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1 - 애장판
히로유키 니시모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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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부터 날라리는 아닌 미츠하시 다카시와 이토 신지.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샌님같던 머리를, 하나는 금발로 또 하나는 삐죽머리로 바꾸고는 '오늘부터 우리는 날라리!!'가 됩니다. 그들은 사립난파고교의 같은 반으로 같은 날 전학을 와서 같은 시간에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게 되지요.

너무 티나는 그들의 머리. 결국 학교 깡패들의 눈에 확 띄게 되고 그들의 싸움은 시작됩니다.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든 이겨내는 미츠하시. 의리 빼면 시체인 삐죽머리 이토. 절대 불량아는 아닌 미츠하시와 이토는 어찌어찌해서 난파고교의 투톱이 되고 연이어 밀려드는 타학교의 도전자들을 어이없이 패주하게 만들지요.

비록 제가 어찌어찌해서..라는 말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이 둘의 싸움이란 게 보통 우스운 게 아닙니다. 소프트한 학원경파물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만화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는 그야말로 개그만화입니다. 이 개그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버전업을 시키도록 하고 여기서는 일단 여러분이 입맛만 다시게 하려고 합니다. 꼭 읽어봐야 하는 만화니까요. ^ㅠ^

사실 어찌하여 애들이 이렇게 싸움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싸우면서 자라야만 하는지 백프로 이해는 못했지마는, 누구 말마따나 읽으면서 천백프로로 재밌었던 건 사실입니다.그런 재미를 지금까지 잊지 않을 수 있게 한 것은 물론 여기에도 짜르르 전류를 통하게 한 명장면들이 있어서겠지요?

길고 긴 이 이야기(전 38권)를 어떻게 써볼까 고민하다가 한번도 풀어나가 본 적 없는 명장면 명대사 형식으로 한번 얘기해 볼까나 하는 생각으로 명장면을 떠올리려고 머리 속 만화 장면들을 어렵게 어렵게 헤집어 보니..떠오르는 건 이 장면이 맨 먼저였습니다. 덕분에 다시금 부르르... ^^

사가라의 함정에 다소곳이(?) 찾아들어가 형편없이 당한 미츠하시가 자기 손거죽을 벋겨내 겨우 수갑에서 빠져나와 인질이 되어 묶여있는 리코를 감쌉니다. 그러곤 말하지요.

    …한심…해서…. 이 내가…. 이정도…로….
    이제…. 조금…만… 올 거야….

사가라는 비아냥댑니다. 지금 미츠하시가 기다리는 건 바로 이토. 그러나 이토는 사가라의 차에 치여 정신이 나간 상태라는 걸 사가라는 알고 있었거든요. 사가라는 미츠하시와 이토를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깡패지만 그들과 자신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거든요. 미츠하시에게 이토가 없다면 어떻게 되나 보고 싶었던 사가라는 이토가 현재 미츠하시를 도우러 올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고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창고 바깥에서는 사가라의 차에 치여 팔이 부러진 채(구두 한 짝도 날아가 버리고...) 이토가 미츠하시에게 가려고 합니다. 교코는 말릴 수 밖에요. 이토는 교코에게 말합니다.

    지금 나를 구하려 오지 않는다는 건…
    나를… 기다리는 거야.
    여기서 안가는 놈은, 이토가… 아니야.

비틀비틀 헉헉 이토는 미츠하시가 사가라에게 당하고 있는 창고로 갑니다. 같이 가겠다고 가다가 같이 당한 나카노는 그 때 길 옆 수풀 속을 뒹굴고 있었지요.

    헉헉 제길!
    미친 놈. 다짜고짜 차로 밀어 버려?
    제길!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

풀이라도 잡고 기어올라 가려다 뒤로 나동그라지는 나카노.

    으윽. 뭘 하는 거야, 내가…. 꼴같잖게….  그 놈들은…? 그러고 얼마나 지난 거지?
    딱히 친구도 아니면서. 그래. 먼저 병원에 갔을지도 몰라….
    흔한 일이니까.

벌렁 누워 버렸지만 다시 일어나 기어오릅니다. 왜냐구요?

    그럴 놈들이 아니야.

여서요.

사가라를 눕힌 이토와 미츠하시 그리고 리코는 창고를 나옵니다.
그 모습을 나카노는 봤지요.

    !!
    훗…. 얼굴은 가관이지만 해치웠나?
    후후후…. 왜 웃는 거야, 내가…. 왜 나는…. 이런…
    그때… 교토에서… 적이었는데. 그 자식, 동정을….
    그래, 후후후. 네가 꼴사납게 당할 때 구해 줄 테다. 그래.

    응? 뭘하는 거야, 너희들?

이런 이런 금방 쓰러질 듯한 미츠하시와 이토가 나카노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야-. 음침보이. 와카노-. 어딨어, 임마.

그걸 보고있던 나카노, 속으로

    바보야, 내버려 둬! 네 얼굴 좀 봐라, 얼른 가!

리코도, 나카노는 먼저 갔을지도 모르니 어서 가자고 하지만 미츠하시와 이토는 여전히 나카노를 찾습니다.

    그 녀석은, 그럴 놈이 아니야. 나카노-. 죽었냐-?

여기라고 손을 들면서 나카노, 또 속으로 중얼거립니다.(역시 음침보이)

    사실은…. 너희들과…, 놀아보고 싶었어.

바로 38권, 아쉽기 그지없는, 그러나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끝권에 나오는 그 장면입니다. 니시모리 히로유키가 그리는 날라리들의 세계에 있는 것, 그리고 실제 날라리들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글자로 된 메시지가 아닌 정황의 감동으로 한꺼번에 밀물처럼 닥치는 장면. 사가라나 사토시도 나카노처럼 그들과 놀아보고 싶었을지도.... 이마이나 다니가와가 그들 주위에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지도...;; --a  바뜨, ^^

뭐하려고 그리도 쌈박질인지, 왜 이렇게 싸우는 것만 나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인 수많은 만화들.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되지 하다가도, 절대 뭔가 배우려고 하면 안된다 하다가도 이렇게 뭔가 배운 것같은 느낌을 주는 만화들! 우리 <니나 잘해!>의 끝도 이러하기를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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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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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대 경제학부 교수, 유택.

도로는 우측통행, 횡단보도 이외의 곳에서는 절대 건너지 않는다. 싸고 맛있는 '삼치'를 위해서라면 생선가게 무대포 아줌마의 야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자유경제법칙에 충실한 학자의 밝고 명랑한 기록이다. <속지 中>

유택은 재미있는 노교수입니다. 평생 오후 9시 취침을 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가 말하고 실천하는 정도(正道)에 그 누구도 반론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게다가 이 교수만큼 객관적인 눈으로 자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인물이란 사실 이 세상에는 없을 듯합니다. 그만큼 그의 판단과 평가는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구요. 결국 이 얘기 속의 누구나 유택교수를 좋아하고 또 존경하며 의지합니다. 작가가 강변해서 그러냐구요? 아닙니다. 그건 강요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수긍되는 것입니다. 꾸덕. (--)(__)(--)

작가는 왜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제 생각엔 '스승 없는 시대의 반증'이 그 컨셉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 말하고 유택교수를 떠올리면 그 말이 무색해지니까요. 하지만 실제 인물이 아니니 그냥 내쳐 버릴까요? 그러나 스승이 언제나 실제인물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허구적 인물도 현실과의 접점이 있게 마련이지요. 제 어릴 적 스승은 사실 '니나'였어요.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와 <덕성의 모험> 속 주인공 말이지요.^^;; 지금이요? 아무래도 허구 속 인물인 데다 일본인이기까지 한 이 유택교수를 스승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중이랍니다. ^^

비단 그의 생활만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노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습니다. 그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지요. 그것을 제대로 그려낸 작가의 실력도 빵빵한 것이구요. 사실 늙은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그려진 만화는 드뭅니다. 아무래도 簡略畵인데다 펜화이기 때문일 테지요.(그 면에서 요즘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배가본드>가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좀 다릅니다. 노인의 궁금함과 감탄, 안심, 기대, 만족 등을 표현함에 있어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그런 표정을 잡아내는 작가가 존경스럽기까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15권입니다. 게다가 엄청 심각한 주제를...--; 그러나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 부분이었습니다.

-전.. 그 곳에서.... 몽골인이 될 겁니다.
- ....야베 군
-전 꼭 증명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문화(Culture)는 농경(Cultivate)을 모계로 하고, 문명(Civillization)은 도시(Civy)를 모계로 해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근대'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습니다. 농경과도 도시와도 무관한 '유목'이라는 태고로부터의 생활 형태는 현실에 대해 안티테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체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싶습니다.
-음 그렇군. 하지만 태고로부터 농경민족이었던 일본인인 자네가 유목 생활을 할 수 있겠나?
-어떠한 생활 양식=하드도 결국 움직이게 하는 소프트는 인간입니다. 전 반드시 해낼 겁니다.

----몽골----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거지?
구름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가보는 수 밖에 없다. 뛰어 넘어도 뛰어 넘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음에 등을 떠밀리 듯이 인간을 고양하는 이러한 대초원에 과연 우리 고도경제사회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

-오오, 게일(유목민의 집. 조립식이라 이동에 적합하다.))이 많이 있군.
-들렀다 가요! 교수님.
-그랬다간 너무 후한 대접 때문에 배가 불러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거야.
-믿을 수가 없군. 우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하지만 이 곳에선 당연한 일이에요. 어떤 게일에 들어가도 반드시 후한 대접을 해주고, 원한다면 기분 좋게 재워 주기도 하죠. 그런 호의를 사양하는 건 오히려 실례예요.
-그러지 말고 책에서 읽은 지식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것은 민족성에서 유래하는 친절한 마음에서인가?
-아니요.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예요. 계절마다 목초를 찾아서.... 잃어버린 말과 양을 찾아서.... 유목이란 이동의 반복이거든요. 이동 중 침식은 도중에 만나는 게일 사람에게 신세지는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설령 생판 모르는 남일지라도. 하지만 몇백 년씩이나 반복되어온 일이기 때문에 당연시되고 있어요. 몽골이라는 제한된 지역과 생활형태에 있어서는 고도로 합리화된 경제체제라 할 수 있죠. 교수님 식으로 말하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동시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일본말이 떠오르는군. 내가 지금 호란과 이렇게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내일 헤어지고 말면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 만남이라는 건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다고 할 수 있지.
-푸하. 의외로 감상적이시군요, 교수님. 메일, 휴대폰, 비행기.... 인간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들은 유목민이에요. 바람처럼 어디로든 멀리 떠나 버리는.... 그들에겐 전화도 없어요. 아깐 웃었지만 이곳 몽골에서는 지금도 일기일회가 살아 있어요.
-호란. 그들이 바람을 따라갔다면 우리도 같이 바람을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거야.

                                                                                       15권 중

멀고도 독특한 세상(몽골)에서 사랑하는 거기 여인과 살고자 하는 일본 청년 야베의 이상을 보면 그저 감상적인 얘기다 치부하고도 싶지만 유목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와는 단절됐던 생활 형태에 대한 유전자의 향수(?)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키토 시베리안. 좀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반도에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유목민의 후예니까요. 또한 지금의 우리는 해결을 기다리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도의 경제사회를 살고 있으니 유택교수의 말처럼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무시하고 굳이 이 쳅터를 인용한 것은 다름 아닌 '사이버' 세상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웹이라는 대지 위에 드디어 생활자들이 생겨나고 서핑이라는 여행을 통해 그들의 게일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데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만나는 게일마다 너무나 친절하고 배불리 먹여 주고 또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자면, 비록 실제 몽골을 겪어 보지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유목생활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일기일회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친절이라는 덕목 또한 웹이라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합리적인 생활형태임을 그 곳 생활자들이 이미 경험으로 증명해 놓았으니 말입니다. 유택교수가 찾고자 했던 것. 우리 고도경제사회에 대한 해답. 그것으로서 부상하고 있는 사이버세상의 경제. 그 미래를 현재의 몽골에 비교하는 몰역사적 기대보다는 유목에 대한 좀더 발전적인 기대가 생겨납니다. 유목생활이라는 하드로 소프트인 우리 인간은 과연 옮겨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요즘엔 모두 on이 아닌 off를 알짜배기라 하는데, IT보다는 굴뚝이라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그 시작이 언제나 미미했음을, 미심쩍었음을, 엄청나게 불안정했음을 기억합니다. 잊지 않고 유심히 주목해야 할, 그 틀을 익혀 두어야만 할, 욕심대로라면 발 한짝 담궈 놓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세상이 사이버 세상일 듯합니다.

오호호~

만화를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공부하려고 만화를 집어 드는 경우도 없을 뿐더러 공부하라고 만화를 그려 내는 작가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끔 이렇듯 비범한 만화가로부터, 열정을 가진 만화편집자로부터 본의 아니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만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만화 역사가 긴 일본이 가진 소프트라고도 할 수 있지요. 우리 만화가에도 이런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리라 기대합니다.

일본 만화층의 두터움을 드러내 주는 <천재 유교수의 생활>. 시츄에이션 드라마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그만큼 많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고, 놀랍게도 개개가 허접한 것이라곤 없다는 것이 그 탁월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츄에이션 또는 옴니버스 스타일의 만화를 꼽으라면, <호텔 아프리카>, <닥터 스크루>, <마스터 키튼>, <못 말리는 간호사>, <아름다운 시절>, <갤러리 페이크> 등이 있지요. 이 모두가 <천재 유교수의 생활>과 같은 감동을 줄 것임을 약속합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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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 Masca 1
김영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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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사렐라는 반쪽만 마스카족인 마법사. 후에 대마법사가 되는데..

스카족이란 이마에 에벤이라는 물방울같이 생긴 표식을 가지고 태어난 예언자 그룹으로 시빌라라는 땅의 기득권층입니다. (MASCA는 이태리어로 마법사라네요.) 그녀는 대마법사가 된 후에 아주 오래 전, 자기가 19세 때의 얘기를 풀어놓는데요, 그 얘기가 바로 <마스카-헤셰드의 대마법사 이야기>입니다.

아사렐라는 아주 귀여운 아가씨입니다. 초보마법사라서 아주 하찮은 마법 밖에는 쓸 줄 모르지만 그녀를 기르고 가르친 스승인 매력적인 619세의 마법사 엘리후의 총애를 받고 있어요. 사람들의 실종 사건으로 분분한 어느날, 아사렐라는 사람들의 실종원인이라는 마왕을 찾아가게 되는데요, 웬일로 스승인 엘리후가 그 앞을 막아 섭니다. 그래도 당돌하고 고집세고 순진한 아사렐라는 스승의 말을 거스르고 자기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라는 마왕과의 만남을 실행하게 되지요. 사실, 마왕은 아기였던 아사렐라를 만난 적이 있고 그때 보호자였던 엘리후에게서 그녀의 심장을 예약해 둔 일이 있었거든요. 약 20년 전, 초자연의 악의없는 재해로 그들의 땅 시빌라가 황폐해지자 그걸 보다 못한 마법사 엘리후는 마왕을 찾아가게 됐지요. 마왕은 재해를 수습해 주는 대가로 엘리후에게 아기 아사렐라의 심장을 요구했고, 엘리후는 그걸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일은 그들의 운명을 증명하려고, 그 때의 아기인 줄 모르는 마왕의 시선이 아사렐라에게 향해 버리게 되고 말이지요. 결국 마법사 엘리후와 불사의 마왕 카이넨은 아사렐라를 사이에 두고 천지차인 서로의 마법을 겨룰 수 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아사렐라의 선택에 달려 있으므로 그 둘의 마법력 차이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 당연지사. 더구나 뜯겨져 나온 살아 있는 심장이나 찢겨지고 부서지는 육체 따위는 이미 문제라는 위치에 서질 못합니다. 부서지는 육신은 금방 다시 제 모양을 찾아 싱싱하게 살아나는 희한하고 부러운 세상이 바로 <마스카>의 세상이니까요. 엽기만발인 이 시대가 내놓은 순정환타지라서일 수도 있겠지요.  

흔한 삼각관계지만 마법사에, 1만 5000살 가량의 불사체인 마왕에다, 이천년마력에다, 망자의 사냥꾼이라는 저승의 벨리알까지 등장하는 마스카라는 공간에는 사랑이라는 감정 말고도 삶과 죽음의 성찰이 곁들여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만화 <마스카>의 매력입니다. 게다가 그냥 쉽게 쉽게, 진부한 삼각관계 속의 좌충우돌로만 가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여서 흥미를 더하지요. 얘기를 풀어 나가는 방법도 말이죠, 나중에 전개될 사건의 의미를 간단한 회고 형태로 미리 풀어놓고 시작하므로 독자를 거기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자아냅니다. 자칭 신인만화가치고는 상당히 그럴 듯한 연출이 아닐 수 없어요.

게다가 그림은 꽃미남, 냉미남 천지! 마왕 카이넨은 조연에, 악역에, 느끼남인데도 불구하고 순정만화잡지 윙크사상 역대 3위 안에 꼽히는 인기절정 캐릭터라네요.^^ 하여간 요즘 나오는 순정만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림체라는 것도 분명히 진화한다,라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하기야 사람은 결국 배우면서 살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배운 걸 응용하고 그러면서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만화 <마스카>를 보면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不死의 몸'이라는 겁니다. 불사체인 마왕족, 벨리알들은 무엇으로 불사의 생을 살아가는가. 더불어 목숨을 건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그들의 인생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물음들입니다. 이건 작중인물의 하나인 여자 벨리알, 하닷사의 질문이기도 하지요.

확실히 우리 족속에는 뭔가 결여된 것이 있는 모양이야.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불사체들이 목숨을 건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면 우린... 무엇으로 이 영원의 생을 살아야 하지?

뭐, 꼭 목숨을 걸 것이 있어야 사는 거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없는 삶이 권태롭다는 건 대개가 인정한 사실. 카이넨이 권태와 싸우다 발견한 재미가 다름 아닌 당돌하고 순진한 아사렐라였던 거에 주목한다면 하닷사의 질문에 이의를 달 필요까진 없다는 생각입니다.

마스카를 읽다 보면 시몬느 드 보봐르의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죽음과 싸우는 개인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지요. 하나는 죽지 않았으면, 영원히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여자, 하나는 영원한 불사의 몸으로 죽을 수 있기만을 소망하는 남자.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희미하지만 보봐르는 분명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아, 어폐가 있네요. '사람은 죽어야 한다'라니 말이나 됩니까? 보봐르가 그랬다고 사람이 모두 죽는 게 아닌데...^///^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살자'라는 주장이었다고 할까요? 불사의 몸으로 사는 남자(이름이 펠릭스...였던 거 같네요...;;;)의 절규가 <마스카>를 읽으며 되살아 나는 걸 보면 인간의 일회적 삶에 대해 저도 철저히 수긍했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르트르의 저작을 동시에 읽었으니 그 결과는 둘 간의 강력한 화학작용의 결실이었던 게지요. 어쨌든 본 얘기로 돌아가서, 유한한 인간 아사렐라의 질문은 저도 모르게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하나의 선택을 한 그 순간이 지나면 한 번쯤은 뒤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한 선택은 옳았는가. 만약 다른 길을 택했다면 지금 나는...달라졌을까....

하여간 <마스카> 안에서 묻고 있는 불사의 몸에 관한 사색들이 어떤 대답으로 그 결실을 맺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불사의 마왕 카이넨은 아사렐라에게 닥치는 많은 시련들 속에서 아사렐라가 온전히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데요, 그의 연적 엘리후라면 목숨을 건 사랑이란 걸 보여 줄 수 있지만 이 카이넨이란 마왕은 그럴 수가 없거든요. 불사의 몸이니 목숨이란 게 여느 목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야기가 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금방 회복될 카이넨의 상처를 보고 같이 아파하는 아사렐라가 신기할 지경이에요. 그런 마왕이 어떻게 아사렐라같은 유한한 생명을 사랑할 것인지 궁금하군요. 어쩌면 작가는, 카이넨이라는 존재, '수 천 년 동안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그 심장에 아랑곳없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에게만은 약한 사람...'은 그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연민으로 인해, 그것의 변형인 것도 같은 사랑으로 인해 산화할 수 있다고 주장할까요? 벨리알도 결국 태어난 생명이니 언젠가는 거둬질 건데 그 계기가...바로 뭐?!, 이렇게...말이지요. 훗. 저야말로 폭주족...--;;;

다행히 작가는 10권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듯하네요. 그래요, 삼각관계라는 설정으로 길게 끌어 가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결과는 3류를 면치 못하지요. <마스카>는 그리 되기엔 아까운 작품입니다. 작가의 건투를 빌어요...

하나 더!

도대체 작가는 왜 엘리후가 주인공이라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엘리후의 비중이 카이넨에게 밀리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을 텐데요. 그래서 더더욱 결말이 기다려지는 건지도... 후후.  둘이서 맞장을 뜰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는 건가? 과연 엘리후가 내밀 카드는 무엇일까요... 기른 정이라면.. 드라마틱하지 않다구요, 그건! 그러나 어쩌면 마력이 아닌 인간의 자의지로 저승이라는 망자의 계를 벗어난 아사렐라의 힘에서 그 끝의 기미를 우리는 이미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흠...


 

덤!!!


영원히 살면서 천사로 순수하게 산다는건 참 멋진 일이야.

하지만 가끔 싫증을 느끼지...

영원한 시간속을 떠다니느니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부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 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지금...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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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무브 1
후카미 준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오카노 카츠라. 인기있는 남자 키자키에 반했지만 결국 짝사랑.
못생긴 채 실연당한 그대로 움츠러든 주인공은 히지리교 난간에 소원을 빌게 됩니다. 여고생들이 얘기하는 속에서 요즘엔 그 다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낭설을 들었던 것이죠. 카츠라는 다리 난간에 푹 기댄 채 멋진 여자가 되게 해주세요,하고 빕니다. 키자키가 내게로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되게도 아닌, 멋진 여자가 되게...라는 소원을.

결국 카츠라는 소망을 이루어 주는 무브라는 조그맣고 동그란, 그러나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천사 비스름한 것과 조우하게 됩니다. 하필 그런 소망이라서 무브도 상당히 난처하게 된 셈. 결국 무브와 함께 멋진 여자의 조건을 하나하나 얻어가는 긴 여행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과연 어떤 여자가 멋진 여잘까. 각 장의 맨 앞에는 아주 예쁜 성장을 한 얼굴없는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그녀들이 멋진 여자라는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작가의 캐리커처는 완전 남자아이. 그 모습과 관련된 선입관만으로 보자면, 쭉쭉빵빵이라든가 고급 브랜드를 걸쳐 만들어지는 겉모습만으로는 멋진 여자가 될 수 없다..가 정답일 듯싶습니다.

아직 완결은 아니나, 벌써 12권.

카츠라는 자기 사랑 대신 여러사람을 사랑에 골인하게 하는 위업을 이룩하는데요. 놀라운 것은 남자 하나가 등장할 때마다 하나같이 카츠라의 사랑은 혹시 이 남자? 하는 의혹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그건 당근 아닙니다. 조급한 순정매니아의 단순한 도식 따라가기가 실패한 것이죠, 뭐.

하나하나의 사랑을 엮어 주게 될 때마다 카츠라는 자신감과 더불어 타인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소망과 용기와 고독을 끌어안게 됩니다. 일종의 제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그건 단순한 개인의 방어기제로써만이 아닌 타인과 화합되고 조화되는, 포월..이랄까. 그저 초월이 아닌.. 그런 것이죠. 저러다 세상 전체에 퍼지는 고마운 공기가 되지나 않을까 좀 겁이 나는. 후후

결코 미남미녀로는 안보이는, 나카소네 스타일의 넙적한 인물들만 나오는 이 만화의 흡인력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의 그 조급한 단정에서 오는 의혹도 그렇지만 제가 주목했던 건 사람들의 마음, 즉 속을 점령한 어떤 것들입니다. 외로워 우는 외톨이, 기다리는 마음, 무서움, 게다가 소망 등등.

소망과 용기는 외로움이라든가 무서움을 감싸안아 그것들이 점령한 채로 사악해진 사람들을 이전의 형태로 돌려놓게 됩니다. 과연 이전의 형태란 게 있기나 한 건지, 한 사람에게 외로움이나 무서움, 기다림 같은 걸 빼버리면 순수하고 착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건지, 순수한 인간이란 뭔지 상당히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고 말더군요. 어찌 보면 너무나 상식적이고 그래서 간단한 풀어가기일 수도 있겠구요. 물론 한 사람이 어떤 한 가지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전인으로서의 자기를 폐기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정직하고 용기있는 소망인이 그 집착이라는 매듭을 풀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은 그 어떤 걸 집착이라 불러도 상관없겠군요. 사실 사람이 어떤 것에 집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이론들은 많잖아요. 집착은 그 강도에 따라 분명히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점이 되긴 하지만 그 어떤 인간에게도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고 때론 삶의 힘이 되어 주는 것이 그것이기도 한데. 아아, 헷갈리는군요. 한 개인의 집착이 자신의 일상생활과 나아가 타인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되면 치료가 필요한 장애행동이 되는 것. 이 정의를 성실히 되뇌이긴 하지만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만 아니면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무브가 달라붙은 카츠라같은 사람이 내 인생을 간섭하고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정도로 정리를 해야겠군요.

과연 소망과 용기로 무장한 정직한 사랑의 메신저, 카츠라 앞을 기다리는 멋진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됐다는, 누구나 외롭고 상처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서 실연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카츠라. 측은지심인가?  남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모성의 세계에 그 멋진 여자는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걸까요? 웨딩피치..인가? 차라리 절대적인 사랑의 포로가 낫지,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낫지, 남들도 그러니까 안심하는 정도..로는 끝이 상당히 불안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군요. 보이쉬한 이 작가의 결론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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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수 없는 이유 1
모치즈키 카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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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후세아 카나코와 아키바 에이지의 이야기.

카나코는 웃지 않아요. 왜냐면 에이지가,
‘웃으면 가뜩이나 호박인 너의 얼굴이 더 찌그러져서 추해질 뿐’이라고 대놓고 말했거든요.
남에게 피해주는 걸 싫어하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픈 카나코는 에이지가 전학을 가버렸는데도 웃을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카나코는 그야말로 자해적 상상가였으니까요. 자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 같아 불안한, 참으로 안된 아이 카나콥니다. 

결국 음침해진 카나코의 학교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하지요. 그래도 다시 에이지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저 그 아팠던 기억을 가슴 깊숙히 묻어두고 그야말로 새출발(?)이란 걸 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에이지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저 컴플렉스로 남게 만들 수도 있었던 그‘웃지 못함’은 결국 극복의 대상이 되고야 마는군요. 그만 그것이 이야기 전개의 열쇠가 되어 버렸다는 얘깁죠.

그 원인제공자는 카나코를 이전으로 되돌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카나코에 대한 급우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애쓰기도 하구요. 여기까지를 보면 당근, 에이지와 카나코는 이미 맺어질(^^) 운명이었다 싶군요. (뭐, 호박이란 소리, 한 사람에게만 듣습니까? 워낙 많이 들은 사람은 오히려 저런 카나코가 미워 보일 수도 있겠어요. 그리 심한 소리도 아니구만, 그걸 갖고 몰... 쯧, 하면서 말이죠.)

사실 에이지가 그런 심한 말을 한 이유란 게 카나코가 자기 앞에서만 웃게 하려고 한 말이었으니까요. 그걸 그리 심각하게 듣고는 웃지 못하게 된 카나코의 화살표도 에이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고는 지금 말해야 옳은지 뭐, 자신은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전개는 상당히 꼬입니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대부분 꼬이고 오해하고 그야말로 지네들끼리 박터지는 게 상례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요, 이 귀여운 아이들의 속내는 그저 그렇게 치부해 버리고 키득거리기엔 아까운빛나는 구석이 있지 뭡니까? 아아, 그들의 속내가 아니라 그걸 파고 들어가는 작가의 노력이 빛난다고나 할까요? 오물조물..한 맛이 있어요.

다가 귀엽고 안스런 조연 레이코의 마음 속은 정말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작가가 그러네요, 이 레이코가 3권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으다으...)

저들의 이마에 찰싹 달라붙는 머리들은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 형태입니다만, 기억은 나지 않구요. 다만 천하에 악동 에이지의 이미지는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딱붙은 머리카락이 전에 없이 심술궂어 보였달까요?

아아, 그러고 보니 정작 쓰고 싶었던 걸 안쓰고 여기까지 왔네요. 후후.
사람이란 말이죠, 확실히 서로 좀 오래 부대껴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감정이란 게 늘 유동적이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감정의 밑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은 미움이나 혐오가 아닌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이런 만화를 보면서 자주 든다니까요. 항상 좋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

뭐 바깥으로부터 오는 자극이야 우리가 선택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되도록이면 좋은 쪽으로, 되도록이면 감탄 쪽으로 마음의 키를 다잡는 게 훨씬 속이 편해지는 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알고 보면 불쌍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냐는 말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소리일지도 모르겠구요. 나쁜 느낌이 드는 것을 일부러 좋게 보려고 애쓰는 짓까지야 좀 바보스러우니 그만두구요, 때로는 악담 속에 관심이나 애정이 꼭꼭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얘깁니다요..실은 좋아할 준비를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고 있으니 말이죠.다만 아무도, 며느리도 그걸 모르는 지금이지만 말입니다.

에이지처럼 다시 돌아와 회수하려는 노력을 안할 수도 있지만 혹시 카나코처럼 꼭꼭 숨어 다니는 바람에 그 기회를 안 주고는 좋은 세월 다 보내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고, 더구나 같이 맞대서 퍼부어주고 속이 후련했대도 천하의 원수는 외나무 다리서 만나 결국 같이 물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고 그러고, 결국 같은 놈이 되어서는 악담공화국의 흉악한 국민이 되는 수도 있으니..., 후후, 이전이야 어떻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속마음을 숨기지 맙시다, 그려.. 대체로 사랑이 미움보다는 후유증이 삭막하지 않으니..

그딴 소리는 사랑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몰라서라구요? (어쩌다 딴지 걱정을 하게 됐을까..흠..) 얻기 어려워서... 지키기 어려워서... 무언가 자꾸 끼어들어서... 괴로운 거지, 내 하는 사랑이야 그리 괴로운 것만도 아니잖습니까? 내 바깥으로 열린 채널이 가장 호의적일 그때란 말이죠..혼자 사랑에 빠져서야 그만한 괴로움이 없지만, 흐음.. 아마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람일 거다 싶기도 하군요..아픈 만큼 큰다는 말도 생각 나구요.. 흐흐~

하여간 어릴 때부터 사랑하며 클 수 있다는 건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나코와 에이지에게도 어릴 적 티격태격하던 장면이 있군요.
어릴 적 기억이 있는 사랑이 웬지 제게 이뻐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어릴 적 친구들과 사랑에 빠질 만큼 10대를 알차게 보내지 못했던 과거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여기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내 나라라고
굳게굳게 믿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다정한 언니, 오빠, 누나와 형이 있고, 들어가 편안한 자신의 방이 애들에게 있다면,
자꾸 이사 다니지 말고 오래오래 한 동네서 살아야겠습니다..^^

기다리던 사랑이 바로 옆에 있었음을 애들만은 깨달을 수 있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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