 도둑
수잔 올린 지음, 김영신 외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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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난초를 볼 줄도 기를 줄도 모른다. 선물로 들어오는 난분이란 난분은 모두 죽였다. 대학 강사로 가계가 어렵던 선배가 큰맘먹고 사준 난분을 죽였을 때는 속도 많이 상했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으나 난은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랜다. 선배가 우리집에 와서는 꽤 섭섭해 했다. 마치 내가 쌓은 인격이 허물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식물을 선물할 때는 돈을 꾸어줄 때와 똑같이 어떤 기대도 상대에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잃기 십상이다. 여튼 난이란 익히 알기로는 군자의 도락물인데 물론 그것도 나와는 다른 한 개의 개채라서 어떤 곳에서는 열정의 대상, 집착의 대상인가 보다. 거기서는 사람을 홀리고, 미치게 하고, 죽이기도 한단다.   


기자가 쓴 논픽션. 배경인 플로리다의 모습은 정말 끈적거리고 위험하다. 마이애미비치의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끔찍한 습지.


후텁지근하고 축축하며 벌레투성이에다 늪살모사, 방울뱀, 악어, 자라 비슷한 거북이, 유독식물, 멧돼지, 몸에 달라붙고 코나 눈 또는 몸 안으로 마구 날아들어오는 것들이 우글거린다. 늪지에는 7피트 정도의 물이 괴어 있으며, 주변 공기는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벨벳 휘장처럼 무겁다. 나무둥치는 땀으로 범벅된 것처럼 보인다. 잎사귀들은 습기로 인해서 미끈미끈하다. 진창에 한번 발이 빠지면 여간해서는 발을 빼기가 힘들다. 발을 빼더라도 진흙이 신발에 찐득찐득 달라붙어서 발을 빼기가 힘들다. 축축하지 않은 것은 모두 시들어 죽어버린 것이다. (63p.)


플로리다에서 몇 달 살아본 신랑에게 이 비슷한 얘기는 들었어도 이 정도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열대는 어디나 그러할 것인즉슨 도시민이라서 그것이 끔찍한 것일 뿐 아니겠는가. 


거기에 라로슈라는 난초, 그것도 부르는 게 값인 '유령난초'를 찾아 헤매는 채취꾼이자 재배자가 나온다. 그를 취재하며 난초, 그러니까 우리는 양난이라 부르며 한편으로는 업신여기는 그 난초와 그의 재배역사, 거기에 얽힌 피비린내 나는 사람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난초도둑'이다. 사람도 얘기도 모두 실화다. 오지에서 만난 원주민들이나 야생 동물보다는 또다른 난초 탐색꾼을 경계해야하는 상황과 금광을 찾으러 달려갔던 사람들의 욕망이 난초에 투사되어 벌어지는 다양한 모습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2000포기 난초를 들고 말레이시아에 은둔한 일본항공 창립자 미치히로 후카시마, 야생 난초 불법 채취 혐의로 네차례나 법정에 선 중국의 젊은 수집가, 3000포기의 난초를 잃어버린 뒤 이웃에게 총을 난사한 청년 등 난초에 미친 사람의 이야기는 수도 없다. 역사 속의 난초 수집가들은 난초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1901년에는 난초채취꾼 7명이 필리핀에서 몰살당했고, 무명의 수집가 수십명은 원주민과 풍토병에 목숨을 빼앗겼다. 난초가 자란다는 습지란 습지는 모든 생물이 위협 대상이었고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난초채취꾼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난초 사업가 프레데릭 샌더는 10여명의 채취꾼을 브라질과 인도, 멕시코, 버마 등지에 파견해 난초를 싹쓸이해 왔다.  


채취꾼들은 더없이 거칠었고 그들간의 분쟁도 끊이질 않았다. 서로 죽이고 서로 가로챘다. 난초는 돈이었고 온실을 가질수 있는 부자들은 채취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어떤 난초는 한 줄기에 5000불이 넘는 것도 있었다. 대량으로 인공배양, 재배가 가능한 지금도 새로운 자연 품종의 난초를 얻으려는 채취꾼이나 수집가들에게는 더없는 열정과 집착의 대상이다. 세상에 돈 아닌 것이 없다. 그 돈은 대개 사람의 품위를 좌우한다. 그렇게 해서 난초에 대한 열정과 집착은 아주 속물적이 되어버리지만 그들의 기이한 열정과 집착은 기자로 하여금 삶에 필요한 열정의 대상을 궁금하게 만들고 또한 찾아 다니게 한다.  


나는 수없이 많은 공터를 지나쳤고 그 공터들 너머로 그보다 더 많은 공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뒤로 텅 빈 도로를 쳐다보았고, 눈을 들어 텅 비어 있는 하늘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이 이토록 크다는 사실로 인해 뼛속 깊이 고독감이 스며들었다. 이 세상은 무한히 크고, 사람들은 늘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사물들과 사람들이 있고, 나가야 할 방향 또한 무수히 갈라져 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이 거대한 세상이 좀더 다루기 쉬운 크기로 깎아 다듬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무한하거나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난초채취꾼이었다면, 이곳(플로리다의 거의 전부분인 습지들과 언제든 야생상태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플로리다의 개발지들-shosha)이 이토록 슬프게 보이거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가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회의 땅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76p.) 


기자는 난초채취꾼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유령난초'가 그래서 보고 싶다. 그것은 무엇인가.  


1844년에 식물학자 장 쥘 린덴은 쿠바에서 눈처럼 흰, 아주 흥미로운 난초를 발견했다. 그 난초는 잎이 없이 뿌리덩어리만 달고 있었기 때문에 '린덴에 의해 발견된 뿌리가 많은 식물'이라는 뜻의 폴리리자 린데니라고 명명되었다. 1880년에는 커티스라는 탐험가가 파카하치 스트랜드(플로리다의 한 지역. 이 책의 주된 배경이자 주인공뻘-shosha) 근처의 콜리어 카운티에서 쿠바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종을 발견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폴리리자 린데니였다. 그 후로 플로리다에서는 그 난초를 속칭 '유령난초'라 불렀다. (127p.) 


오른쪽 사진이 바로 유령난초, Ghost Orchid다. 찾기도 힘들고 아주 잠깐 동안만 나타나고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매료시키고 재배하기도 불가능한 유령난초. 단지 전설에 불과한 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진짜 유령인지도 모른다. 유령난초를 보지 못한 저자는 이 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이 끔찍한 플로리다에 계속 오겠다 결심한다. 


흰색 난초는 있지만 검은색 난초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히 검은색 난초를 찾아 헤맨다. (78p.) 


이 문장을 보면서 어쩌면 난초 아닌 그 무엇이래도 열정과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미 우리는 그 대상을 각기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영화 <어댑테이션>의 여주인공처럼,  


내 인생을 돌려줘. 망가지기 전으로 되돌려 줘. 아기 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래. 새로 살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덤.  영화도 있다  


  어댑테이션(2002, Adaptation)


감독-스파이크 존즈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 메릴 스트립 / 크리스 쿠퍼
각본- 찰리 카우프만 
 


라로슈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태도는 거칠고 무뚝뚝한 기질에 도발적이고 역겨운 유머감각을 지녔고 약속을 남발하고 그마저도 항상 늦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 있다. 그에게 난초에 대해 물어보면 자상하고 열정적으로 그것에 대해 설명한다.  그 자신감은 전염된다. 그를 사람들이 좋아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하려고 책상 앞에 앉은 카우프만의 머리 속에 그 비슷한 사람 하나가 떠올랐음직하다. 세상에는 없는, 그리고 그가 나였으면 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쌍동이였을 것이다. 열정의 대상을 찾는 기자 수잔 올린과 그의 취재 대상인 라로슈는 쌍동이 형제 극작가로 변주된 것. 이 기이한 변주를 이해 하는 데 그의 <존 말코비치 되기>가 들먹거려지는 것은 전혀 엉뚱한 일이 아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내 보기에 '열정을 가진 존재와 그의 대상'이다. 논픽션으로 픽션을 만들어낸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감흥이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엔딩 부분의 노래 '해피투게더'와 노란 小菊과 도시의 매일 아침 풍경이다. 사람들의 아침이 매일 시작되고 그들의 열정이 매일 어딘가로 향하는, 그러나 그것이 도무지 감지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 사는 것에 힘이 부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언젠가 열정의 대상을 찾았고 그를 향해 매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나 그가 열정을 품고 집착했던 것을 풀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현재의 상황. 어쩌면 라로슈처럼, 그와 비슷한 채취꾼들처럼, 그들을 고용했던 난초수집가들처럼 돈으로 환산하지 못하는 열정은 우리 삶에는 끼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까?


지난달 30일(작년 6월의 일이다) 오후 7시25분쯤 서울 관악구 봉천7동 야산에서 유명 S대 시간강사 P(34)씨가 소나무에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동료강사 이모(34)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씨는 “P씨가 오랫동안 귀가하지 않아 실종신고를 낸 뒤 P씨가 사용한 핸드폰 기지국을 조회, 야산 근방을 경찰과 수색해 보니 P씨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P씨가 2년 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시간강사로 재직하다 최근 교수 임용에 실패, 몇개월 전부터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는 유족들 진술에 따라 이를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이 기사가, 이 사건이 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너무 이르진 않았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죽인 것이지. 어쩌면 잘못 찾은 열정이었던 거야. 아니, 잘못 태어난 걸지도 몰라. 아직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런 세상이란 건 아무래도 인정하고 끄덕여야 할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난초도둑'을 읽으면서 또 다른 책 하나가 계속 떠올랐다. 읽는 중에는 도무지 확연하지 않아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던 소설.


식민지 전시회 L'exposition coloniale


에릭 오르세나 저/김병욱 역 | 예하출판 | 1994년 12월
ISBN : 897385254X, 8973852558 | 페이지 : 682



난초채집과 더불어 유럽에서는 이국 식물에 대한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식물 세밀화는 지금도 많이 돌아다니거니와 그들의 식물전시회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이는 귀족취미와 맞물려 상당한 전성기를 누렸던 모양. 서양에는 왜 이렇게 식물 세밀화가 많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식물전시회가 왜 이리 성황이었는지도.


이걸 읽은 시기는 뒤져보니 10년 전이다. 당시 그들의 풍조를 몰라서 그저 읽기만도 지쳤는데 '난초도둑'을 읽어가다 보니 이 책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유럽의 식물수집가들과 그들이 채집꾼들을 내몰아 전세계에서 그곳의 자생식물들을 뿌리채 뽑아 배에 실어 나르는 풍경이, 그걸 콜렉션이라 하여 전시회를 하고 거기에 모여드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이 책에 잔뜩 실려 있다. 남미로 가는 유럽인들과 그 곳의 모습 또한 그려져 있다. 정작 읽을 때는 그 모습을 알 수 없었으니 이제는 다시 들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유머까지도 즐겨야겠다. 이 소설은 1988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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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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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우연'에 기대는 솜씨가 탁월하고, 역시 '우연'을 말하는 힘이 거세다.

 등장시킨 모든 작가들 그러니까 주인공 시드니 오어나 존 트로즈, 두 명의 실비아 모두 허구 속의 인물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고 그들의 작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심는 힘을 오스터는 다시 발휘한다. 그러나 모두 가짜들. 그들은 다만 오스터가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탐구했는지 눈치채게 만드는 이상한 인물들. 그들에게 속아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역시나 특유의 환상적인 우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전작 <환상의 책>을 읽으며 나는 오스터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름지기 '창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작가'야말로 이렇게 캐릭터를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했었다. 모두 가짜여야 하고 게다가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덕으로 <뉴욕 3부작>을 읽게 되었고 실은 약간 지쳤다. 초기작이긴 해도, 그리고 뉴욕을 가보지 못한 시기였으므로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언뜻 멈춘 적이 있었다. 바로 주인공 퀸이 빨간 공책을 사가지고 나오던 그 부분.  

 그는 어느 것을 고를지 정할 셈으로 공책더미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맨 밑에 있는 빨간 공책을 사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빨간 공책을 뽑아 내어 엄지로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빨간 공책이 왜 그렇게 마음을 끌었는지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공책은 가로 21, 세로 27센티미터쯤 되는 표준형 백 장짜리였다. 하지만 뭔가가 그에게 호소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의 어떤 유일무이한 운명이 그의 펜에서 나오는 말들을 잡아 두려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느낌이 너무 강해 당황해 하면서 퀸은 그 빨간 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금전등록기 쪽으로 걸어가 값을 치렀다.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中 

 나도 그런 노트가 있다. 그것도 다섯 권이나! 스프링이 달린 공책. 속지 위의 괘선이 마음에 든다면 더욱 좋다. 아주 좁은 칸으로 그어진 괘선 사이에 연필심을 붙이면 머리부터 가슴까지 엉망진창으로 뭉쳐 있던 실이 좁은 파이프 속을 지나가는 물길처럼 아주 빠르게 실타래를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그 속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다.

 아마도 다르겠지만 소설가 오어는 우연히 들어간 이상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파란공책을 사기에 이르고 그 공책에는 예언, 말하자면 신탁을 적어 넣게 된다. 마치 H. D. 쏘로우가 신이 나의 어깨를 들어 쓰게 한 것처럼 오어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기술하고 그걸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모든 작가들이 아마도 그런 신탁의 두려움이 자기 마음 속에 찰랑거리고 있음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으로 쓰여진 그대로 작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 아이를 가진 아버지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쓰지 않으며 결혼한 여자는 불륜에 대해 쓰지 않으며 젊은이는 유서같은 글을 쓰지 않으며 늙어서는 어린 소녀와의 격정을 쓰지 않는다. 다만 그러려고 할 것이다. 때로 그것이 신탁이었음을 아주 일을 그르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니까. 일단 씨앗조차 뿌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그리하여 아예 작가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 나도 그런 얘기를 써본 적이 있다.

 

……그의 시체 위에는 볼품없는 푸른 색 두꺼운 비닐이 덮여 있었다. 여름 휴가철의 막바지였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여전히 자기 부각에 온힘을 부어대고 있었고 그 아래,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은 하드 아이스크림이나 생수통 아가리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썬글라스와 모자, 구명조끼 같은, 여름 해변에서는 희소가치를 잃는 물건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가리고 그 존재의 개별성을 흐리게 하는 오후의 해변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검은 그 해변에서 독특했고 더불어 그 주검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의 웅성거림 역시 다른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보너스를 즐기러 온 휴양객들은 그의 주검 옆에 둘러서서 휴가 막판에 건진 이 횡재의 기쁨으로 가슴팍이 다 아팠다.
휴가 계획을 짜면서 들떴던 가슴이 무더운 여름 한 철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줄곧 눈과 코를 막아 가며 끔찍하게 더러운 이 휴양지에 대한 분노를 삭이려고 경주한 노력이 얼마였던가. 그래서였을까. 그들 주위에 한 개씩 두 개씩 늘어 가는 오물들은 오히려 그들의 아량처럼 보였다.
여기, 더럽기 짝이 없는 이 곳에 내가 있어 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 오물들은 또한 자신들을 해마다 배신해 왔던 여름 휴양지에 대한 최선의 보복이기도 했다. 개중에 어떤 사람이 그처럼, 그야말로 재수없게 자신의 육체를 하릴없이 해변에 오물로 헌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곧 돌아가 시작해야 할 일상을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휴가의 클라이막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해변에 누워 얼굴 위까지 푸른 비닐을 덮은 그도 그저 막연히 생각은 한 번쯤 해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주검을 둘러싸고 희미한 신음을 흘리고 또는 격렬한 입놀림으로 그의 죽음의 원인을 탐구했던 그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간 첫날을 어떤 식으로 시작하고 마감하는지.
새벽 전철에 시달리다 겨우 사무실에 도착하여 퉁퉁 부은 얼굴로 그의 주검이 함께 했던 그 휴가를 자기 생애 최고의 것이라 떠벌이고, 시체가 되어 떠내려 왔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조 하던 중에, 혹은 그가 아름다운 애인을 구출하려고 뛰어 들었다가 그만, 아니, 그것은 바로 복수였어,하는 식으로 왜곡되는 장면 장면을. 식당에서, 화장실에서, 도서실에서, 미장원에서, 해가 중천을 거쳐 건물들 뒤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 잠시도 다물어 있지 않을 그 수많은 입들. 그들의 얼굴에 지난 며칠 동안 해풍에 빼앗겼던 기름끼가 드디어 번지고 그 위에 하루의 피로도 덕지덕지 앉을 것이다. 그들의 옷 위로, 그들이 걷고 있는 보도 위로 떨어지는 밤.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의 웃음소리와 마누라의 두 다리, 그리고 혼곤함까지.
그는 상상해 보았을까?
그러나 어찌됐든 결국 그의 죽음이 그 누구에게인가 일생을 뒤바꿀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는 그도 우리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누운 그를 가운데 둔 사람들. 둘러선 그들 중에는 그의 퉁퉁 부은 얼굴에서 파헤쳐진 눈알을 떠올린 엄청난 상상력의 소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흙에서 썩어질 것. 노획의 행운을 잡은 물고기가 제 생명을 그 눈알로 하여금 윤기 있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은밀히 치를 떤 사람도 그들 중에는 있었으리라. 한동안 갈치 같은 생선은 입에 대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가슴 한 구석에 옹골지게 다지고 있을 비위 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한동안이 흐른 뒤 결국 허기라는 반찬 옆에 놓인 갈치구이에서 그의 파내어져 치밀한 소화를 거친 눈알을 더 이상 상기하지 않기로 다시금 옹골지게 다짐할 그 사람. 산다는 것을 때로는 무척 편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인 그 사람……

……놀랍게도 다만 한 사람, 그의 죽음으로 인생 행로가 그때까지와는 약간 다르게 방향을 튼 사람이 그 오후의 해변에 있었다.
그날 해변에서는 참가할 시인의 위촉 문제로 다른 해 같지 않게 한없이 지연됐던 여름 시인 학교가 뒤늦게 열리고 있었다. 마침 백일장이 진행 중에 있었고, 그 시간, 백일장에 참가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나긴 시상 탐색의 여독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 때 사람들 무리와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파도가 발 밑의 모래를 훑고 돌아가고 그 남은 거품이 폭폭 꺼져 가며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저만치 아이들은 제 몸뚱어리보다 큰 고무 튜브에 안겨 소리를 지르고, 수영에 자신이 있는지 저기까지,하고 외치며 바다 깊숙한 곳을 향해 떠나는 남자도 보였다.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앉아 있는 여자의 빈 원고지 위에도, 물을 튕기며 즐거운 아이들의 고함 소리에도, 해변을 떠나 저기로 가고 있는 남자의 내젓는 두 팔에도 죽음의 예감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여자가 안전한 해변의 경계를 알리는 흰 공을 거쳐 멀리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는 통통배로 시선을 옮기며 아주 상투적인 시상에 몸과 마음을 맡기려고 하고 있을 때 그 여자의 눈 앞에서, 그의, 생명이 떠나간 퉁퉁 불은 큰 손가락이 바닷물 위로 넘실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푸른 물, 다시 손가락, 규칙적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또.
멀리서도 그 여자는 다가오는 그것이 주검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온몸으로 그 여자는 죽음의 의미에 종종 깃드는 분노를 느꼈고, 얼마 되지도 않는 지방질을 감싼 피부 전체가 한꺼번에 터져 버리는 듯한 심한 아픔을 견뎌야 했다. 그 여자는 소리를 질렀고 곧 목이 아팠다. 그 여자가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도 죽을 때까지 약간의 불편도 없이 말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은 그야말로 그녀가 속한 인간의 생물학적 신비의 영역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말자, 우리.
햇볕에 그을려 눈의 흰자만 유독 청어등처럼 새파래 보이는 구명 대원들이 그의 주검을 들것에 실어가 버리고, 그의 주검과는 무관해진 휴양지의 웅성거림이 교미의 비유적 언어로 수치의 허물을 한 꺼풀 두 꺼풀 벗어 던지는 푸르스름한 저녁에, 해마다 한 번 있는 여름 시인 학교가 백일장의 당선작을 발표했다.
  
    오  늘

 

바다가 그를 죽였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로 꾹꾹 눌러서 그렇게 쓴 사람은 그 여자였다. 그것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당선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시를 보면서 항상 느껴 왔던 자신감도 그 날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물에 불은 시체의 손가락만이 들고 있던 흰 종이 위에 그려졌고 그것이 그런 글자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 여자가 그토록 담담했던 이유. 그 여자는 그 때, 이를테면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람도 파도도 없는 그 바다 위. 그 여자가 언제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 여자 자신도. 그 시체는 그 여자의 심장을 화석으로 만들었고 제대로 뛰지도 않는 심장을 그 여자는 그대로 부여 안고 있었다. 기실 시인이라는 이름은 그의 주검이 준 충격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당시 그 여자에게는 그 충격의 갈무리만도 역부족이었다.
어찌 됐건 그의 죽음은 그 여자를 말 그대로 시인이 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감탄했고, 그들 모두가 그 시체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가 재현해낸 것을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가 창출한 시적 상징인 것으로 인식했다. 그 여자는 해변의 저녁놀 속에서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당연한 것이라 인정한 시인이란 이름의 상품을 받았다.
그날, 여름 시인 학교가 형식적인 폐교식을 마치고 해변의 주점에서 밤늦도록 거나한 졸업 연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시인의 탄생. 속으로 그 여자는 부르짖었다. 위대한 시인의 탄생쯤에는 항상 붙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여자가 꿈 속에서조차 목말라 하던 시인이라는 이름을, 시인이라는 꿈같은 삶을 하필이면 다른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는 이 사실을 그 여자는 비극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다시는 바다를 찾지 않겠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있고서야 새로운 시인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우주적 섭리의 비정함이 가슴에 사무쳐 와서 특별히 그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과 책임감을 두 어깨에 짊어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작가의 처녀작은 분명 그 작가의 일생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작품의 내용과 유사한 종말을 맞이한다는, 신비성마저 띤 항간의 일설을 갑작스럽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비극은 문학으로 족해. 그 여자는 이제 그야말로 처녀작을 의식해야 하는 예술가인 것이다.
해변으로 내려올 때와는 아주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 여자는 여름 시인 학교가 대절한 관광 버스에 올라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운명 속에 든 무엇이었고,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시로 인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무래도 그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해변에 나타난 의문의 시체에 묻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도 한편에는 생겨났다.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의 처절한 주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 얘기라면 자리까지 옮기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 시가 순전히 그의 주검이 선물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결정한 채 축하 인사를 해 오는 사람들이 싫었고, 이번 당선작은 해변의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판정 기준이 왜곡된 상황에서 선정된 것이므로 그 여자를 공정한 당선자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수근거리는 의자 뒤쪽 한 무리의 사람들은 더욱 싫었다.
그 여자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검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해야 했을 때, 그 여자는 같이 시인 학교에 참가했던 시인 지망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오늘 이전의 일은 모두 잊어 버리도록 하자. 어찌됐건 나는 이제 시인이다. 모두 잊기로 하자. 그 손가락을 잊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쩌다 그 바다에서 떠오르게 되었는지, 왜 그가 거기서 그렇게 끄집어내져야 했는지, 아니 그가 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실제로 경험을 했으니 그의 생애를 소설로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훨씬 리얼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 여자는 소설가도 넘보고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그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마저 북을 치듯 가슴을 두드렸으므로 새 희망이 부풀어 올라 여자는 몸까지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더 나간다면 그 여자는 르뽀 작가까지 넘볼 것 같다. 하기야 오히려 그 쪽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 창작 과정에 깃들 그 많은 불안을 피하고 동시에 그 미래 또한 확고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재능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여자의 시가 어쩌면 그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투시일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편, 그 여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주하게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자기 몸에서 온기가 빠져 나가는 바람에 시인이 된 욕심 많은 그 여자를 평생토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주검은 그 여자와는 아주 다른 경로로 해서 살아 있던 그의 거처인 서울로 옮겨졌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로 꾹꾹 눌러서 그렇게 쓴 사람은 그 여자였다. 그것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당선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시를 보면서 항상 느껴 왔던 자신감도 그 날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물에 불은 시체의 손가락만이 들고 있던 흰 종이 위에 그려졌고 그것이 그런 글자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 여자가 그토록 담담했던 이유. 그 여자는 그 때, 이를테면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람도 파도도 없는 그 바다 위. 그 여자가 언제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 여자 자신도. 그 시체는 그 여자의 심장을 화석으로 만들었고 제대로 뛰지도 않는 심장을 그 여자는 그대로 부여 안고 있었다. 기실 시인이라는 이름은 그의 주검이 준 충격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당시 그 여자에게는 그 충격의 갈무리만도 역부족이었다.
어찌 됐건 그의 죽음은 그 여자를 말 그대로 시인이 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감탄했고, 그들 모두가 그 시체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가 재현해낸 것을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가 창출한 시적 상징인 것으로 인식했다. 그 여자는 해변의 저녁놀 속에서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당연한 것이라 인정한 시인이란 이름의 상품을 받았다.
그날, 여름 시인 학교가 형식적인 폐교식을 마치고 해변의 주점에서 밤늦도록 거나한 졸업 연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시인의 탄생. 속으로 그 여자는 부르짖었다. 위대한 시인의 탄생쯤에는 항상 붙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여자가 꿈 속에서조차 목말라 하던 시인이라는 이름을, 시인이라는 꿈같은 삶을 하필이면 다른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는 이 사실을 그 여자는 비극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다시는 바다를 찾지 않겠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있고서야 새로운 시인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우주적 섭리의 비정함이 가슴에 사무쳐 와서 특별히 그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과 책임감을 두 어깨에 짊어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작가의 처녀작은 분명 그 작가의 일생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작품의 내용과 유사한 종말을 맞이한다는, 신비성마저 띤 항간의 일설을 갑작스럽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비극은 문학으로 족해. 그 여자는 이제 그야말로 처녀작을 의식해야 하는 예술가인 것이다.
해변으로 내려올 때와는 아주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 여자는 여름 시인 학교가 대절한 관광 버스에 올라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운명 속에 든 무엇이었고,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시로 인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무래도 그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해변에 나타난 의문의 시체에 묻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도 한편에는 생겨났다.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의 처절한 주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 얘기라면 자리까지 옮기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 시가 순전히 그의 주검이 선물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결정한 채 축하 인사를 해 오는 사람들이 싫었고, 이번 당선작은 해변의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판정 기준이 왜곡된 상황에서 선정된 것이므로 그 여자를 공정한 당선자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수근거리는 의자 뒤쪽 한 무리의 사람들은 더욱 싫었다.
그 여자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검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해야 했을 때, 그 여자는 같이 시인 학교에 참가했던 시인 지망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오늘 이전의 일은 모두 잊어 버리도록 하자. 어찌됐건 나는 이제 시인이다. 모두 잊기로 하자. 그 손가락을 잊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쩌다 그 바다에서 떠오르게 되었는지, 왜 그가 거기서 그렇게 끄집어내져야 했는지, 아니 그가 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실제로 경험을 했으니 그의 생애를 소설로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훨씬 리얼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 여자는 소설가도 넘보고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그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마저 북을 치듯 가슴을 두드렸으므로 새 희망이 부풀어 올라 여자는 몸까지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더 나간다면 그 여자는 르뽀 작가까지 넘볼 것 같다. 하기야 오히려 그 쪽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 창작 과정에 깃들 그 많은 불안을 피하고 동시에 그 미래 또한 확고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재능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여자의 시가 어쩌면 그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투시일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편, 그 여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주하게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자기 몸에서 온기가 빠져 나가는 바람에 시인이 된 욕심 많은 그 여자를 평생토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주검은 그 여자와는 아주 다른 경로로 해서 살아 있던 그의 거처인 서울로 옮겨졌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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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황동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현대문학에서 <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가 나왔다. 선정위원은 김사인, 이남호, 이광호 제씨. 아직 겨우 16수 읽었다. 한 해를 이렇게 요약한다는 건 참 건방지지 않은가 싶기는 하지만 의외로 내 대신 살아준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어서 매번 고맙게 읽고 있는 시리즈다. 16 수 읽는 중에 남는 것,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고형렬, '고니의 발을 보다' 부분

 

이다. 오므리며 들어올린 발에 아무것도 없다니, 오므려도 움킨 것이 아니니.... 아마도 꽤 오래 생각하게 생겼다. 

또 하나,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개조개는 무지 크고, 대개는 어물전에서나 보고, 재수 없으면 지나가다 얘가 쏘아대는 물총을 한 방 얻어 맞는 수가 있고,  최소한 하나에 천원 이상하는 얘를 사다가는 거의 다지다시피하여 된장찌개, 혹은 미역국을 끓여 온식구 둘러앉아 짭짭 먹어치우는 것. 뭐 때로는 구이도 해먹지만. 그런데 그렇게만 보인 게 아니라, 살아있나 보려고 건드려보는 그 조개의 발足(어떤 어부는 혀舌라고도 하고)을 보고,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니, 그게 최초의 궁리, 가장 오래하는 궁리래네. 에이, 눈앞이 흐릿해진다. 가엾고 애틋하다, 그들의 맨발. 다, 속까지 다 보이는 빙어가 된 것같다.


작년 이맘 때, 문태준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었다. 젊은 시인. 그러나 속은 꽤 늙은 사람. 내어놓는 시마다 잔잔하게 마음을 술렁이게 해서 한번 읽고 넘어간 것이 없었다. 올해 가장 좋은 시에 가장 많이 추천되기도 했다, 저 '맨발'. 새 봄에 읽고 지금 다시 읽는 나 또한 참 좋다. 참 뭉툭한 바늘, 그러나 아주 긴 바늘에 푸욱 찔린 것같다. 바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 다 저리 맨발일 것을... 우리 생애, 모든 걸음이 다 그렇게 맨발인 것을.

밤마다 입을 다무는 집 안에 그 맨발 따숩게 지져주는 구들이 있기를

세상 모든 집이 다 그리 따스하기를

맨발 보듬는 살 보드랍기를.


여기까지가 20 수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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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 솔출판사 / 1992년 3월
평점 :
절판


92년에 출간된 책을 98년에 사서 건들 읽었다.

실은 장기와 관련된 책을 읽고 싶어서 책방을 뒤지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하면 '설국'의 감동을 입은 지 오래되고 뿐만 아니라,

그게 참 오래도 가는 것이어서 '명인'을 발견했을 때는 상당히 반가웠다.

그러나 이 책은 바둑관전기 쯤으로

바둑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그 속에서 재미를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소설을 읽듯이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나가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대개 좋은 소설가의 이러한 책들은 오히려 그의 소설보다 한번쯤 더 읽어야 한다.

그때에서야 속에 든 문장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인데,

물론 번역문장이라 그 좋고 나쁨을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는 것쯤은 이미 나도 알고 있지만,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독특하고 그 전개의 방향이 예외없이 신선한 것은

오히려 번역된 이국의 글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으므로

다시 읽고 있는 '명인'도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재미난 책이 될 것 같다.

바둑을 모르니 뒤에 첨부된 기보를 읽을 수 없고

하여, 손에 땀을 쥐었다는 신경림씨의 말씀도 저 하늘의 태양일 뿐.

그러나 지금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날씨 이야기만도 읽기에는 즐겁다.

 

현재로서는 어쩌지 못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생각을 했다.

저물어 가는 한 시대의 뒷모습이 여지없이 아련하게, 애틋하게 그려진다.

하여, '명인'의 뒤는 '사양'이로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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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의 등단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은 것이 전부인데 그걸로 전부인 이유는 그를 읽기가 그다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오래되서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데 다만 그 작품, 리얼리티보다는 독자의 플렉시빌리티에 전적으로 기대는 당시의 소설적 경향의 서장 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다른 일반 독자들은 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일까. 그때 서양그림 속의 마라로 시작되는 소설을 읽으며 이 소재나 감각은 바로 하루키로구나, 했던 기억이 조금 난다. 그래, 그랬지, 그때. 그러나 그의 대중적 인기도를 생각하면 읽어 볼까 하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음을 고백한다. 김영하는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 를 읽으며 가족에 대한 환상을 생각하긴 했는데. 이런 가족도 물론 있겠지, 했는데. 어째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어쨌거나 야심있고 성실하고 믿음직한 오빠는 가족의 근간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읽으며 오히려 나는 그런 오빠가 없는 가족 생각이 더 나서 슬펐다. 더구나 그런 오빠들에게 기대어야 하는 이 가부장적 남성사회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설이니까. 더구나 유약한 남자, 글쟁이가 생각한 이야기니까 뭐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지, 했다. 이런 류의 현실은 소설 속보다 훨씬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서러운 법이다.

말미에 수록된 소설들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들어 있다. 그 설명을 읽으며 작가가 한 얘기가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글쎄, 나는 잘쓴 소설이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이 소설집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막연히 낚싯대를 걸어놓고 물리기를 기다렸다는 소설집. 그래서였을까? 뚜렷하게 환기되는 형상이나 분위기나 낱말이나 인물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한 개의 부각된 사건이 있으나 왜 이런 것들을 눙치고 숨기는 버릇이 들고 만 것인지 우리 현대단편의 모호함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 명확하지 않은 단편이야말로 신춘문예의 악폐. 뭐 그리 심오하다고 자꾸 바닥에 침몰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목은 이상하게도 일본 소설 <아버지가 사라졌다>를 연상시켜서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그만한 신실하고 조밀한 묘사를 보는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소설을 쓴 그 노역에는 별 세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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