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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세트 - 전2권 - 가난한 성자들 ㅣ 조드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평점 :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그 원인을 밖에서 찾죠. 지역적인 요인, 환경적인 문제, 경제적인 요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곤 하죠. 어쩌면 그것은 자기 결핍을 모면하려는 자기 회피의 또 다른 방법이겠죠. 정작 자기 안에 있는 한계는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말이죠. 자기 안에 빛이 사라진 것에 대해 눈을 떠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거란 기대와 달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을 등지고 그곳을 향해 내려갔죠.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곁에 다가와 친히 동행해 주셨죠.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죠. 예수께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떡을 뗀 뒤에야, 비로소 그들 눈이 밝아져 그를 알아봤죠. 여태 고민하던 문제도 한꺼번에 사라진 게 바로 그 시점이었죠. 환경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만 말이죠.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였죠. 아람 군대는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를 거느린 정예병들이었죠. 견고한 성벽에 기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한 듯 했지만 식량이 다 떨어진 마당이었으니 인육까지 먹어야 할 지경이었죠.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한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죠. 그때 수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자신들을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죠. 내우외란(內憂外亂) 속에서도 평상심을 되찾은 게 바로 그 시점이었죠.
“그때 하늘이 물결처럼 춤을 추고 구름이 갖가지 생명체의 모양으로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위 모서리에 찢기는 바람이 늑대가 우짖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태초에 있던 것, 가장 큰 것,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 푸른 하늘의 육체인 것, 바로 칭기스(대지가 생기기 이전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2권, 81쪽)
김형수의 신작 <조드>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초원에 버려진 소년 테무진이 몽골 초원의 혹독한 추위인 ‘조드’를 이겨내고, 수십 개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칸’에 오르는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그려낸 이야기죠. 점령과 소유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소통과 통합에 중점을 둔 작품이죠. 그들 유목민들이 5가지나 되는 조드를 이겨낸 비결을,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말들이 그걸 견뎌낸 비결을, ‘푸른 하늘의 은총’과 ‘건강한 눈동자’에 드러내고 있죠.
그런 눈빛은 고암 이응도 화백(1904~1989)도 마찬가지겠죠. 그는 한지와 수묵화라는 동양화 매체로 1961년에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죠. 이른바 ‘한류문화의 원조’라 할 수 있죠. 더욱이 그는 수덕산 초입 마당의 큰 바위에 ‘추상문자'라는 암각화를 그린 화백이고, ‘군상’이란 작품으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죠.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 예술 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바탕으로 당대 서구의 회화 사조를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습니다.”(95쪽)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의 홍천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기념관 개관식에 맞춰 출간한 <이응노의 집, 이야기>에 나온 내용이에요. 그는 파리에까지 가서도 우리의 정신과 예술세계를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죠. 그게 가능했던 건 어린 시절의 배고픔 속에서도 흙을 짓이겨 그림을 그렸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잉크 대신에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한 궤적에 있다고 하죠. 외적인 환경을 탓하거나 굴하지 않고 남다른 예술혼을 온전히 불태웠던 것 말이죠.
그렇듯 대부분의 난제는 외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죠. 자기 안에서부터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 안에 있는 빛을 상실한 것 말이죠. 하지만 그 안에 빛이 사라져 있다 해도, 푸른 하늘의 은총이 떠나 있다 해도, 건강한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해도, 매일매일 그 혼이 불타 오르지 않는다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겠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혹독한 시기야말로 더욱더 그 빛에 다가서는 의지의 견고함을 불러오죠. C.S. 루이스의 흡인력 있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그렇게 읊조리죠.
“원수가 조금만 더 자기 능력을 활용하면 인간들에게 언제 얼마든지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는지 자네도 꽤 궁금했을 거야. 그는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는 건 소용없다고 생각하지(지극히 미약하고 희미한 수준이라도 그의 임재를 억지로 느끼게 한다면 그건 월권인 거니까). 그는 억지로는 안 해. 다만 간절히 원할 뿐이지.”
오늘은 그대에게 스물여섯 번째 ‘잎사귀 글(葉書)’을 띄우네요. 지난 엽서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설파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나눴네요. 내 안에 참 빛이 회복된다면 모든 환경속에서도 자유 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죠. 다만 그대와 나는 그 빛의 주관자가 아니라 언제나 그 빛을 받드는 겸손한 피조물이란 사실을 기억했으면 해요. 오늘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대 앞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동행하길 기도해요.
2012.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