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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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큰 사건도 언론이 드러내지 않으면 땅 속에 묻히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다. 하찮을 사건인데 언론이 부풀리면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경우다. 물론 중요치 않는 사건도 작가가 발굴하여 세상에 내 놓으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그랬다.

 

이재익의 장편소설 〈41〉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14살 소녀를 41명의 고등학생이 1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성폭행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까닭이다. 2004년도 경남 밀양에서 일어난 사건이 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언론에서 잠잠한 이유가 아닐까.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의 부모와 지방 유지들은 그 사건이 조용히 묻히길 원했다. 어쩌면 언론도 그들과 교감하지 않았을까.

 

이 책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전반적인 사건전개는 가설로 꾸몄다. 41명 중 가장 지독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4명을 살해하는 두 명의 연쇄살인범과 그들을 추격하는 경찰 두 명의 탐색전과 추격전이 그것이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문체도 간결하며, 사건전개도 흥미진진해서 책을 읽는 이들은 좀체 이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놓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과연 그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정당한 판결을 내렸을까? 한 번 재판이 끝난 사건은 다시는 파헤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이 경우에도 타당할까? 41명이나 되는 그 녀석들이 어떻게 형사처분 없이 풀려날 수 있었을까? 만약 자기 자식이 그런 변을 당했다면 그 변호사는 어떻게 대했을까? 그런 저런 생각들이 이 책을 덮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몇 년 전에 어느 대학에서 같은 과 여학생이 자는 동안 성추행하고 동영상으로 촬영한 대학생들이 실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놈들도 전부 이 년 이상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 네 살짜리 아이를 일 년 동안 수십 번이나 윤간하고 폭행하고 협박한 놈들이, 마흔 한 명이나 되는 놈들이 전부 무죄라니요?"(181쪽)

 

공조한 연쇄살인범을 쫓던 강력계 형사 중 한 명이 던진 말이다. 하지만 어떤가? 이 책에서도 드러내지만, 이 사건을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게 했다면, 모두가 41명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원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을 파멸로 몰아 넣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함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와 변호사에 대해서도 신상을 공개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을까?

 

지금 그 여중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그 가해자들은? 그 여중생은 그 당시 다른 데로 전학했지만, 가해자들 부모가 찾아와 탄원해 달라는 소란 때문에, 그 학교마저 다닐 수 없었고, 급기야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때 그 가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당시의 일을 어린 시절의 불장난쯤으로 생각하며 까마득히 잊고 지내지는 않을까?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찾은 것 외에 이 작품을 특징짓는 것은 곳곳에 드러나는 노골적인 폭력성입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소설들 중에 폭력적인 장면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요. 읽은 동안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폭력으로 변하는 요즘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학교 폭력에 대해서요."(321쪽, 작가의 말)

 

그렇듯 학교 폭력과 약육강식의 패턴은 점점 더 극악무도해질 것이다. 개개인의 심성도 그만큼 악해지고 있고, 사회집단도 이기적으로 급변하는 까닭이다. 비록 이 책의 사건전개가 가설이긴 하지만 충분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미 우리사회 곳곳에 폭력과 자살과 정신질환과 연쇄살인이 난무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는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까?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비롯된다. 기성세대의 부조리가 근절되면 청소년 폭행도 해결되기 마련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당연히 맑아지게 된다. 대통령부터 촌부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라도 공감할만한 법 집행이 실현된다면, 파멸이 아닌 환생을 위한 공의로운 법 집행이 구현된다면, 그 일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책도 그걸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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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세트 - 전2권 - 가난한 성자들 조드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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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그 원인을 밖에서 찾죠. 지역적인 요인, 환경적인 문제, 경제적인 요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곤 하죠. 어쩌면 그것은 자기 결핍을 모면하려는 자기 회피의 또 다른 방법이겠죠. 정작 자기 안에 있는 한계는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말이죠. 자기 안에 빛이 사라진 것에 대해 눈을 떠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거란 기대와 달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을 등지고 그곳을 향해 내려갔죠.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곁에 다가와 친히 동행해 주셨죠.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죠. 예수께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떡을 뗀 뒤에야, 비로소 그들 눈이 밝아져 그를 알아봤죠. 여태 고민하던 문제도 한꺼번에 사라진 게 바로 그 시점이었죠. 환경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만 말이죠.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였죠. 아람 군대는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를 거느린 정예병들이었죠. 견고한 성벽에 기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한 듯 했지만 식량이 다 떨어진 마당이었으니 인육까지 먹어야 할 지경이었죠.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한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죠. 그때 수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자신들을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죠. 내우외란(內憂外亂) 속에서도 평상심을 되찾은 게 바로 그 시점이었죠.

“그때 하늘이 물결처럼 춤을 추고 구름이 갖가지 생명체의 모양으로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위 모서리에 찢기는 바람이 늑대가 우짖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태초에 있던 것, 가장 큰 것,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 푸른 하늘의 육체인 것, 바로 칭기스(대지가 생기기 이전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2권, 81쪽)

김형수의 신작 <조드>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초원에 버려진 소년 테무진이 몽골 초원의 혹독한 추위인 ‘조드’를 이겨내고, 수십 개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칸’에 오르는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그려낸 이야기죠. 점령과 소유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소통과 통합에 중점을 둔 작품이죠. 그들 유목민들이 5가지나 되는 조드를 이겨낸 비결을,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말들이 그걸 견뎌낸 비결을, ‘푸른 하늘의 은총’과 ‘건강한 눈동자’에 드러내고 있죠.

그런 눈빛은 고암 이응도 화백(1904~1989)도 마찬가지겠죠. 그는 한지와 수묵화라는 동양화 매체로 1961년에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죠. 이른바 ‘한류문화의 원조’라 할 수 있죠. 더욱이 그는 수덕산 초입 마당의 큰 바위에 ‘추상문자'라는 암각화를 그린 화백이고, ‘군상’이란 작품으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죠.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 예술 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바탕으로 당대 서구의 회화 사조를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습니다.”(95쪽)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의 홍천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기념관 개관식에 맞춰 출간한 <이응노의 집, 이야기>에 나온 내용이에요. 그는 파리에까지 가서도 우리의 정신과 예술세계를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죠. 그게 가능했던 건 어린 시절의 배고픔 속에서도 흙을 짓이겨 그림을 그렸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잉크 대신에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한 궤적에 있다고 하죠. 외적인 환경을 탓하거나 굴하지 않고 남다른 예술혼을 온전히 불태웠던 것 말이죠.

그렇듯 대부분의 난제는 외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죠. 자기 안에서부터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 안에 있는 빛을 상실한 것 말이죠. 하지만 그 안에 빛이 사라져 있다 해도, 푸른 하늘의 은총이 떠나 있다 해도, 건강한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해도, 매일매일 그 혼이 불타 오르지 않는다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겠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혹독한 시기야말로 더욱더 그 빛에 다가서는 의지의 견고함을 불러오죠. C.S. 루이스의 흡인력 있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그렇게 읊조리죠.

“원수가 조금만 더 자기 능력을 활용하면 인간들에게 언제 얼마든지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는지 자네도 꽤 궁금했을 거야. 그는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는 건 소용없다고 생각하지(지극히 미약하고 희미한 수준이라도 그의 임재를 억지로 느끼게 한다면 그건 월권인 거니까). 그는 억지로는 안 해. 다만 간절히 원할 뿐이지.”

오늘은 그대에게 스물여섯 번째 ‘잎사귀 글(葉書)’을 띄우네요. 지난 엽서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설파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나눴네요. 내 안에 참 빛이 회복된다면 모든 환경속에서도 자유 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죠. 다만 그대와 나는 그 빛의 주관자가 아니라 언제나 그 빛을 받드는 겸손한 피조물이란 사실을 기억했으면 해요. 오늘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대 앞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동행하길 기도해요.

201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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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윤리학 - 함규진 선생님이 들려주는 윤리와 도덕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6
함규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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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하다.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이성 친구와 뽀뽀도 한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딴 전을 피우는 아이들도 많다. 다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즘 10대들에게는 윤리와 도덕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경향이다.

 

어른들은 세대 간의 차이라고 단정해 버릴 것이다. 옛날에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면 무릎을 꿇고 들었노라고, 담배를 피우다가도 동네 어른에게 들키면 뒷주머니에 감추기라도 했다고 말이다. 요즘에는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게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소연할 것이다.

 

과연 시대가 변한 탓일까? 아이들에게만 잘못이 있는 걸까?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무엇보다도 10대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지 않은 탓 말이다. 더욱이 아이들 앞에서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탓도 많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모습은 거울과 같은 까닭이다.

 

함규진 선생의 〈10대와 통하는 윤리학〉은 왜 윤리와 도덕을 지켜야 하는 지에서부터, 가족 간의 윤리, 학교와 나라와 세계와 생명에 관한 윤리까지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 세대에 맞게 질문을 곁들이고 있고, 아이들 스스로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제공한다. 그야말로 현재 아이들이 겪고 있는 주제들을 망라한 것이니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윤리를 따지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겠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내게 피해 주기를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내가 무지무지 강한 '초사이언3'쯤 되어서, 아니면 '데스노트'를 손에 들고 있어서, 아무도 내게 피해를 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인 이상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들어가는 말)

 

개인과 가족의 관계는 가정 안에서 다뤄야 할 부분이다. 흔히들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집 밖에서도 샌다고 하니 말이다. 가정윤리는 그만큼 사회와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10대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곤욕스러운 것은 학교윤리일 것이다. 학교생활 속에서 선생님이나 학우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것 말이다.

 

물론 그건 쉽지 않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우고 있고, 체벌이 금지된 마당에 선생님들은 담임을 맡는 것조차 싫어하기 때문이다. 업무는 업무대로 힘들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통제가 안 되니 말이다. 그 속에서 윤리적인 학교를 만들어가는 게 쉬운 일일까? 이 책에서는 그런 일이 제도를 통해서 가능한 게 아니라,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학교를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려면 학생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닐까? 선생님들도 옛날이 좋았다는 타령만 늘어놓지 말고, 좋은 대학 보내는 일에 급급해하지 말고, 학생들이 훌륭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하게끔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61쪽)

 

한편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윤리'에 대해서도 귀중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른바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에 관한 이야기다. '개똥녀'니 '루저녀', '땅콩남'이니 하는 비속어들과 욕설들로 인해 자살까지 하는 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걸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 실명제를 거론하기도 한다는데,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해 반대한다. 이유가 뭘까? 사이버 공간의 최대 장점인 '익명성' 때문이다. 그게 사라지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제도적인 조치에 앞서서, 네티즌들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사이버상의 상대방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는 것 말이다. 이른바 성경에서 말하는 '황금율'이 그것이다.

 

최근 논문표절시비로 얼룩진 국회의원 당선자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는 어떠할까? 10대들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그것은 '정의의 윤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철저한 검증도 못한 내부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고, 당선 이후의 사후처리에 기대려는 사고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정의란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결코 옳지 않은 행위였다. 10대들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행위다. 그것은 온갖 비리가 있어도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모든 것을 무마시키겠다는 행위와 같은 격이다. 그 같은 행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악법을 고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독재 정권하에서 '대통령 임기를 종신제로 한다.' '집권당을 제외한 정당은 인정하지 않는다.' 등 등 국민이 민주적으로 정권을 바꿀 기회를 없애버리고, 정권 마음대로 법률을 만드는 경우다.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를 박탈한 것으로 따를 필요가 없으며,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다."(122쪽)

 

이 밖에도 이 책에는 10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질문들을 많이 던진다. 이른바 대형 마트의 가격 파괴와 소형 업체들의 가격 경쟁에 관한 것에서부터, 자살과 안락사를 비롯해 낙태에 관한 윤리 등 다양한 현실 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그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10대 청소년들이 이 시대의 윤리와 도덕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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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권력 - 인간과 자연, 갈등과 개입 그리고 화해의 역사
요아힘 라트카우 지음, 이영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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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자연을 다스린 권력의 역사라 해도 무방하다. 땅을 정복하고, 물을 다스려 온 역사 속에서 정치권력이 태동한 까닭이다. 칭기즈칸도 '조드'라는 몽골 초원의 추위와 폭설을 잘 다스렸기에 최고 권력자에 오를 수 있었다. 중국 못지않게 베니스도 치수와 관개시설에 신경을 곤두세운 까닭도 그것이다.

 

자연과 함께 더불어 온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대지를 '어머니의 땅'으로 섬기던 원주민들에 대해 그들은 약탈과 살육의 방법으로 그들을 추방시켰다. 문명과 기술발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무자비한 광기가 도사렸던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지진 사고는 어떠한가? 값싼 원자력으로 많은 전력을 생산한다지만, 그 이면에 벌어질 자연재앙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인위적인 개발과 인간의 편리를 위한 정책은 그런 자연재앙의 후폭풍을 맞게 되는 것이다.

 

요아힘 라트카우의 〈자연과 권력〉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속가능한 경제를 이어나갈 수 있는 구조와 제도, 권력과 정치에 방점을 놓고 있다. 단순한 자연숭배사상을 넘어, 보다 정교한 환경보호와 관리체계를 내다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만큼 시간대와 공간범위도 넓을 뿐 아니라 주제마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첨가하고 있다.

 

"자연 자원을 친화적으로 사용하여 미래 세대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의 지속 가능성은 1922년 리우 환경 정상회의에서 세계 경제의 목표로 확정되었다. 독일 임업에서는 이 원칙이 벌써 수백 년간 지켜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지속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자연 착취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가들도 있지만 지속 가능성 개념이 색깔과 실체를 갖는 데 독일 임업사가 어느 정도는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그가 강조하는 독일 임업사란 무엇인가? 자연과 공생해 온 독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실 라트카우는 원자력 개발 경쟁에 돌입하던 1970년대에 원자력 기술산업의 폐해를 추적하다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지기 3년 전에는 독일 원자력 산업의 상승과 위기를 다룬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독일정부가 모든 원전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는데, 그를 대체할만한 태양력·수력·풍력·메탄올가스 개발도 독일의 임업사와 함께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인류는 '불의 역사'와 함께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을 이용하여 먹을 것을 구하고, 살림과 경제를 꾸려온 것 말이다. 이 책에서는 불을 이용한 경제를 '방화 경제'라고 칭한다. 그것은 유목생활과 임업사와 농업사에도 괘를 같이 해온 정책이라고 밝힌다. 모든 정착 생활의 근간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방화 경제'와 더불어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물, 곧 '치수경제'와 관련된 주제다. 인류는 수로를 이용해 나무와 목재를 운반해 왔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건축도 마찬가지다. 목재와 수로를 이용한 건축은 그 때 당시 세계역사의 전반적인 추세였다. 그리고 그것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기도 했다.

 

"근대 중국의 황제들은 범람지역을 시찰하고 댐 공사를 지시하는 모습을 과시적으로 드러냈다. 1854-1855년에도 황하의 어구는 북쪽으로 거의 500킬로미터나 이동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는 태평천국 운동의 시대였다. 홍수는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세계 그 어느 강도 역사상 그렇게 극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151쪽)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 가운데 눈여겨 볼 부분은 5장일 것이다. 그것은 '산업화', 이른바 자본주의 발달과 자원고갈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라트카우는 19세기야말로 축산업과 계획 작물재배로 인한 자연자원의 고갈이 심한 때였다고 밝힌다. 석탄 사용과 화학 비료의 등장은 수질과 토양오염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뜻이다. 다만 낙관적 환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당시의 산업화는 자연파괴를 회복불가능한 시대로 만들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타당한 견해일까? 

 

"화석 연료의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낳은 대안인 대규모 수력 발전과 핵발전소는 다시 전례 없는 규모의 문제를 낳았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해결책이 더 큰 문제를 낳는 시대, 환경 문제의 규모가 커지고 문제 영역들 사이에 상호 작용이 강해져 가는 시대, 하지만 생태 의식도 크게 성장하여 지속 가능성은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대양과 대기와 같은 지구 공유 자산이 보호되려면 강력한 기관이 필요하지만, 그런 기관의 관철력 그리고 전반적이고 지구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환경 정책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511쪽)

 

그렇다. 방화경제와 치수경제를 비롯해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 뗄 수 없는 권력의 역사다. 그것이 산업화와 더불어 화석연료와 원자력개발로 확장돼 왔고, 이제는 자연재앙의 부메랑을 맞을 시점에 처해 있다. 이러한 때에 전 지구적인 자연의 요구를 충족할만한 환경정책에 모두가 골몰해야 한다. 어쩌면 인간이 쥐고 있는 권력을 자연에게 다시금 돌려줘야 할 때이다. 순환론적이고 환원론적인 생태계의 복원 말이다. 현재 독일 땅에서 펼쳐지고 있는 활발한 대체 에너지는 그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도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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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집 이야기 - 제5판
이응노 지음 / 수류산방.중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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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수묵화라는 동양화 매체로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화백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한류문화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다. 수덕산 초입 마당의 큰 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그린 화백, '군상'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그다.

 

세계적인 화백에게도 아픔이 있기 마련. 1960년 군사정권 시절의 '동백림 사건'이 그것이고, 1970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사건'에 연루되어, 살아생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 묻힌 게 그것이다. 

 

수류산방에서 펴낸〈이응노의 집, 이야기〉는 그의 생가 기념관 개관식 때 엮은 사진집 겸 책자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의 홍천마을에 있는 그의 기념관, 일명 '이응노의 집'이 그곳. 이 책은 그 집에 얽힌 회고록이자, 그의 집에 전시돼 있는 그림들에 대한 해설서다.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73쪽)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암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았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면서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나뭇조각이 눈에 띄면 그걸 깎아 조각을 했고, 데생도 연필이나 붓이 없으면 젓가락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런 유년시절의 익숙함이 옥중생활에도 자연스레 이어졌던 것이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 예술 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바탕으로 당대 서구의 회화 사조를 소화하고 자기 젓으로 만들어갔습니다."(95쪽)

 

이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생가 기념관은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고, 우주의 기운이 솟아나도록 설계돼 있다. 건축가 조성룡이 주안점을 둔 게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생가 기념관 앞쪽으로 너른 마당과 연못의 연꽃이 드러나게 했고, 뒤쪽으로는 고암이 즐겨했던 대나무 숲을 자연스레 잇고 있다. 기념관내 네 개의 전시실에는 그의 작품 300여 점이 있다고 한다.

 

"'이응노의 집'에서 건축물이 작게는 앞의 마당, 연밭과 들판, 멀리는 더 큰 스케일의 자연,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은, 전통적인 건축 사상과 우주관을 잘 반영한 것이며 오브제 중심의 건축보다 경관적이고 다분히 생태를 고려하고 있는 건축이라고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161쪽)

 

그 밖에도 이 책에는 고암의 작품뿐만 아니라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화구들와 유품들이 담겨 있고, 김학량·이태호·유홍준 등 '이응노의 집 개관준비위원'이 쓴 작가론과 건축론도 담겨 있다. 더욱이 1904년부터 1989년까지 그가 걸어온 궤적도 눈여겨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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