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 - 우리 시대의 23가지 쟁점과 성서적 해법
차정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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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당장 4월 총선에 공천한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대부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듯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몸을 담으면 부패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헌데도 여당과 야당은 그 맛에 오래도록 깃들어 있는 정치인을 또 내 보낸다. 그러니 우리사회에 부정부패가 끊일 리가 있겠는가.

양극화는 또 어떤가? 우리나라 국민가운데 상위 10%가 우리나라 사유지를 86%나 독점하고 있다. 더욱이 상위 10%가 국가의 부를 75%나 소유하고 있는 지경이다. 그에 비해 정신질환자는 278만 명, 도박중독자 360만 명, 매춘부 120만 명, 절대빈곤 아동 100만 명, 가출 청소년은 50만 명, 잠재적 신용불량자를 합친 신용불량자 780만 명이다. 거기다가 비정규직 노동자 850만 명이다.

교육은 또 어떤가? 올바른 인성과 창의적인 교육은 실종된 지 오래다. 그저 좋은 대학만 합격하면 최고로 친다. 요즘은 담임선생님들도 무척이나 힘들어 한다. 잘못을 했으면 매를 들고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것마저 맘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어찌 나라의 미래가 밝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이런 상황인데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살까? 크리스천들이야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가 구현한 삶을 토대로 사는 게 옳을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께서 원하신 가치와 진리를 실천하는 삶 말이다. 헌데 그 거리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답답하고 또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그 심정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다.

차정식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쟁점과 그에 대한 해법을 예수의 관점으로, 성서적 관점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예수라면 과연 한국사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처방할지, 그 관찰과 대안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우리사회의 '정치'와 '복지'와 '양극화'와 '가정'과 '집'과 '교육'과 '자살'과 '생태보존' 등 23가지 사안들이 들어 있다.

"제 영광을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심리로 불거진 좌우편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도의 관심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제자도의 삶은 곧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종의 자세로 대가 없이 남을 섬기는 이타적인 봉사의 길이었다."(191쪽)

이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일등 지상주의를 꿈꿨던 '요한'과 '야고보'에 대한 예수의 교정과 대안에 관한 것이다. 차정식은 예수의 교육이 '경쟁보다는 관용'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이 곧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 주는 섬김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품는 관용에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제자들 가운데서도 변절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한국사회의 교육은, 심지어 크리스천들의 교육은 경쟁과 자기욕망만 난무한 풍토이지 않는가. 그것은 정부요직에 앉아 있는 공무원들과 해외에서 유학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자녀만 봐도 명확하다. 물론 그 속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아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이 주축이 되어 경쟁사회의 물꼬를 주름잡고 있으니, 어찌 예수가 한탄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공사중인 4대강은 끔찍하게 파헤쳐지고 온갖 생명체를 난도질하면서 성급하게 재구성된 인공의 연못으로 변화중이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변화할 텐데 이렇게 급조하여 인간의 편익에 봉사하도록 변화시키는 게 무엇이 나쁘냐는 항변이 들려올 법도 하다."(263쪽)

이는 자연과 소통하는데 힘을 썼던 예수의 관점으로 바라 본 4대강 공사에 관한 신학적 진단이다. 차정식에 따르면 그것은 인공적인 문명의 장식적 가치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는 자연의 생래적 아름다움을 더 높이 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인간의 방자한 자유로 벌여 놓은 난장판들을 예수의 '치유사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사기와 폭력을 비롯하여, 다문화사회, 종교 근본주의와 다원주의, 타락한 성전과 성직, 그리고 남북문제 등 그의 신학적인 단상들이 많이 담겨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풀어 쓴 말들 가운데 난해한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추구하는 예수의 사고와 관찰은 정말로 좋은데 너무 건조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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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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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둘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함께 다녔던 어린이집도 이제는 셋째만 데려다 주면 된다. 그런데 오늘 녀석과 함께 가는 길목에 녀석이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어 몇 마디를 내게 자랑해 보였다. 한 쪽으로는 신기하면서도 또 한 쪽으로는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과연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기영어교육을 받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가 영어를 우리말처럼 사용할까? 그 아이들이 초중고를 나오고 대학입시를 보고 직장인이 되어서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걸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이들 모두가 영어를 쓰는 건 아닐 테고, 오직 영어를 필요로 하는 이들만 쓸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동사무소에서 주소를 이전할 때나 여권을 만들 때도 이름 석 자만 영문으로 쓰면 된다. 은행에서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전담 직원 한 명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대형 우체국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심지어 우리나라의 정부 부처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필요로 하는 몇 몇 직원만 영어를 잘 하면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이상한 흐름을 타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영어조기교육이 광풍이고, 초등학교에서 국어선생을 뽑거나 심지어 공무원시험에도 영어시험이 필수다. 실제 생활에서 쓰는 이들은 제한돼 있는데도 모두가 영어에 미쳐 있는 꼴이다. 마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처럼 유교경전을 달달 외우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합격하면 영어는 써먹지도 않는데 마치 계급장을 딴 것처럼 특권행세를 부리지 않던가?

남태현의〈영어 계급사회〉는 그 현상이 우리나라가 미국을 숭배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세계화의 논리가 그것이다. 영어만 배우면 우리도 미국처럼 강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2011년 3월 현재 미국 정부가 중국에 빚진 돈은 한국 돈으로 1조 2,865억 원이고, 미국 재정은 갈수록 악화될 것이고, 냉전 당시와 달리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고 한다.

더욱이 영어는 세계 공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쓰는 언어는 중국어로 약 10억 명이 쓰고, 그 다음은 스페인어와 영어로 약 3억 명, 인도의 힌디어와 아랍어를 약 2억 명, 러시아어와 일본어를 약 1억 4천 명 정도 쓰고 있고, 유엔의 공식 언어도 아랍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프랑스 등 여러 가지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모두 영어에 미쳐 있다. 조기교육을 비롯해 조기유학까지, 대학입시제도와 어학연수와 취업시험까지 모두 영어가 도배하고 있다. 과연 그런 교육과 제도를 통해 우리 모두가 혜택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다. 돈은 그만큼 쏟아 붓지만 우리나라의 영어실력은 세계에서 하위다.

그렇다면 영어광풍의 진정한 수혜자들은 누구일까? 남태현은 영어와 관련된 산업자들, 이른바 우리나라의 기업화된 영어학원이 그 첫째요, 둘째는 토플과 토익 시장의 최대 물주인 ETS, 셋째는 한국의 학원사업에 투자하고 외국의 투자자들이라고 한다. 거기에다 또 하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유학생들이 미국에까지 가서 먹여 살리는 미국의 대학들 말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두 가지 대책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구체적인 정책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국가경영 차원의 문제입니다."(194쪽)

남태현이 말하는 구체적인 정책과 국가경영 차원이란 무얼까? 우리나라 정부가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로 하던 제도를 바꾸는 것, 외국의 학생들을 많이 유치하는 대학들에게 높은 평가점수를 줬던 제도를 바꾸는 것, 그리고 대학입시도 영어 대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외국어를 선택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해도 콧방귀도 안 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영어로 계급화된 사회를 밀어붙이고 있는 이들 말이다. 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그런 정책적인 변화는 진정으로 필요한 대안이다. 그것만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나중에 써 먹지도 않을 영어 때문에 골몰해야 할 이유도 없고, 영어 광풍의 수혜자들에게 괜한 돈을 싸질러 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 때부터, 그리고 대선 때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백성들에게 참된 것을 일깨워주고 또 되돌려 주었듯이, 우리나라도 영미숭배정책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또한 여당과 야당에서 당리당략으로 집값을 안정화시키겠다고 여러 공약들을 내세우지만 그것들은 해가 바뀌면 수시로 달라질 일들이고, 진정으로 집값을 잡으려면 입시제도와 대학정책만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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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예수 - 어떻게 우리는 2천 년 전 인물을 지금 만날 수 있는가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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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세기 계몽주의는 신학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에서 인간 예수로 분리해 내는 시도가 그렇다. 예수의 일생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조명하는 붐이 일었다. 그로 인해 예수는 유대인 혁명가였고, 십자가에 처형되자 제자들이 그를 신격화했다는 주장도 폈다.

그것이 타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그 뒤에는 사(四)복음서를 놓고서도 역사와 신화를 떼어내는 연구가 진행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 싼 '역사적인'(historical) 부분과 '신화적인'(mythical)부분들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그거였다.
왜 그런 신학적인 작업을 한 걸까? 고백의 차원에 머물던 신앙심에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존의 규명을 먼저 밝혀내고픈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 시대의 예수는 누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너무 앞서나가면 본질에서 이탈하기 마련이다. 역사적 예수에 외골수로 매달린 신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를 유대 혁명자로 간주하며, 기독교는 초기 제자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신약성경의 사(四)복음서도 초기기독교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위해 쓴 '문학작품'이라고 강론한다.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는 그와 같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한다. 이제까지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부인하고, 지난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가 성서 속에 있는 예수보다 더 믿을만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한 방 펀치를 날리는 격이다.
"최근 유사한 전제로 다시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도 복음서의 다양성을 없애려 한다. 이번에는 수세기 동안 신앙인에게 가장 가치 있었던 복음서의 특징, 즉 부활에 비추어 예수를 해석하고 증언하는 것이 '역사적 진리'에 부적합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학자들은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말씀'과 '행위'의 단면만을 그 설화에서 발굴해 낼 수 있으며, 그것만을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가?'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재구성이야말로 '더욱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석 구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므로 사실과 더 일치하며, 불일치 요소가 제거되었으므로 더 일관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163쪽)
이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에 관한 허점을 찌르는 대목이다. 케네디나, 히틀러나 데레사 수녀도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를 인식하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필름 조각 더미가 한 편의 영화가 될 수가 없고, 짧은 에피소드를 수집한 것이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도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은 예수를 하나의 모형으로만 확정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성경을 창밖으로 던지게 만드는 꼴이고, 신약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는 모순을 범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존슨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사(四)복음서에 기초한 예수에 집중하는데 반해 그는 바울서신과 일반서신도 눈여겨본다. 바울 서신 같은 경우는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확신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건대 한 인물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다. 때로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한다. 예수에 관한 칭호도 선생, 메시아, 왕, 예언자, 제사장, 주님, 인자, 하나님의 아들, 말씀, 재판관, 보혜사, 증인, 친구 등 너무나 다양하다. 또한 예수에게 적용된 은유와 비유도 양, 목자, 문, 포도나무, 빛, 빵, 물, 피, 성전, 영, 닻, 돌, 건축가 등 복합적이다.
그런 호칭과 은유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친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드려내려 했던 것은 지극히 적다. 그만큼 예수가 갖고 있는 면은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걸 언론에 비추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이 항상 예수를 묻고 답한 것이지, 예수가 항상 언론에 답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구전과 전승도 그와 같다는 뜻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으면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을 한 방 날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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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 영화 <더 그레이>의 메인포스터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오늘도 생과 사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 언제 어디서 단속반이 몰려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며 장사하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그렇고, 링거 하나로 목숨 줄을 연명하는 병원 입원 환자들이 그렇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그렇다.

자유시장체제, 글로벌시장경제, 한미FTA, 그 모두가 물고 물리는 게임과 같은 살벌한 체제 아니던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쓰러트리고 심지어 다시는 발 딛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는 약육강식의 짐승과도 같은 틀이 그것이다. 스님으로 살다가 격구에 뛰어들겠다던 드라마 〈무신〉의 김준도 그렇지 않던가. 그 앞에 신(神)은 철저히 배제당하고 만다.

리암 니슨 주연의 〈더 그레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살다보면 여러 지대를 만날 수 있지만 대부분 두 가지다. 대자연 속에서 생명이 넘실거리는 풍부한 녹색지대, 그리고 온통 죽어가는 사람들이 쌓이는 흑색지대가 그것. 영화는 그 속에서 삶의 끈질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리얼하게 연출한다.

영화에서 죽음을 부르는 공포는 두 가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의 혹한, 그리고 숲 속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리고 있던 늑대들. 생존 본능이 강한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혹한도, 그 어떤 짐승 떼도 곧잘 물리치곤 한다. 그게 대부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승리이자 감동의 드라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영화는 절망만 끌고 간다.

최초 비행기 추락사고로 살아남은 이들은 7명이었다. 한꺼번에 절반가량이 죽어난 것이다. 그 뒤 눈보라 속에서 불침번 서던 1명이 늑대에게 물어뜯기고, 그곳에서 이동하다가 또 1명이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저산소증을 앓던 1명, 낭떠러지를 건너다 1명, 강가에서 1명이 낙오자로, 그리고 늑대를 피하려다 물속에서 또 1명이 죽는다. 결국 프로페셔널 가드인 오트웨이만 살아남는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잔인하지 않다면,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마지막 희망이라도 보여주려 했다면, 주인공만이라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마저도 늑대와 사투를 벌이다 죽음으로 끝을 낸다. 물론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늑대가 죽었는지, 정확하게 밝히 않고 희미하게 처리한다. 그를 구출하러 헬기가 뜬 것도 아니고, 강가 가까이에 오두막이 보이지 않았으니, 관람객들 모두는 그가 죽었을 것으로 단정할 것이다.

조 카나한 감독은 과연 이 영화를 공포영화로만 처리하려 했을까? 단순히 늑대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여운으로 남길 작정이었을까. 정확하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그 두 가지를 하나로 묶기 위해 실은 늑대라는 짐승을 투입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 비행기추락 이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어설픈 위로의 기도를 올렸다. 이동 중에 늑대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신에 대해 논쟁한다. 물론 주인공 오트웨이는 오직 폐 속에 품어 나오는 차디찬 공기만이 실재라고 강조한다.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그 현실을 마주한 인간뿐이라는 것. 그것이 신을 철저히 배제시킨 이유다. 오트웨인도 마지막 호소에서도 그렇게 읊조렸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주여, 제발 이러지 마소서. 이번에 도와주면 죽을 때가지 믿겠나이다. 그래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 할 거야. 그래 내 힘으로 살아남을 거야."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알래스카의 고단한 작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향하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처와 자식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족쇄는 생의 인연을 끊을 정도로 고단하다. 영화 첫머리에서 주인공 오트웨이가 총으로 자살하려는 것도, 강가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생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던가.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절망의 족쇄는 한 순간 짐승의 밥이 되어 죽는 것보다 더 독한 공포였던 것이다.

"살아 돌아가면 또 다시 밤새 기계 돌리고, 술만 푸고 살아야 할 것 아냐?"

가까이 살고 있어서 종종 듣는다. 청계천에서 노점상도 하고 상가를 얻어 일하고 있던 이들이 가든 파이브 하나만 믿고 모든 주권을 내 줬다가 졸지에 낭패를 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또 멀리 있어도 그런 소식도 듣는다. 재벌의 탐욕에 갈기갈기 찢겨진 정리해고노동자들이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함께 뭉쳐 살아갈 해법을 찾는다고. 바로 그들이 살얼음판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늑대는 아득한 공포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는 현실 세계의 재벌들이요, 자유시장체제요, 글로벌시장경제요, 한미FTA 체제를 굳히려는 정치권력들이다. 이러한 때에 신의 실존에 대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노동자들의 족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삶의 해법이 없는 것보다 더 지독한 공포가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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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크랩의 파파 기도 - 전에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도
래리 크랩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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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얼레고 달래서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좇아 세상을 살아갈 힘을 구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실현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함축돼 있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물론 어린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미신처럼 숭배한다. 기도도 그 수준에 머물러 하나님께 간청만 하고 끝내버린다. 온통 자기 욕구를 아뢴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응답을 받으면 기뻐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면 못내 씁쓸해 한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한다. 그만큼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그로 인해 A를 구했을 때 A나 B나 C를 응답받아도, 또는 무응답을 받아도 감사하며 산다.

제자 하나가 기도에 관한 책을 보내왔다. 전주태평교회 시절의 중고등부 제자였는데 지금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섬기는 선생이다. 그가 보내 온 책은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였다. '파파'라고 하니 언뜻 생각하기를 '아빠'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아버지를 향한 기도가 파파 기도요, 무언가를 간청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기도인 까닭이다.

"파파 기도는 내 영혼에 하나님이 기쁘게 채워 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며, 나의 내면 세계에 잔뜩 쌓아 놓은 쓰레기를 청소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분의 진실(reality)로 나를 채우시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부어 주신 거룩한 에너지와 지혜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도 파파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40쪽)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란 나를 비우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이루고픈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를 내어 놓는 일이다. 그때 그 분이 내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그 힘과 지혜로 수평적인 삶도 잘 엮어나갈 수 있다. 이른바 '십자가의 도'를 이루는 기도가 그것이다. 크랩은 그와 같은 파파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을 네 단계로 제시한다.

"P: 자신을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라(Present).

A: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의주시하라(Attend).

P: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 놓으라(Purge).

A: 하나님을 당신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라(Approach)." (109쪽)

이 책 뒤쪽에서 크랩은 4분짜리 파파 기도를 실제적으로 소개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도할 수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게 기반이 되면 매 순간순간 파파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사항은 그것이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위에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1순위'로 올려드리는 기도여야 함을 강조한다.

사실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여러 이미지를 품고 있다. 바쁜 왕, 시계공, 자동판매기, 근엄한 아버지, 또는 잔인한 폭군과 같은 여러 유형들 말이다. 이른바 하나님은 세계 70억명을 다 둘러봐야 하는 바쁜 왕이거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뒤 잘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시계공이거나, 뭔가 요구하면 뚝딱 쏟아줏는 분, 혹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아버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속에 각인돼 있는 잔인한 군주 등이 그 모습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와 같은 유형들 외에 몇 가지 모습을 더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친근한 아버지, 다시 말해 모든 것에 부족함 없으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 말이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이제부터라도 자동판매기를 연상하는 기도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과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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