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너희가 별이야 - 세상의 문을 여는 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여덟 가지 이야기
김택환 엮음 / 삼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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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은 꿈 많은 나이다. 대학에 들어가 자기만의 분야를 전공하든지, 아니면 직장에 뛰어들어 세상의 갖가지 내공을 쌓던지 하는 나이다. 그 나이가 되면 대부분은 세상이 앞서 열어 놓은 길을 따라가지만 남다른 젊은이들은 자기만의 길을 내기도 한다.

이른바 눈 덮인 산에 자기만의 신발도장을 찍기 위해 온 산야에 파묻힌 산사람이 된다든지, 잘못된 정보들로 인해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그 바다에 뛰어든다든지, 비록 자신이 하는 일이 돈이 되지 않을지언정 정말로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은 그런 일들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이다.

그렇듯 자기만의 길을 향해 세상의 창문을 열고 나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김택환의 <스무살, 너희가 별이야>(삼인·2007)가 그것이다.

이는 8명의 젊은이들이 각기 다른 일들을 갖고서 나름대로 푹 빠져 있는 모습을 스케치 한 책이다. 그야말로 스무 살에 접어든 젊은이라면 한 번쯤 헤아려 봐야 할 귀한 참고서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이름 빛나는 이들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 오로지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금기를 넘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도전하고, 나누면서 더불어 살고,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다."(머리말)

여기에는 우선 팔레스타인 평화 운동가로 살아가는 '안영민'이 있다. 35살 꿈 많은 나이에 그는 왜 팔레스타인에 목숨을 걸고 뛰어다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 언론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정보만을 접수한 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전혀 다르게 보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스라엘은 평화의 사도요, 팔레스타인은 깡패라고 떠들어대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바로 그와 같은 것들을 바로 잡고자 팔레스타인 평화 운동가로 투신하게 된 것이다.

사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만 해도 세계인들 대부분은 정말로 감동을 받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은 선택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영민이 전하는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독립할 무렵 그들은 팔레스타인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요르단이나 시리나, 레바논 등지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시켜 버렸고, 그 숫자만 해도 무려 90~100만 명이었다.

왜 그는 그 같은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지 생활을 했고 지금 팔레스타인들이 그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란다. 그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고, 그것은 곧 세계평화와 직결된다는 이유에서다. 그 까닭에 그는 평생을 걸어도 될 필(feel)이 꽂혔던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여성이 있다. 영화계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이하영'이 바로 그녀다. 그녀는 영화제작 스태프로서 6년간 일해 왔다. 그녀가 맡아 하는 일이란 그야말로 잡부와 다름없다. 영화중에 발생되는 각종 소음이나 사람들까지도 통제해야 한다. 더욱이 눈이 필요하면 살수차를 동원해 눈을 만들어 뿌리고, 비가 와야 한다면 비를 만들어 뿌려야 한다. 촬영 중 배우와 스태프들의 배고픔까지 도맡아서 처리하는 게 그녀의 몫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일의 대가로 도대체 얼마나 받는가? 한 작품 당 100만원에서 20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 작품을 촬영하는데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년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연봉 1백 만 원'도 안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굳이 그와 같은 일에 뛰어들어 몸과 세월을 혹사시키는가? 그것은 영화 끝부분 자막에 나오는 '크레디트 한 줄' 때문이다. 그 한 줄만 보면 모든 고생과 모든 배고픔도 다 잊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든 이유이다.

물론 한 가지 다른 이유도 빠트릴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겪은 설움들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픈 열망 때문이다. 이른바 영화 한 작품을 만드는데 모든 스태프들의 몸값을 합쳐도 주연급 배우 하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바로 그와 같은 어긋난 관행들을 고쳐 보고픈 바람 때문에 그녀는 쉽게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이 성공할 때가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하는 사람'으로 남기를 바라는 '임종진', 춤테라피 강사로 나눔의 삶을 베푸는 '신차선', 그리고 참나무청소년배움터의 교사로서 그곳의 아이들을 참된 예수로 생각하며 돌보는 '윤용희' 등 8명의 인생살이가 담겨 있다.

그렇듯 색다른 발로 써나가는 그들의 인생살이는 줄 세우기식 직업교육에 찌든 우리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름대로 창조적인 이력서를 써나가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이 땅의 스무 살 젊은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인생 교본으로 남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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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숯가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저 멀리 재래식 화장실도 보이고, 여러 숯가마들도 놓여 있습니다.
ⓒ 권성권
오늘(8일)은 멀리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숯가마에 다녀왔다. 교회에 다니는 몇몇 어르신들과 함께 한 자리였는데, 대부분 뼈마디가 쑤시는 분들이라 다들 좋아했다. 더욱이 어제오늘 추운 날씨라, 뜨거운 숯가마 속에 몸을 녹인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을 듯싶었다.

"여기가 어디래요? 하나도 보이지 않네요."
"그러니까 기어서 들어와야죠."
"왜 이렇게 캄캄하데요?"
"그래야 수작이라도 부리며 놀지요?"
"하하하."


▲ 이곳이 숯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천으로 돼 있는데, 지금은 불이 켜져 있지만 처음엔 불도 없이 컴컴했습니다. 누가 누군지, 손과 발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재미난 농들도 주고 받았지요.
ⓒ 권성권
숯가마 입구에 들어서서 천을 걷어내니 정말로 앞이 캄캄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벌써 한 팀이 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쫓아 졸졸 따라 들어갔다. 그 무렵에 그렇게들 재미나게 농을 던졌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서서히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던 것이다. 그 까닭에 이 사람 저 사람, 한 사람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 이 분이 숯가마 속에 참나무를 넣어 불을 때는 분입니다. 그래서 숯들을 빼 내고, 그 열기 속으로 우리 일행들이 들어간 것이죠. 우리가 들어간 곳이 3일이 지난 곳인데, 뜻뜻하고 좋았어요.
ⓒ 권성권
"등허리도 지져요?"
"어휴? 익겠는데요?"
"우린 나갈래요."
"왜 벌써들 나가세요?"
"우리는 오래 있었거든요."
"그게 아니라, 묵은 닭이라 그러지요."
"그런가요? 저도 나가야 되겠는데요, 너무 뜨거워서요."
"저 봐요. 목사님도 햇닭이라 그렇죠?"
"숯가마 속에서 목사님을 놀리시네요?"
"뭘요, 재밌잖아요."


▲ 숯가마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분들과 함께 오늘 하루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 권성권
그만큼 젊은 사람 축에 낀 나는 얼마 있지 않아 그곳을 빠져나왔고, 나이 든 분들은 오래도록 그곳에서 몸을 지졌다. 그래야만 뼈마디 마디마다 좋아질 것이고, 몸속 노폐물까지도 쑥쑥 빠질 것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한참 점심이 지난 시각까지도 그분들은 그 속에서 있었고, 이후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곧장 그곳을 찾아 들어갔던 것이다. 그만큼 나이 든 분들에게 그곳보다 더 좋은 곳도 없을 듯싶었다.

"오늘 숯가마 갔다 왔으니 이제 한 달은 개운하겠는데요."
"어떻게 그것이 한 달씩이나 간데요. 농담도 잘하시네요."
"하하하."


▲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산 자락 아래서 찍은 사진이예요.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 걷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념 사진이라면서 힘을 보태 주었지요.
ⓒ 권성권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나와 함께 홍일점으로 끼어든 남자 집사님 한 분이 던진 농담이었다. 그만큼 숯가마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 효과야 얼마 가지는 않을 테고, 대신에 여기저기 쑤셔대는 뼈마디들이 덜 아팠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말이지 않겠나 싶었다.

오늘 함께 한 분들 모두가 다시금 숯가마를 찾아 여러 농담을 주고받더라도, 아무쪼록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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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반걸음만 앞서가라
이강우 지음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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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광고 한 편은 때론 지루한 영화보다 훨씬 낫다. 그만큼 찐한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물론 광고가 감동만을 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상품도 그만큼 잘 팔릴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광고의 본 목적인 까닭이다.


따뜻한 감동에다 상품까지 날개 돋친 듯 팔도록 하는 광고가 있다면 너나없이 좋아할 것이다. 그 상품을 내다파는 사주는 물론이요 광고주와 기획사도 그만큼 기뻐할 것이다. 그런 광고를 만드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니, 이강우가 그다.


“비록 몸은 쪼그려 새우잠을 자고 있을망정 꿈속에서는 망망대해를 헤쳐 가며 고래의 뒤를 좇고 있을 것이다. 그래, 꿈에서라도 고래를 잡아 보시게.”


그가 쓴 〈딱 반걸음만 앞서가라〉(살림·2007)는 책에 나오는 한 토막말이다. 이는 회사의 동료직원이 콘티를 짜고 스케치를 하다 새우잠이 들었는데, 그 모습을 두고서 그가 속으로 속삭인 말이다. 어찌 보면 안쓰러운 동료 직원을 향한 배려이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자기 자신의 옛 뒤안길을 돌이켜보는 그림자와 다르지 않겠나 싶다.


사실 광고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파는 직업이다. 달랑 광고 기획서 몇 장이나 콘티 몇 컷, 그리고 아이디어 스케치 몇 장만을 가지고 수십 수백억 원 대에 이르는 비즈니스를 성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자칫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천하의 사기꾼이 되기 쉬운 직업이다.


그 까닭에 늘 경쟁 속에서 살아야 되고, 누군가와 비교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늘 뽑히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가게 되니, 하루하루가 어쩌면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일 것이다. 그야말로 시시각각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광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새우잠을 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인생을 30년 동안 살아 왔으니 그만큼 이력이 날 법도 하다. 그런데도 그는 더욱 미친 듯 열성을 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 일에만 신명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 어찌 고래를 잡을 수 있겠는가?


“아름답지도 않은 것을 아름다운 척, 진실 되지 않은 것을 진실한 척 꾸미는 것에 싫증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106쪽)


이는 일본의 유명한 TV 광고 감독 ‘스기야마’라는 사람이 40대 중반에 목숨을 끊으며 한 말이라 한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목숨을 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프랑스 남쪽 해변에 내리쬐는 천연색색의 찬란한 빛깔이 그가 찍은 광고 작품 속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란다.


어찌 보면 그는 자기 작품에 그만큼의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요, 자기만의 색채를 잃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쏟은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도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강우는 그 감독의 불타는 직업정신만큼은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이강우 만의 몫이 아니라 이 땅에 직업정신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몫이지 않나 싶다.


그 까닭에 오늘도 그는 그만큼의 좋은 고정관념을 소비자들에 심어주기 위해 자기만의 색체를 띤 광고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만큼의 리딩 브랜드를 내세워 우뚝 세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30년간 전파광고에서 그가 거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비록 새우잠을 잘지언정, 남보다 색다르고 감동어린 광고를 반발 빠르게 만들어 낸 덕분이지 않나 싶다. 가히 깊이 본받아야 할 인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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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
김영실 지음 / 물푸레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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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을 농부가 과목을 접붙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염나무에 감나무 순을 접붙이면 뿌리는 고염나무로되 열매는 감이 달린다. 사람도 그 태어난 바탕이 좋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 위대한 사상에 접하고 감화를 받게 되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인간접목, 그것이 곧 교육이다.”


이는 한 평생 교육자로 살았던 김영실의 〈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강화도 마니산 산골 촌뜨기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교육자가 되었는지, 그 삶을 밝힌 스스로의 자서전이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흔히 말하는 산골 소년의 삶 그대로였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그는 또래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소에게 꼴도 먹였고, 초가을엔 논두렁에서 게 구멍을 살폈고, 콩서리와 참외서리 같은 것도 즐겼다. 고무로 된 축구공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새끼로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즐겨 차기도 했다.


그런 즐거움에 빠져들 무렵 신식학교의 길이 열렸다. 이전까지 해 오던 서당식 한문교육과는 달리 새로운 보통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서당에서는 마음껏 질문할 수 없는데 반해 그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를 묻고 또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도 초등학교를 기점으로 끝인가 싶었다. 배고픔과 학비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집들이 태산같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둘째 형의 도움으로 끝내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그 때의 경쟁률이 11대 1이었으니 그 스스로 큰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입학 후 인천에 있는 친구 집에서 통학하는가 하면, 친구와 자취도 해야 했고, 서울로 올라 온 동생과 함께 서대문의 기숙사에 입사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배제중학교를 끝마칠 무렵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에 가고 싶었으나 돈이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여러 방도 끝에 일본 유학의 꿈을 품었고, 당시 배제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던 아펜젤러 2세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그 분은 20원이 든 수표를 그에게 건네며, 큰 용기를 북돋아 줬다.


“가서 열심히 공부하게. 세상으로 날아가 꽃을 피우게.”(49쪽)


이른바 그때를 기점으로 김영실은 민들레 홀씨의 사명을 이어받았다. 민들레 홀씨는 그야말로 들판이나 재방, 길가나 자갈밭 그 어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생명을 터 나간다. 그처럼 그가 일본 본토 속에 들어가 유학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헤쳐 나가길 그 분은 바랐던 것이고, 김영실 또한 그 뜻을 고이 간직했던 것이다.


꽃다운 18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온갖 막노동을 했다. 처음 소개받아 간 곳은 하네다 공항이었다. 비행장 공사가 한창이었던 그곳에서 주로 철근이나 시멘트 그리고 앵글을 날랐다. 어떤 날은 슬레이트 공장에 나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땀 흘린 결과 1943년 4월에 눈물겨운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24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한국으로 귀국하여 학도병에 지원했다. 징집보다는 그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때 학도병에 함께 지원한 동료들은 대부분 만주 벌판을 지나 북지의 산동성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중국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끝내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광복을 맞이했고, 그들도 머잖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미군청정 상무국 물가과에서 근무하다가, 부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그 길이 교육임을 깨닫고 곧장 숙명여고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혼인한 후 서울고등학교에 재직했지만 6.25가 터졌고, 훗날 공군에 지원하여 항공병학교에서 근무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을 고민했고, 급기야 양을 키워서 온 국민에게 분양하기로 다짐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항공병학교 교관실장으로 군복무도 해야 했고, 충남대에 강의도 해야 했고, 집에서는 양들을 돌봐야 했다. 아내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가정 살림을 꾸려야 함은 물론이고, 내가 출근한 뒤 양들을 돌봐야 했고, 또 돼지와 오리도 길러야 했기 때문에 일거리는 산더미 같이 많았다.”(165쪽)


이 책을 펴낼 당시 86세의 김영실 총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평생 가난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배움의 길을 열고 달려 나아갔던 그. 이 나라의 가난을 뿌리 뽑기 위해 양 한 마리를 키웠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문일고등학교와 안양대학교를 세워 사람을 올곧고 바르게 세우려 애썼던 그.


그가 품었던 바람은 지금 이 땅에 민들레 홀씨가 되어 온 천지에 참된 생명력을 흩날리고 있다. 그에게 홀씨의 사명을 잇게 해 준, 평생에 잊지 못할 두 분이 있다고 하니 어린 시절 선원보통학교의 김재덕 선생과 배제학교의 아펜젤러 2세 교장선생이다. 그만큼 그 분들에게 많은 은덕을 받지 않았나 싶다.


모름지기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 법이다. 솜털 같은 갓 털에 둘러싸인 조그만 민들레 홀씨가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여린 새싹의 숨결을 내 밀듯이, 그것이 자라 또 다른 생명을 흩어 뿌리듯이, 우리의 삶도 김영실 총장처럼 누군가에게 빚진 삶을 돌려 주는 참된 홀씨처럼 살았으면 좋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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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놀이든지 간에 심판은 있기 마련입니다. 젊은 남자 집사님이 심판을 봤는데, 재밌게 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중에는 심판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길 것인가 그 생각만 하는 분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 권성권
지난주일 오후 무렵에 교회 식구들과 함께 윷놀이를 했다. 이른바 정월 대보름에 맞춘 척사대회였다. 물론 정월 대보름보다야 이레가 앞서긴 했지만, 20대 청년부터 80에 가까운 할머니들까지 어울린 마당이었으니 너무나 흐뭇하고 흥미진진했다.

보통 윷놀이는 나이 어린 사람들보다는 연륜이 많은 어른들이 곧잘 노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젊은 청년들은 경험이 부족하니 시작하자마자 떨어질 것으로, 그리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연륜이 많으니 쉽사리 상위권에 들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윷이 예전처럼 컵이나 잔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윷판도 정석대로 된 판이 아니라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옛날과 달리 요즘에 쓰는 윷들은 나무 막대기처럼 큼지막하다. 달리 기술이라는 게 필요 없는 것이다. 그저 그 나무토막으로 된 윷이 잘 굴러주고 잘 넘어주면 그뿐이다.

▲ 윷놀이를 이기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은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어머니와 그 딸이랍니다. 언뜻 보면 다투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재미 있어서 찍어 봤어요.
ⓒ 권성권
말을 놓는 윷판도 다르지 않다.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곳곳에 행운과 불행이 그려져 있다. 그래야만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는 까닭에서다. 흔히 '천당'과 '지옥'이라 표기해 놓는 게 그것이다. 그 까닭에 열심히 뛰어갔어도 '지옥'에 들어가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 되고, 중간쯤 다다랐는데도 '천당'이라는 지점을 만나면 금방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Back) 도'라는 게 있고, '한꺼번에 달라붙기'도 있다. 그 까닭에 '도'가 나왔어도 다음 차례에 '백 도'를 하면 말 하나를 끝낼 수가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에서 '한꺼번에 달라붙기'가 되었다면 그때까지 말을 쓰지 않는 모든 말들도 한꺼번에 그곳으로 붙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윷놀이 대회에 참여한 12개 팀 가운데 다니엘 남전도회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교회 자치 기관 중 한 팀이 우승을 한 것이다. 다른 모든 팀들도 엎치락뒤치락하며 순위권에 들어서려고 열심히 경합을 벌였지만 끝내 그 팀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물론 옛날과 달리 왠지 모를 행운에 더 기대려는 마음들 때문에 그 윷놀이의 뒷맛이 조금은 씁쓰름했다.

▲ 윷놀이는 젊은 청년과 나이 많은 어른들이 함께 하는 게 제 맛이 아닐까 싶어요. 청년팀이 잘 되었는지 한 청년이 환호성을 보내고 있고, 그 옆 할아버지 뻘되는 분도 그저 넉넉한 웃음으로 화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참 보기에 좋고 흐뭇한 윷놀이 대회였어요.
ⓒ 권성권
그런데 그런 씁쓰름한 뒷맛이 교회 안에 보다는 교회 밖에서 더 두드러지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된다.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들 가운데 옛날처럼 우직한 소처럼 살아가는 이들보다는 요즘같이 행운만을 바란 채 윷판의 행보를 뒤쫓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윷 패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순리를 쫓아 살아가기보다는 '천당'이라는 좋은 지점만을 바라본 채 말처럼 빨리 출세하려는 크리스천들도 많이 있다. 분명 남보다 늦게 출발하였으면 남보다 늦게 좇아가면 될 일을 먼저 앞서나가려는 것 때문에 가끔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분명히 윷 패와 윷판의 짜임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보폭은 생각지도 못하는 크리스천들도 부지기수다. 어울림이라든지 조화라는 말은 왠지 딴 세상에서나 있음직한 일로 여기는 꼴이다. 거기에 어찌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의 명분이 깃들겠는가?

모름지기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기에 윷놀이만 한 놀이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자칫 윷놀이가 '행운'과 '천당'만을 바라는 놀이로 변질된다면 왠지 그 뒷맛은 개운치 않을 것이다. 놀이는 놀이로서 끝내야하겠지만, 자칫 윷놀이를 인생처럼 즐기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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