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 현지 특파원이 울며 기록한 2011년 3월 11일 이후
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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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후쿠시마 사태'가 지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아직도 상황은 진행 중이고,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지진과 해일로 한 달 뒤 사망자는 1만4천 명을 넘었고, 행방불명자도 1만2천 명에 달했다. 이재민 11만 명은 피폭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들 중 200여 명은 목숨을 잃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임을 알면서도 왜 그들은 원전을 고집했을까. 원전 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과연 일본의 원전사고로부터 무엇을 내다봐야 할까. 이 세 가지 궁금증이 지난 1년 동안 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그 궁금증을 없애줬다.

정남구의 <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과 쓰루미 슌스케 외 여럿이서 쓴 <사상으로서의 3·11>. 앞의 책은 <한겨레신문> 특파원인 정남구 기자의 후쿠시마 사태에 관한 일련의 취재기록이라면, 뒤의 책은 그 사태를 두고 일본 내 사상가, 평론가, 활동가 등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데 엮은 것이다.

"실제 3·11 대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지진에 의한 건물 붕괴가 아니라, 대부분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다. 2011년 3월 12일 아침 <요미우리신문>은 11일 오후 11시 경찰청 집계를 인용해 사망자가 110명, 행방불명자가 350명이라고 보도했다. 2011년 3월 12일 석간에서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해 12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이는 실제 피해보다 엄청나게 적게 집계된 것이었다."(<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31쪽 중)

이는 지진 피해보다 쓰나미 피해의 심각성을 알린 정남구의 취재기록이다. 진도 6강 이상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를 도입한 건축물이 많아 지진에 의한 붕괴 피해는 적었지만,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쳤던 까닭에 피해가 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원전 폭발사고에 있었다. 그때 1호기와 3호기와 2호기에서 연일 폭발 사고가 일어났는데, 더 큰 문제는 사용후 핵연료에 있었다고 한다.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헬기로 바닷물까지 투입했는데, 결국은 하이퍼소방대의 진압으로 제자리에 서게 됐다고 한다. 헌데 그곳에서 새 나오는 방사성 물질은 30km내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냈고, 그로부터 2011년 4월 25일까지 45명이 원전사고로 죽었다. 원전난민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과연 '원전지진 재앙'을 예측하지 못하고서 그런 화를 당한 걸까. 아니다. 이시바시 가쓰히코 고베대학 도시안전연구센터 교수는 1997년 10월과 1999년 8월 27일에도 원전지진재앙이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걸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노우라 고지 도호쿠대학원 교수는 <일본삼대실록>에 나오는 869년 7월 9일에 일어난 '조간(貞觀) 지진'을 연구한 결과, 800년에서 1100년에 그와 비슷한 지진이 한 차례 더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한다.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약탈이 시작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원자력발전을 고집했던 걸까. 사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원자폭탄과 8월 9일 나가사키에 터트린 플루토늄 핵폭탄으로 인해, 일본은 그 전부터 추진해온 핵무기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고 한다.

문제는 1954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그 여론 몰이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코자 했던<요미우리>의 사주인 쇼리키가 했다고 한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은 어떻게 피폭국가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을까. 전후 성립된 냉전 체제에서 소련과 핵 경쟁에 나선 미국은 일본에 원자력을 추진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정치인- 행정관료 - 산업계 - 매스컴 - 학계로 짜여진 '원자력 마피아'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을 사회에 유포시켰고, 그때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자가 당시 <요미우리>의 사장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다."(<사상으로서의 3·11> 27쪽 중)

3·11 원전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사상으로서의 3·11>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한다.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자'고 말이다. 하나의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그 조화가 무너지고, 점차 약탈과 전쟁과 테러로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해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원전 가동은 중단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원전이 '제어된' 원폭이라는 점에서 원전과 원폭이 구별된다고들 하지만 수사에 불과한 말이다. 원폭이 다른 고전적인 대량살상무기와 다른 점은 폭발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잠재적 에너지는 티끌만큼도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폭이 폭발하면 가공할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리 처참하다고 해도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폭 투하로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이 마주하는 것은 종지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휴지부이며, 그것은 언제까지고 미해결로 남겨지는 과잉된 문제의 지속이다."(<사상으로서의 3·11> 250쪽 중)

 

2024년까지 원전 13기 추가 증설... 문제 있다

후쿠시마로부터 약 1240km에 떨어져 있는 우리는 무얼 내다봐야 할까. 현재 우리나라는 21기의 원전이 돌아가고 있고, 원전 개수는 일본의 절반 수준이지만 국토면적의 원자력 발전 용량은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2024년까지 원전 13기를 추가로 증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60%까지 끌어 올리고, 2020년까지 6조 원을 원전에 쏟아 부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안전지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도 후쿠시마처럼 언제라도 시한폭탄이 터질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지진 때문은 아닐지라도 군사적 대치 상황이 그걸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도 지난 5년 동안 아홉 차례나 사고가 난 '고리원전'을 통해서도 떠오르는 게 있다. 누적된 피로가 쌓이면 어느 한 순간 그게 폭발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문제는 또 있다. 핵 폐기장 건설이 바로 그것. 그곳은 대부분 안전한 곳보다 정치적 반대가 적은 곳에 들어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명이 30년에 불과한 원전을 해체하려면 1기당 1조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어간다. 그것들이 누락되거나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가 가장 값싼 에너지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시한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는 원전가동도 점차 다른 에너지로 준비하고 중단시켜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이 곧 우리의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는 길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3·11 사태 이후 우리가 1년 동안 논의하고 내다봤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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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
김정헌 지음 / 검둥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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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다고들 한다. 그건 시골 우리 동네도 다르지 않다. 시골 동네에는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대부분 65세 이상분들이 많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들 젊게 보였는데 이제는 허리도 더 구부정하고 주름살도 한층 더 패여 있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농사일은 힘들고 그 걸로는 돈을 모을 수 없다는 까닭이다. 더욱이 자식들이 출세하려면 대도시로 나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이든 부모님들이 젊은 사람들을 도시로 내 보내는 이유가 그렇다. 농촌 마을은 그렇게 늙어가고 한적해진다.

그런데 농촌 마을을 살리려는 사업들이 진행된다. 쓰러지고 허물어지는 집들을 세우듯 농촌을 재건코자 하는 사업이다. 이른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이 그것이다. 농촌 마을 곳곳을 종합적으로 개발시킨다는 취지다.

정부와 지자체가 돈을 대서 그 사업을 주도한다고 하니 농촌 마을로서는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시골 마을에도 마을회관을 새롭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시골 마을에 과연 생기가 도는 걸까? 과연 사람들이 그곳에 드나들며 정을 나누고 살 수 있는 일일까?

김정헌의 〈김정헌, 예술가사 사는 마을을 가다〉를 읽으면 농촌 마을을 진짜로 되살릴 수 있는 길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정헌이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만들어 시골 마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마을 조사 사업'을 벌인 걸 되새긴 것이다. 그 중심은 지역 마을을 이롭게 하는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로 풀어간다. 그는 이 일을 시골 마을에 진짜로 생기가 돌고 살아갈 방도도 찾고 있다.

"이 도서관은 작년 6월에 여기 원래 있던 건물을 리노베이션하고 개관을 하였다. 그때 내가 초대되어 손님으로 참석한 바 있다. 이 작은 도서관 개관에 내가 초대된 이유는 내가 위원장으로 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복권 기금을 받아 전국의 '작은 도서관' 건립을 지원했는데 여기 백운면도 신청을 하여 선정되었기 때문이다."(137쪽)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에 자리 잡은 '흰구름 작은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다. 그곳에 도서관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그 지역에서 옹기장이로 일하고 있는 이현배 씨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마을 조사단 단장들의 집담회에서 1기 단장으로 일을 했는데, 그때 미래 세대를 위한 도서관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그 땅에 작은 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이현배 씨는 발효를 위한 질그릇 옹기를 굽고 있고, 그 일로 그 지역은 물론 세계 속에 옹기를 알리고자 애쓴다고 한다. 그에 관한 소식이 점차 알려지자 옹기 굽는 과정뿐만 아니라 직접 옹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니 진안군에서는 그에게 백운면을 중심으로 한 문화 활동의 중심에 서도록 자꾸 요청한다고 한다. 그것이 그 지역 마을을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서귀포가 고향인 이승택은 2000년도에 서울 생활을 잠시 접고 이곳 월평과 인연을 맺었다. 3년여를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는 월평을 속속들이 다 알아버렸다. 정말 아기자기하고 이쁜 월평 포구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아왜낭 밑에서 놀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건축가라 유달리 이 마을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가 가장 특이하게 본 것은 이 마을이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도로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199쪽)

이는 제주 서귀포 월평 마을에 펼쳐진 '생활문화 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다. 그 사업은 일종의 공모 사업이었는데, 건축가 이승택이 주동이 되어 주변의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문화도시 공동체 쿠키'라는 걸 조직한 것이다. 그게 기초가 되어 2009년에 생활문화 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곳 인근에 있는 '송이 갤러리'는 지금은 제주도 올레의 명소가 되있다고 한다.

그처럼 시골 마을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시골 마을을 살갑게 하는 일은 문화예술가들과 함께 할 때에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그 옛날 새마을 사업처럼 단순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만 벌인다면 그야말로 건물만 짓고 도로만 닦는 일 외에 무얼 더 할 수 있겠는가? 시골 마을에 생기가 돌고,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살 방도를 찾는 길을, 지금은 달리 모색할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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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 쇼박스
저스티스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신작 〈저스티스〉는 잘못 꿰맨 단추가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하는지 알게 한다. 청소년 범죄자들을 지도하는 학교선생 '제라르 윌'(니콜라스 게이지 분)은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여 입원하자 그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어 오른다. 그 무렵 법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보복할 수 있다는 '사이먼'(가이 피어스 분)이 내민 음모의 손을 붙잡는다.
법이 아닌 불의한 거래에 그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법의 판결은 시간도 걸리고 정확한 판결을 도출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뒷거래에는 더 큰 덫이 있다는 걸 그로서는 생각지 못한 걸까? 단순한 부탁만 들어주면 모든 게 해결될 걸로 생각했던 걸까? 결국 그는 그들이 내 민 덫에 걸려 일급살인자로 내 몰리고 만다.
이 세상 누구든지 은밀한 거래, 불의한 거래는 애당초 확실하게 차단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안전하고 바른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청와대 내에서 그런 거래에 손을 맞잡았다니 어찌 경악치 않겠는가?
▲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강간 폭행 당하여 입원한 아내
ⓒ 쇼박스
저스티스
내부고발자, 왜 망설이지 않나?
'불의한 거래'가 더 큰 화를 몰고 온다는 내용 이외에도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내부 고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법부의 불신'에 관한 것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 기업들은 사회 환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동자들의 복지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보다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방안도 없고, 결국 그것이 더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헌데 그 기업 제품이 사람의 인체와 자연환경에 해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윤리와 도덕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쓴다면 말이다.
문제는 그걸 바라보는 직원들의 관점이다. 그저 덮고 가는 게 능사라는 측과 함께 그걸 고발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견해가 엇갈릴 수 있다.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내부 고발자', 아니 '내부 제보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영화 〈저스티스〉에서도 내부제보자 있었다. 기업윤리와 경영방침에 심각한 불의를 발견한 직원이었다. 그걸 고발코자 취재 기자를 만났는데, 그는 기업에서 운용하는 민간인 사찰과 청부살해업체에 의해 낭떠러지로 떠밀려 죽고 만다. 그와 같은 죽음의 위협이 두려워서 내부제보를 망설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오래 전에 개봉된 영화 〈인사이드〉에서도 마찬가지다. 담배회사의 연구 개발자로 3년간 몸담았던 '와이건'이 담배의 유해물질이 있음을 밝히자 권고사직을 당한다. 회사에서 쫓겨날 때 내부비리를 발설치 않는 조건으로 각종 연금과 복리비를 받지만, 그는 가정의 경제적인 안정보다 국민들의 알 권리와 건강에 더 신경을 쓴다. 그 속에서 온갖 위협과 회유를 받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끝내 만 천하에 공개한다.
▲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경찰이 윌을 풀어주는 모습
ⓒ 쇼박스
저스티스

사법부 불신, 한계에 달했다
"변호사를 믿지 말라.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건 인간성, 이성, 정의다."
이 영화 〈저스티스〉에서 윌이 발견한 취재기자의 노트에 적혀 있는 글이다. 또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은 그 글귀가 우리사회의 사법부를 반영하는 음성처럼 들리기도 하지 않을까?
그건 〈부러진 화살〉에서도 마찬가지다. 석궁 교수가 법의 진실을 요구하는 동안 법원 판사는 또 다른 판사를 두둔하고 나섰다. 정의로운 판결보다 조직내부의 사람들을 더 옹호하려는 기획적인 판단이었다. 그로 인한 그 교수의 서글픔은 극에 달했고, 그의 아내와 아들만이 그의 위로자가 될 뿐이었다.

이 영화〈저스티스〉에서도 뉴올리언스 경찰 서장은 '사이먼'이 이끄는 조직과 부당한 내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미 서장은 그들의 암호를 꿰차고 있었고, 경찰서에 붙잡혀 온 윌도 도주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 주었다. 물론 그것은 윌을 더 큰 올갈미로 덧씌우는 계략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어찌 경찰만 해당되겠는가? 때로는 권력에 기생하려는 판사와 검사도 같은 영향권 내에 있을 것이다. 심지어 변호사까지도 믿지 말라고 이 영화에서 충고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사법부 불신이 극에 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윌이 믿을 사람이라곤 그의 아내뿐이었음을 이 영화에서도 드러내 준다.
영화 〈저스티스〉는 꽤 볼만한 영화다. 깊은 감동이나 세밀한 추리력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큰 교훈을 안겨준다. 불의한 거래에 말려들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교훈과 함께, 내부제보자들의 고독과 갈등,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사법부의 불신까지 드러내 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들을 되짚는다면 큰 유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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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어둠을 밝힌 여성들 - 은자의 나라에 처음 파송된 선교사 이야기
캐서린 안 지음, 김성웅 옮김 / 포이에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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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디든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교회역사도 예외이지 않다. 구한말 조선 땅에 들어 온 선교들은 단지 복음만 전한 건 아니다. 그들이 의료와 교육에 매진하긴 했지만 또 다른 이권에 연루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조정 대신의 몸을 고쳐준 뒤 어의(御醫)로 승격되어 광혜원을 세우지만, '을미사변' 전 일본공사가 명성왕후를 만나도록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다. 언더우드는 제중원 약제사로서 의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어 성경번역에 힘을 쓰지만, 석유와 석탄과 농기구를 수입한 인물이다. 왕실과 가까이 한 다른 굵직한 선교사들도 예외이지는 않다.

그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남성들이 주도했다. 그렇다고 여성 선교사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성 선교사의 아내로서 또는 독신 여성으로서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은 많았다. 다만 그녀들의 활동은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그늘로 가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또 다른 빛과 그림자라 할 수 있다.

미주 1.5세로서 풀러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는 캐서린 안은 〈조선의 어둠을 밝힌 여성들〉을 통해 1884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 땅에 활동한 외국인 여성선교사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앞서 밝힌 것처럼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에 관한 빛과 명암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그저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의 빛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 문헌에는 한국 선교 활동에 관한 방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공식 기록에도 여성 선교사의 사역이 모두 담겨 있지는 않다. 오히려 여성 선교사들이 쓴 일기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여성 선교회와 주고받은 서신 등 개인적인 기록이 이들의 일상과 사역을 훨씬 더 풍부하고 생생하게 들려준다."(들어가는 말)

일례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은 초창기 개신교인들이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렀던 미국 여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44년간 선교사로 일하면서 한국 땅에 병원을 네 개나 세웠고,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와 여자 의과대학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처럼 1884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 땅을 밟은 여성 선교사들은 2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삶이 여태 조명도 받지 못한 채 땅속에 묻혀 온 것이다.

캐서린은 그녀들의 행적을 쫓는 자료가 많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원 자료의 잡지들을 추적하여 이 책을 엮어냈다. 이른바 북감리교 여성선교회에서 발간한 〈이방 여성의 친구〉, 남감리교 여성선교회에서 발간한 〈여성 선교사의 목소리(Woman's Missionary)〉, 북장로교 여성선교회의 〈여성을 섬기는 여성 사역(Woman's Work for Woman)〉과 〈우리의 선교지(Our Mission Field)〉가 그것이다.

그때 당시 한국 땅을 밟은 여성 선교사들은 어떤 선교사역에 주력했을까? 그녀들은 남성 선교사들처럼 대부분 의료와 교육 사업에 몰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땅에 선교사로 자처한 여성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중산층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런 학식과 재능을 의료와 교육 쪽에 헌신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1900년경 제물포와 서울 사이에 철로가 놓이기 전까지 20년간 나귀와 가마를 타고 이 길을 지났다. 뒤에 온 선교사들은 철도 덕분에 서울까지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94쪽)

이는 메리 스크랜턴이 1885년 7월 9일 날 여성해외선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내딛으면서 겪은 고충을 이야기한 바다. 육로로 4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나귀나 가마로 9시간씩 여행해야 했던 여정이 힘들었고, 중간에 일꾼들이 주막에 들리면 갇혀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까지 달려들기도 했다고 한다.

살면서 겪은 고충은 어떤 점들이었을까? 집 구조가 너무 작은 것, 수세식 화장실이 없는 것, 고춧가루를 버무린 김치를 먹어야 했던 것들이 힘든 점이었다고 밝힌다. 더욱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휘말린 것과 일제에 강제로 병합당한 것이 가장 큰 고충이었다고 한다. 주권을 잃은 백성들을 선교한다는 게 때로는 생명을 내걸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니 엘러스는 오자마자 명성왕후를 돌보는 일을 했다. 호러스 앨런과 헤론은 고종을 돌보았다. 의대를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 몇 선교사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앨러스는 명성왕후를 잘 치료했다. 그리고 국립병원에서 여성병동도 열었다."(184쪽)

이는 1886년에 한국에 파송된 첫 번째 여성 의료 선교사인 애니 엘러스에 관한 내용이다 그녀는 한국에 온 첫 번째 독신 여성 선교사였는데, 그녀는 마치 제 몸처럼 명성왕후를 잘 돌보고 치료했다고 한다. 물론 그 뒤로 온 다른 여성 선교사들도 다르지 않았는데, 놀라운 건 한국에서 법으로 포교를 금하고 있던 그 때에도 여성 의료선교사들은 명성왕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선교활동이었다면 왕실 밖 민간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그 당시 여성 선교사들은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에게 '여성 성경반'을 열었고, 주일학교를 꾸려 어린아이들까지도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그것은 여성 지도자들을 기르는 모판이 되었다고 한다.

캐서린 안의 〈조선의 어둠을 밝힌 여성들〉은 구한말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펼친 선교활동의 빛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그녀들이 실수한 과오보다는 공적에 치중하고 있다. 그것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추구한 선교활동이 남성위주의 발판을 따랐기 때문이고, 그녀들과 관련된 기록물들이 제한돼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책을 바탕으로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활동한 반면교사의 삶을 객관적으로 추적한 책들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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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사는 공장 - 공장식 축산업 너머의 삶과 좋은 먹거리를 찾아서
니콜렛 한 니먼 지음, 황미영 옮김 / 수이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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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적 시골집에서 돼지를 키운 적이 있었죠. 집 마당을 가로질러 측간(厠間) 바로 앞에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녀석은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을 살았죠. 그때 녀석이 먹었던 주식은 우리집 식구들이 먹고 남은 밥과 김치였습니다. 녀석이 하룻밤 사이에 9마리나 되는 새끼를 날 때가 가장 기뻤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무렵에는 소도 키웠습니다. 그걸로 자녀들 학자금을 마련코자 하는 아버지 뜻이었지요. 그때 송아지도 네 마리나 사들였고, 저 멀리 산 너머에 큰 산도 하나 사서 철조망을 둘러쳤습니다. 그곳에서 소들이 마음놓고 풀을 뜯어먹고 자라도록 했던 것입니다. 물론 겨울철에는 짚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그것을 한 뭇씩 작두로 잘라 소에게 먹이곤 했지요.

지금은 시골에서 돼지와 소를 한두 마리씩 키우고 있는 집은 없습니다. 세 집 정도만 막사를 지어 돼지와 소를 키우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산에다 방목하는 건 아닙니다. 콘크리트 바닥과 철골 지붕 안에 소를 가둬두고 사료를 먹여서 키우고 있지요. 이른바 '공장식 축산'이라 할 수 있지요.

니콜렛 한 니먼의 〈돼지가 사는 공장〉은 노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공장식 축산이 몰고 오는 환경오염, 그에 따른 인체의 해로운 질병을 야기할 수 있는 건강상의 문제들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녀는 전미야생돌물 연합의 변호사로 몸담고 있었지만 '워터키퍼 얼라이언스'로 직장을 옮긴 뒤부터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과 피해를 언론과 환경단체 심지어 법원에까지 소장을 제출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공장식 축산업계는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러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끔 막는다. 대형 축산업체들의 운영 방식이 국민들의 건강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내용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덮어 버리려 하는 축산업계의 시도를 니콜렛과 내가 직접 겪은 적도 있다."('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의 서문 겸 추천사)

그녀는 1980년대 전만 해도 노스캐롤라이나는 소규모 농장에다 다양한 곡식을 재배했고, 돼지도 몇 마리씩 풀어 놓고 키웠다고 합니다. 당시 그 지역의 돼지는 모두 합해 200만 마리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만큼 오염이 되지 않았으니 그땐 개울도 맑고 투명했고 물고기와 게도 잡힐 정도로 유명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헌데 1989년에는 그 돼지 수가 250만 마리로 늘어나더니 2003년에는 1,000만 마리로 급증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내에 그 지역의 돼지 농장은 1만 2,500곳에서 2,800곳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요. 야외에 방목하며 키우던 전통식 농장이 사라지고, 점차 배설물 구덩이를 갖추고 수천 마리의 돼지를 가두고 기르는 기업형 사육시설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무엇보다 돼지나 소는 유전자변형 옥수수로 만든 사료와 성장호르몬제를 맞아야 하고, 각종 질병에도 너끈히 견딜 수 있는 항생제를 맞게 된다는 점이지요. 그걸 도살하여 사람들이 사서 먹게 되니, 온전한 사람도 차츰차츰 병에 걸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기업형 사육시설에서 내 보내는 여러 오물들이 대지와 하천으로 스며들고, 인근 지역에는 악취를 풍기고, 여러 기생충들과 모기떼들을 불러 모으니, 그 지역 전체가 오염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녀가 공장식 축산에 대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게 그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을 세상 언론에 알리고, 여러 환경단체에 호소하고, 심지어 법원에 소장까지 제출하여 큰 성과를 거두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지, 그 소송을 준비하면서 만난 인물 가운데 존 트라볼타 주연의 〈시빌 액션(Civil Action)〉의 실제 주인공인 '잰 슐리츠먼' 변호사와 영화 〈인사이더(The Insider)〉의 실제 주인공으로 담배회사를 상대로 싸웠던 '스티브 보즈먼' 변호사도 발벗고 도와줬다고 합니다.

물론 축산업계의 반발과 방해공작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지요. 그녀와 관련된 여러 환경 단체를 향해서는 '채식주의 운동가들이 활동하는 단체'이자 '축산업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동부 출신 변호사들'이 펼치는 주장이라고 매도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미국 정부를 동원하여 축산업 연구원들의 활동까지도 검열토록 했고, 농무부를 향해서도 격하게 항의하는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하지요. 하지만 법원은 결국 워터키퍼의 손을 들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사무총장과의 갈등으로 그녀는 그 일을 정리해야 했고, 그 즈음 캘리포니아의 니먼 랜치에서 실제 방목을 하고 있는 목장주 '빌 니먼'을 만나 혼인까지 골인하게 되고, 전혀 예상치 않게 남편과 함께 직접 소를 키우며 블루베리도 따는 즐거운 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변호사로서, 환경단체 직원으로, 그리고 목장 부인으로 살게 된 그녀의 이력과 함께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과 그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꼼꼼히 짚어 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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