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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전선 1
후지카와 카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1. 고2 시절이라는 것-달팽이 예비군

와카모리 아사코는 고2. 학기 초에 그만 짝사랑에 돌입,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중인 여학생. 대상은 순진 무구한 미소의 소유자, 학교 육상부의 사쿠라. 운동장에서 연습 중인 사쿠라를 바라보는 일이 아사코의 하교길 즐거움이다. 그러던 중 마치 허물인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 위를 기어 가는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 달팽이는 학교의 꽃인 카지와라 아츠시였다. 그는 과스트레스 상태가 되면 달팽이로 변신하는 이른바 멀티 인간. 사쿠라와 같은 육상부원으로 성적 우수, 스포츠 만능인 아츠시에게 단 하나의 핸디캡이 있다면 바로 연체동물로 변신하는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아사코는 달팽이 헬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람에 아츠시의 단짝 친구인 사쿠라와도 친구가 되지만 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아츠시와 너무나 둔감한 사쿠라 사이에 끼이게 됐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사쿠라에게 가는 과정에 아츠시라는 섬세하고 민감하고 생각도 많고 게다가 아사코를 그지없이 좋아하는 달팽이가 곁에서 꼼지락거리게 되었다는 것. 그들의 섬세한 고교생활이 담담하게, 그러나 쉽게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게 그려지는데.

첫사랑이 있는 시절이라고 해야 되나, 저도 모르게 '내가 왜 이래~~~!' 하게 되는 그 시절을? 그 시절이, 어디에도 속한다 단정지을 수 없는, 일본과 우리 나라의 특수한 상황, 고2 시절이 이 만화 안에서 달팽이 예비군으로 구현된다. 특별히 동감하는 바는 그 시절의 미묘함인데. 프레쉬맨으로서의 흥분도 가라앉고 그러나 아직은 수험생의 마음가짐만은 아니어도 되는,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되는 시절. 갑자기 커버리는 시절이자, 절대고독이라는 생경한 인간의 영역에 발목을 잡히게 되는 순간이 있는 시절. 그래서 그 시절만큼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때도 없는 고2. 사실은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그 여름에 자기 앞날을 결정짓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봤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각별한 애정이 부어지는지도. 그리고 달팽이가 되어 버리는 아츠시가 그 시절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살아가고 있는 소년으로 보이는지도.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 보면.....
과연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던가? 사랑에 빠졌었나? 아니면 어떤 결단을 내리기라도 했던가? 과연 나는 좌충우돌했던가?

<회상모드 on ――――――――――――!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그 길과 그 옛 궁궐의 정원과 조용한 평일의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선 찻집과 커다란 돌로 지어진 화랑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보다 이십 년 정도 젊은 채다. 열 여덟 살인 주인공들처럼 기억 속 그 때의 나도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왜 그 길을 걷고 있었을까.  

지금도 내 기억 속의 그 길은 가을 속으로 뻗어 있다. 노란 은행잎과 말라서 주글주글하고 어떤 것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그 길 위를 바람을 타고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삿길 같지 않은 넓은 보도는 다른 한편의 기억으로는 항상 깨끗하고 밝은 회색빛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택한 길이 항상 가을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회색빛 길은 자꾸 가을 속으로만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언제 주로 그 길을 찾아갔을까.  

학교가 일과를 마쳐야 교문이 열렸다. 그것은 언제나 까맣거나 아주 짙은 흑록색이었다. 그 교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길게 구부러지는 내리막길을 백여 미터 걷다 보면 왼쪽으로 84라는 번호를 전후좌우에 찍은 시내버스의 회차 지점이 보였다. 당시의 내가 절대 탈 일이 없었던 84번 버스. 대개는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보였지만 어쩌다 가끔, 곧 길을 떠나려는 버스가 그 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띌 때가 있었다. 나는 내 발이 그 쪽으로 방향을 트는 힘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무엇’에나 홀린 듯 돌연히, 마치 습관처럼 당연하면서도 예사롭게 나는 줄 선 사람들을 가리고 선 그 버스를 향해 뛰어가서 사람들의 행렬 끝에 섰다가 그들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한강을 건너 버스가 용산을 지난다.

집과는 반대 방향. 그 때 서울에서 이십 년째 살고 있던 나의 부모는 일 년에 딱 한 번, 그 길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기억은 흑백사진 한 장 속에 정확한 형태로 남아 있다. 어린 날의 어린이날. 그 사진 속의 나는 풍선을 들고 창경원 넓은 뜰에 서있다. 이 만화를 읽고 있는 지금으로 따진다면 삼십 년 전의 일이다. 풍선은 하얗게 내 머리의 오른쪽 허공에 박혀 있다. 고궁의 전문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모두 마치 무대화장을 한 사람들처럼 이목구비가 정교하다. 그 안에서 우리가 웃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사실은 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때라면 분명 집 안에 웃음이 있었는데,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간 위에서 우리 가족을 떠올릴 때면 그 웃음이 기억 나질 않는다. 왜일까?

내가 열 여덟의 나이에 혼자서 평일 오후의 고궁을 찾았던, 막 떠나려고 하는 버스를 보면 꼭 타고 같이 길을 떠났던 그 이유와 같은 것일까?

옛 왕들의 놀이터 겸 산책로였다는 화강암으로 만든 길이 둘러싸고 있는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물풀과 수련 잎,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하는 박물관.. 그것들을 바라보며 열 여덟 살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의 초록색으로 위장한 조악한 시멘트 벤치에 앉아 수백 년을 자라온 나무들과 모서리가 관록으로 으깨진 석탑을 바라보며 내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다. 그 때의 내게는 ‘어디’로부터 혹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도, 강박감도, 위기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불완전한 형상으로, 분위기나 느낌으로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 아직까지도 고유의 의미를 부여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다.

내가, 버스를 타고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가, 커다란 박물관에 들어가 두어 개씩의 전시실을 학자처럼 유심히 관람하고 있다.
내가, 경회루 호숫가에 이젤을 세우고 묽은 수채물감을 찍어 바르는 화가의 굵은 붓끝을 바라보며 멈춰서 있다.
내가, 밝은 햇살과 떨어진 나뭇잎들을 잠깐 휘젓다 사라지는 바람이 있을 뿐인 황량한 고궁의 넓은 정원에 서있다.
내가, 고궁의 여기저기에서 걸어 나온 몇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폐궁 시간임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궁 문을 나서고 있다.
내가, 아직도 햇살이 눈부신 고궁의 문을 올려다 보고 서있다.
내가,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려고 세종로 큰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검은 감색 교복을 입고 칠 킬로그램 정도의 책가방을 들고 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경인국도 그 넓은 도로를 횡단해 흰 연탄재가 넘치는 쓰레기통들이 집 앞 대문 마다 마다에 놓인 동네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부근의 다른 주택들보다는 그래도 페인트의 유광이 조금은 더 남아있는 짙은 초록색 대문 앞에 서있다.

내가 어딘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타는 버스는 나를 경복궁 앞에 내려 주었다. 서울 외곽에는 호젓하게 혼자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부랑배들을 두려워 했다. 학교에서조차 사색이나 고뇌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단선적이고 즉흥적이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 오솔길에서 만날지도 모를 부랑배들은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외곽의 오솔길이 아닌 도시 한가운데의, 은밀하게 조종되고 감시되는 조용한 고궁을 선택한 것이다. 그 곳에는 새와 나무와 호수, 수초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주시할 시간도 뜻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러했음을 안다. 나는 그 방임의 절제된 뜰이 좋았다. 방임의 절제된 뜰. 여기, 조용히, 한가하게, 내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무도 오지 않는,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내 집같은.

――――――――――――― 회상모드 off>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에. 그 고궁에 있던 내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와서 어떤 무늬로 자리하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을 거슬러 고궁을 혼자 찾아간 것이 달팽이 예비군의 또 다른 양상은 아니었을까? '그 때'란 그저 내게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자기만의 양상에 대한 해석이 한 줌이라도 있다면 확실히 그 사람은 혼자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자기만의 양상 속을 헤매어 본 사람이라면 혼자임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것. 그 시기가 바로 열 여덟 살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 시절은 인생에 있어서의 아주 중요한 전기이자 황홀한 여백인 것이다.

그 시기를 생각하게 하는, 지금도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극복했었는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달팽이 전선>은 또 하나의 세상을 펼쳐 보인다. 마치 추억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는 듯이.  

2. 사람 마음의 결을 느끼는 재미

그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츠시는 아사코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만 아사코는 친구인 사쿠라만을 좋아한다. 전형적인 삼각 관계. 단정지어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그 관계의 전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겨움이 깃들 틈새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그려지길래?

감정의 파고를 간단히 누를 수 있는 아사코와는 달리, 감정의 파고 자체를 쉬이 느끼지 않는 사쿠라와는 달리, 아츠시는 그 감정의 파고라는 것에 따라 몸이 변해버릴 정도다. 이 아이의 마음 속은 안도와 불안 속에서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데. 그 파고의 촉매자이자 그 파고의 종결자인 아사코가 여전히 자신이 곁에 있어 줄 것임을 선언해도 아츠시는 혼자서 불안하다. 그는 가끔, 앞날이 몹시 불안한 연체동물인 것이다. 그 반면 아사코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 후미가 있고 사랑하는 사쿠라가 있고 같이 있어줘야 할 아츠시가 있으며 의지할 수 있는 키이치라는 아빠같은 사촌 오빠가 있다. 묻고 대답하고 실천해 가면서 아사코의 나날은 지나간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걱정이 많고, 아츠시가 달팽이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는 포용력의 소유자, 아사코와 같이 있을 때 아츠시는 편안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아사코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현재 아사코는 아츠시가 아닌 사쿠라를 좋아하고 있다. 아츠시에게 아사코는 가 닿을 수 없는 cozy nest인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한 곳에서 만나지게 될까? ^^;;

<달팽이 전선>의 매력은 사쿠라만 바라보는 아사코에게 아츠시가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아사코가 사쿠라에게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둘 다 잃고 싶지 않지만 그 속에서 결국 갈피를 잡아야 하는 사쿠라의 몇 안 되는 해프닝들을 처리하는 작가의 각고에서 발견된다. 삼각관계라는 전형적 재료의 식상함에 낚일 만큼의 여유가 없어진다. 대사나 독백 하나 하나가 깊은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들다. 그것은 그만큼의 각고가 숨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진전되는 단계마다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컷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드러난 마음의 결을 음미하게 한다.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 마음의 결을 아주 세세하게 건져 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글들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의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니게 된다. 이런!

출판만화가 아니라면 드러내기 아려운 효과가 완벽하게 드러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한껏 멈춰 서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동여매 주는 문자의 위력이 있는 것이 바로 출판만화 아닌가? 나는 그래서 에니매이션보다 출판만화를 선호한다. ^^ 출판 만화에선 사람 마음의 결이 정말 천진난만하게 드러난다. 결코 넘치지 않는 문자의 매력. 과장되고 왜곡된 만화적 표정 속에서 삶의 포커스를, 그림 속 표정이 감춘 것을 읽어 주는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그 삶의 리얼리티를, 설명이나 비유없이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야기의 끝점에까지 나름의 진화를 해가는 것이다. 그 진폭의 놀라움이라니.. 가끔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하는... 그것이 풍부한 <달팽이 전선>이라 평가한다면 좀 과도할까? 그림체의 엉성함을 가리는 그 고운 결을 느끼는 데엔 <달팽이 전선>에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즐기는 데에 <너버스 비너스>가 더불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덤!

 

느린 달팽이의 사랑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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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 1
카미오 요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1. 독립된 사건의 연타적 스토리  

일단, <꽃보다 남자>는 절대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진행될 내용에 대해서, 어찌 될까, 앞으로는 이렇게 풀어나갈 테지, 이러이러해진다면 정말 용서 안할 거야, 요코! 등등, 아무리 상상하고 점을 쳐도 소용없어요. 참으로 간단하게 허를 치고 들어오는 요코 카미오거든요.

궁금증을 늘여서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 만화의 장점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개개 사건들의 무관함. 그렇다고 이게 시츄에이션 드라마도 아닙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별스런 여운이 없다는 점이 큰 단점이라고 할까요?

<꽃보다 남자>는 아주 간단하고 빠르게 사건을 처리해내는 만큼, 더구나 비상식적인 캐릭터들의 행동이 워낙 황당해서,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앞쪽을 뒤져 봐야 할 필요를 느낄 틈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건 역시도 황당한 변수에 의한 속전속결이지요. 물론 이건 순정만화에 길들여져 온 사람들에게 한해서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여간 말도 안되는 일의 연타적 발발이므로 독자는 그저 열심히 페이지를 넘기기만 하면 되는 편한 만화라는 뜻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독자의 호흡을 주도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걸 짜증내면 읽을 수 없는 만화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재밌게 팍팍 넘어가는 만화는 사실상 정말 드물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도적으로 읽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상당히 꼬인 시각으로 평가를 내릴 만한, 불행히도 어쩌면 읽다가 그냥 내던져 버릴 수도 있는 만화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요. 그런 고로 만화를 무슨 문화읽기 텍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즉 그저 가리지 않고 만화를 즐기는 사람에게라면 영락없는 오랏줄이 될 것입니다. 잠시간, 그러니까 <꽃보다 남자>를 읽을 동안 만이라면 온전한 그의 포로가 되어 보는 것도 인생의 잠깐 정도를 상당히 재밌게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 분명합니다.

2.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냉정함

작가는 자기 캐릭터에 대해 자칭, 상당히 냉담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꽃보다 남자>의 개그가 살아나는지도 모르죠. 순정만화에 있어 남자 주인공은 대개 검은 색깔 긴 직모를 휘날리는 꽃미남, 게다가 성질은 더럽고 엄청난 이른바 후까시맨이거든요. 그들은 대개 속이 깊고 말이 없으며, 결국 정의나 의리 또는 순정으로 똘똘 뭉쳐 있어요.

그러나 <꽃보다 남자>의 남자주인공은 다릅니다. 주인공 츠카사 도묘지는 아버지 덕에 돈만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절대 용서가 안되는 이상하게 소라처럼 꼬인 곱슬머리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기분나쁜 소리에는 바로 주먹이 나가는, 뱀같은 눈을 가진, 비겁한 짓을 해도 전혀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단어 선택 하나 제대로 못하는 무식한 주인공이지요. 문제는 순정만화 독자에게라면 정말 익숙한 남자주인공 스타일의 인물이 <꽃보다 남자> 안에 따로 있다는 것인데요. 당근, 여자주인공인 츠쿠시는 초반부에 이 인물, 즉 루이에게 완전히 압도 당해 있습니다. 그래서 <꽃보다 남자>의 전반부를 읽고 있다 보면, '에이 뻔한 스토리구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내던지면 안되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반전이 돌발적으로 나타나 요절복통으로 몰고 가기 시작하거든요. 진짜 남자주인공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게 개차반이나 다름없는 츠카사지요. 설마, 얘가 주인공? 루이가 아니라? 순정만화 팬들이 이 <꽃보다 남자>를기를 쓰고 읽는 이유가 여기서 시작됐다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닐 거라 생각해요. 뭔가 좀 다른 겁니다, 다른 만화하고는.

주인공에 대한 대접도 안한 채 작가는 처음 츠카사에게 부여한 성격을 그대로 밀고 나가고 그에 끌려가는독자는 점점 더 황당해지기만 하는 이 웃긴 얘기에 점점 몰두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급기야는 '츠카사 만세!' 가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  21권 끝에서의 츠카사는 얼마나 불쌍한지 말이죠, 그런 제멋대로인 애와 더불어 내상을 입을 정도가 된다니까요, 하하. ^///^

아마도 독자들이 주인공 츠카사를 좋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란, 자기가 부여한 성격에 대한 작가의 고집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보다 남자>는 '전복되는 주인공의 전형성'으로 성공한 만화라고 할 수 있지요.

작가의 냉정함은 스토리의 전개부분에서도 찾아집니다. 순정만화에 있어 강한 남자 주인공에게 끌리는 여자 주인공에게는 일종의 계기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남자에게서 자기가 보호해 줘야 할 구석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남자에게 알고 보니 눈물이 솟아날 만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고 여주인공만은 그걸 눈치채야 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의미는 어떤 이유에서건 현재 그가 무척 외롭다거나, 그가 가엾기 짝이 없는 성장과정을 겪었다거나, 그에게 불행한 출생의 비밀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역사를 가진 남자주인공이 완벽하게 기대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여주인공은 자기한테 밖에는 구원받지 못하는 남자를 당연히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대개의 공식이라구요. 그러나  <꽃보다 남자>는 그 공식을 비껴나갑니다. 연민에의 호소를 거부한다고 할까요?

엘리베이터에 갖힌 채 감기열에 엎어져 버린 츠카사를 어쩔 수 없이 간호하던 츠쿠시는 츠카사가 부모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그 넓은 저택에서 혼자...(나같은 애한테야 부러운 이야기지만....)
(이 애 성격이 비뚤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럼 쓸쓸하겠다.
쓰, 쓸쓸? 닭살 돋는 소리 하지 말아. 오늘은 미안해. 이 빚은 갚을게.

                                                                       <꽃보다 남자> 제4권 中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츠카사. 이렇게 4권에서 이미 츠카사는 츠쿠시의 연민을 거부해 버립니다. 츠쿠시는 츠카사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연민에서 시작되면 안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꽃보다 남자>를 계속 읽게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연민도 아니라면 어떻게 츠카사가 츠쿠시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뭔가 또 다른 계기가 있을 거란 말이지....궁금하게 만들죠. 뒤로 가면서도 역시 그 목표(연민으로 시작되는 사랑이면 안된다)는 변하지 않습니다. 츠쿠시가 츠카사에게 호감을 가질 만하면 츠카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번에 츠쿠시의 호감을 날려 버리는 부분들이 눈에 띠게 많아져서 작가의 의도가 빤히 보일 정도거든요. 처음부터 20권까지 츠카사의 성격은 여전히 폭력적, 적대적 안하무인인데 그래도 츠쿠시에게 뭔가 일어나긴 해야 하지 않을까, 관심은 이어지지요.

이 만화가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서 나옵니다. 남자 주인공의 가슴저린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면 직방일 것을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서로의 성격과 환경을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긴 길을 선택해 버린 것이니까요.

후반부에 들어 츠카사와 비슷한 새로운 경쟁자 아몬(쿄나가)의 등장은 이러한 전복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작가의 재정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녀석은 츠카사와 성격이나 외모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용서가 안되는 소라머리가 아닌 착 가라앉은 검은 직모, 게다가 성장과정이 상당히 불행했고 현재도 그리 쉽게 살고 있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여전히 주인공 츠카사는 그보다 잘나 보이질 않고, 츠쿠시는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하긴 츠쿠시가 호감을 가지지 않는 남자들이란 없는 거나 한 가지지만. 그러나 츠카사가 주인공일 것은 이미 자명한 것이잖아요. ^^  걱정할 것 까지야 없지요. 어쨌거나 순정만화는 <꽃보다 남자>에 와서 남자 주인공의 전형성으로부터 탈출할 것으로 보입니다. 외모와 성격, 겨우 두 가지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감히 전형적 캐릭터에 대한 모반이라 불릴 만하다는 말입니다.

3. 신데렐라 컴플렉스 벗어나기

한번 여자주인공도 살펴 볼까요? 여주인공 츠쿠시는 얼마나 남다를 것인가 말이죠. 혹시 이쁘고 천사같을까? 당연히 그건 츠카사에게만일 뿐입니다. 얼굴도 못생겼고, 엄청나게 가난하며, 뼈속까지 속물인 비굴한 부모의 딸이며,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며, 더구나 쭉쭉빵빵은 절대 아니지요. 그저 그녀는 불굴의 잡초입니다. 어때요? 신데렐라가 벌써 두둥!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신데렐라는 왕자 츠카사를 정말싫어합니다. 부자라도 소용없어요. 자기는 걸어다니는 브렌드라며 으시대는 츠카사에게 나는 길표다, 당당하게 소리치는 츠쿠시. 츠카사와 불의의 키스를 하고는 입술이 썩을까봐 걱정인 여주인공입니다. 초반부를 읽는 독자들처럼, 츠쿠시에게 츠카사는 정말 밥맛없는 애일 뿐입니다.

대표적인 신데렐라만화답게 츠쿠시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 1, 2, 3...으로 치면 되는 거지요. 츠카사의 난관을 설정하기 위한, 그의 사랑을 상당히 심각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적 인물들일 뿐이니까요. 츠쿠시가 그들의 애정을 거부하는 데서 그걸 눈치채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전권에 걸쳐 등장하는 츠쿠시 주변의 남자들은 츠쿠시를 여간해서 눈여겨 보지를 않아요. 가난하고 둔한 애 정도로, 루이에게조차 애인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츠쿠시는 다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츠카사에게만 여신이에요. 츠쿠시 옆을 지나가는 남자만 있어도 츠카사는 불타오릅니다. 아마도, 츠카사가 좋아하는 누나 츠바사의 성격을 닮은 츠쿠시라는 것만이, 츠쿠시를 좋아하는 츠카사의 마음을 설명할 수 있겠지요. 뭐 사랑에 이유가 있냐고 물었을 때 바로 이거라고 대답할 말이 있다는 게 더 웃긴 일인지도. ^^;;;

작가는 순정만화를 보는 독자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한 듯합니다. 독자의 양면성을 파악했달까요?남자의 끈질긴, 변함없는, 영원한, 목숨을 거는 사랑을 보고자 하는 독자. 다른 사람한테는 성질이 더러워도 주인공 여자한테만은 꿀처럼 달고 부드러운 그 남자주인공을 보며 침을 흘리고, 평범극치인 여주인공이 그 변치 않을 사랑 속에서 해피해지기를 바라는 독자. 게다가 알고 보니 남자는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라구요. 덕분에 평범하거나 비천한 여주인공은 고속도수직상승을 합니다. 혹자는 그런 웃긴 스토리를 좋아라 하는 독자의 심리를 대리만족이라고 하던데 말이죠. 그러나 사실은, 그러면서도 독자는 또한 그 구조가 깨지는 걸 즐길 준비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왕자만 있냐, 실제로는 꽃미남은 눈씻고 찾아 봐도 없다, 어떻게 다 이 여자만 좋아하냐,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냐, 멍청한!

독자의 기대와 평가는 이율배반적입니다. 기대는 언제나 이상이라는 언덕에 기대고, 평가는 언제나 현실이라는 언덕에 기대기 마련이지요. <꽃보다 남자>를 보면서 다음 편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기대 때문일 것이고 보면서도 쯧쯧 혀를 차는 것이야 물론 현실에 기댄 평가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이 평가가 깨지는 걸보는 것이야말로 한 단계 더 나아간 즐기기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꽃미남도 아니고, 여주인공이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초지일관 유아독존인 츠카사는 그래서 돌연변이처럼 보입니다. 꽃미남이야말로 순정만화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목적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꽃보다 남자>는 그걸 파괴했다고 봐야겠어요. 인물의 생김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더러운 성격 그대로도 좋아하는 방법이란 게 있는 것으로 <꽃보다 남자>는 지금도 얘기를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아아, 그렇다고 여기서 츠쿠시가 신데렐라의 틀에서 뛰쳐나와 노라가 됐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겠지요? ^^;

도저히 신데렐라는 안될 것 같은 츠쿠시는 앞으로 츠카사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엮어지겠지, 이 사람아, 그런 걸 묻다니..--+)

츠카사와 결별하게 된 츠쿠시는 츠카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자신과 직면하게 됩니다. 미운 정이랄까? 그러나 결별은 기정사실. 다행히도 츠카사는 여전히 밀어부치기로 돌진하고 츠쿠시도 이제는 제 마음에 정직해지는 걸로 승부수를 두게 됩니다. 겨우겨우, 노라끼가 덧입혀진 신데렐라가 탄생하게 되는 것인가요? 25권에 이르러 이제는, 츠쿠시의 마음이 장애물이었던 부분을 뛰어넘어 츠카사와 츠쿠시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장애물이 앞에 버티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요. 남자 주인공이야 어떻게 생겨 먹었든, 여자주인공이 노라가 되든 신데렐라가 되든,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이를 엮어주는 묘약인 것입니다. 츠쿠시가 츠카사를 좋아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말이죠. 이렇게 다시금 만화 속 신화는 이어진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걸 그저 만화 속의 신화다, 라고만 할 수 있나요?

4. 개그컷의 강타

<꽃보다 남자>에 꽃미남이 없는 건 작가의 의식탓이라기 보다는 인물을 예쁘게 그리지 못하는 작가의 그림솜씨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뒤로 가도 도무지 이뻐지질 않아요. 대개 그렇게 긴 연재기간을 가지면 그림이 점점 멋있어지고 주인공 얼굴도 틀이 잡혀서 굉장히 이뻐지는데요. <꽃보다 남자>는 여전히 수준이하라구요. 그런데 말이죠, 그 그림솜씨는 개그컷에서 정말 빛납니다. 가난하고 힘만 센 못난이 여주인공의 모습에다 츠카사의 장난아니게 우스운 표정들, 게다가 개그 삼총사 가즈야, 아사이, 후반부 들어 망가진 루이를 보는 것은 충분히 이 만화의 가치를 알 게 되는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재미는 여느 순정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요. 같은 개그라도 귀염성이라곤 전혀 없는 개그컷이라면 단연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이 <꽃보다 남자>인 것입니다.

그를 즐기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아주 조그맣게 그려진 부분을 놓치지 말 것. 그 안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5. 21권 이후의 전개에 관한 몇 가지 웃기는 상상과 그 궤멸

21권 마지막에는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있는 츠카사가 있습니다. 연민의 극치!

츠쿠시는 츠카사에게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고 뒤돌아 떠나 버렸고 그날 하루 츠쿠시와 함께 한 시간들로 너무나 행복했던 츠카사는 실연의 나락으로 한순간에 추락해 버립니다. 불쌍한 츠카사. ㅠ_ㅠ

21권을 읽고난 직후에 그 뒤를 잇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만큼 그 뒤가 궁금했어요. 어떤 방법으로 츠쿠시를 츠카사 곁으로 불러오느냐? 이건 완전히 끝장인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제 딴에는 작가 입장이되서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이거죠.

    -변수1 -아직 등장하지 않은 츠카사의 아빠-인생에 중요한 것은 분명 있다.
               사랑이나 우정같은...   돈이 아니라....
    -변수2 -츠카사의 난폭한 성격-시끄러워. 다 죽여 버릴 거야.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변수3 -츠쿠시의 그악한 가난-츠쿠시가 팔려가요..띠리릭 띠리릭.. 도와줘, 츠카사.
    -변수4 -으레 일어나는 주인공 신상의 사고-어서 와줘, 츠쿠시!!!! 츠카사가, 츠카사가....
    -변수5 -작가의 나태-<초원의 빛> 식의 세월이 흐른 뒤... 오랜만이야, 츠카사..

그러나 제 상상은 간단히 궤멸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팅이에서 갑자기 TV광으로 변한 루이가 TV를 통해 츠쿠시를 찾아내고 츠쿠시는 다시 동경, 츠카사의 시야 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게다가 이 막판에 아주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이변을! 정말내 머리로는 생각해낼 수 없었던 변수. 그것도 츠카사와 똑같이 생긴 인물. 헉!

사실 장편의 마지막 해결단계에서는 절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서는 안됩니다. 그 시도는 작품의 전체 구조를 망가뜨리는 자충수가 백이면 백이지요. 그래도 이렇게 재밌는데 그 등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 인물은 그 무게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무언가가 있긴 합니다. 츠카사의 결심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결국 문제는 츠쿠시의 결심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인물이니까요. 츠쿠시도 뭔가 해야 하긴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젠 마음을 결정해야 하는 츠쿠시를 뒤에서 밀고 돌진형 터프가이 츠카사를 앞에서 도발시키는 이 새로운 아몬이라는 인물을 통해 츠쿠시라는 신데렐라는 탄생될것 같아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라. 컥. 바로 이런 식의 진행이 요코 카미오의 황당함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호홋.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28권에 진입해 있는 지금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른 <꽃보다 남자>. 작가와도 출판사와도 아무 상관없는 제가 다 걱정스러울 정도.=.=

6. <꽃보다 남자>가 역시 환타지인 이유

세상엔 없을 것이 분명한 츠카사, 세상엔 없는 틴 오브 프랑스- 일본의 유학생 도도 시즈카, 세상없어도 최고의 가치는 돈이라 믿는 변함없는 비굴 캐릭터-츠쿠시의 부모와 아케마하라의 사람들을 보면 역시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만화라는 상식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게다가 어찌 그렇게 일은 그때그때 원하는 방향(츠카사와 츠쿠시 묶기)으로 잘도 풀리고야 마는지. 새로 내린 눈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 가는 것처럼 츠카사와 츠쿠시는 한 점을 향하고 있으니, 이럴 수가 있나, 말도 안돼! 란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긴장하며 읽어서는 안될 만화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꽃보다 남자>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따지면 안되는 환타지를 앞에 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여간 25권에 들어와 난데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가가 드디어 옛날 일을 들춰내 버렸다는 것. 비행장의 소음 때문에 츠카사의 데이트 신청을 알아 듣지 못했던 츠쿠시가 그 소리를 제대로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어요. 소음같은 물리적 장애로 인해 듣지 못한 소리는 심리적 거부로 인해 듣지 못한 소리하곤 달라서 재현이 거의 불가능한 법인데. 게다가 이런 전개는 앞에서는 정말 꿈도 못꿨던 것이란 말이지요. 츠쿠시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제 가슴 속의 소리도 듣지 않았었다구요.

이야기가 끝으로 가기 위해서인지 회상모드가 많아지는것이 눈에 띕니다. 9년만의 결말이라. 후훗. (<꽃보다 남자>는 9년 전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소녀만화 잡지 마가레트에 연재되고 있는 중이래요. 고로 독자는 나이를 먹었지만 이 아이들은 여전히 18세들이지요. 만화 속 인물은 지금 25세 독자에게나 15세 독자에게나, 미안하지만 35세 독자에게도 아직 똑같은 나이로 존재하네요. 세월이란 게 먹히질 않아요, 만화 속이란. 쩝)

츠카사가 사랑의 좌절로 인해 음침해져서 개그가 섞일 틈이 없어진 지루한 요즈음, 그간 요코 카미오다움이었던 '황당한 전개'가 무척 기다려집니다. 홉.

만약, 심심하시다면, 아직 안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꽃보다 남자>로 그 지리함을 잠깐 잊어 보세요. 아마도 무척 편안하게, 단순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시간이 지나간 것을 느끼실 겁니다. 후후.

A/S : 이젠(30권 이후)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습니다. 별의 갯수는 점점 줄어들고. 얼마나 황당하게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인지, 자기 장점을 알고서 그러는 건지,  요코상이 완전히 간 듯합니다. 확실히 황당한 사람, 요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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