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의 거짓말 - 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
최경영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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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그 권력을 무력화한 것은 시민의식과 행동에 있었다. 요즘 권력은 언론에서 나온다. 언론은 권력을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한다. 권력과 언론은 똘똘 뭉쳐 살아간다. 점점 더 공룡화 되고 있다. 돈도 그 속에서 삼각편대를 그리고 있다.

 

9시 뉴스는 어떤가? 깨어 있는 집단 지성들은 KBS와 MBC가 정권의 나팔수로 변했다고 말한다. 사실일까? 전두환 정권 시절과 현 정권, 그리고 지난 10년의 정권을 비교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정부의 뜻을 반영하는 보도가 많다. 그 전에는 대부분 반박하는 투였고. 전두환 정권 때는 어땠을까? '땡전뉴스'가 주류였지 않던가.

 

언론은 말 한 마디로 백성을 요리한다. 더욱이 방송 언론은 무지몽매하다는 백성을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게 만든다. 모두가 그들이 꾸며내는 전투적인 언어나 미사여구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큰 것은 경제문제에 관한 것이다. 경제대통령,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란 것도 그 일환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보수 언론사들이 '대량감원'이나 '대규모 실직'이란 말을 안 쓰는 게. 그 보다는 '구조조정'이란 말을 곧잘 쓴다. 왜 그럴까? '해고'와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물타 보려는 이유일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쓰던 '세금파탄'도 이 정부 들어선 없다. 모두 언론에서 조작하고 있고, 권력에 기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최경영의 〈9시의 거짓말〉은 워렌 버핏의 눈으로 들여다 본 한국 언론의 현 주소를 들여다 보게 한다. 주식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버핏의 발언과 9시의 뉴스 보도가 얼마나 엇갈리고 있는지 비교 분석해 준다. 그걸 통해 알리려는 게 뭔가? 한국 언론사의 심각한 상황과 그 돌파구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버핏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 언론은 항상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단다. 버핏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 것을 짐작하고 있지만, 한국 언론은 자신들이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다. 버핏은 이상하면 질문을 하지만, 한국 언론은 이상해도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다. 버핏은 자신이 보는 재무제표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지만, 한국 언론은 그들이 쓰는 기사는 사실만 있다고 강조한단다.

 

"도대체 무엇이 '국가의 이익'인가요? 대기업의 사주나 집권 여당의 이익이 항상 국가의 이익과 등치 관계인가요? 정부에 대한 시위는 항상 국익을 저해하나요? 그럼 1987년 6워 항쟁 역시 국익에 반했던 것이고 그로 인한 대통령 직접 선거 쟁취도 국익에 치명타였겠군요?"(36쪽)

 

어떤가? 한국의 주류 언론사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는가. 요즘도 국가의 이익과 사주의 정책에 무조건 뒤따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음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이 책에서 지적하는 걸 그대로 토해 내는 것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방송 언론들이 예전보다 더 앵무새 노릇하고 있지 않을까. 한국 방송 언론은 김탁구처럼 완연한 제빵사 보다는 노점상의 풀빵사 노릇에 더 제격이고, 기득권층의 애완견과 확성기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방송사들이 보여준 태도를 배워야 할 것 같다. 한때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걸 두고 미국의 방송사들이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검증하려 했다고 한다. 그가 숨겨온 것들을 파헤치려는 이유였는데, 그때 부시는 그들이 무례하다며 나가버렸다고 한다. 물론 그 방송사들은 부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도했다고 한다. 얼마나 감동스런 모습이며, 또 얼마나 망신살 뻗친 노릇이라고 이야기할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다. 미국의 부자들이 한 해 기부하는 금액이 3천억 달러라고 하는데, 우리 돈으로 약 350조 원이라 한다. 미국의 주식부자들도 그들의 배당금에서 20%는 세금으로 내고 있고, 거기의 20%는 양도소득세로 낸다고 한다. 진짜로 멋진 부자들 아닌가. 우리나라의 주식부자가 과연 그런 정책의 동의할까? 그걸 두고 우리 방송사들은 또 뭐라 말할까? '부자세'라고 하며 야단법석이지 않을까.

 

KBS 기자 출신인 최경영은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한다. 1980년대의 방송뉴스를 디지털화해서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고. 그 때에만 일반 대중들이 한국의 방송 언론이 걸어온 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걸 만들려면 약 10억 정도 든단다. 그런데 그것이 있어야만 한국의 방송 언론은 권력과 분리된 바른 역사적 소임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그는 일반 대중들이 좀 더 똑똑해졌으면 하고 주문한다. 언론사들이 선점하는 언어도단에 대중들이 놀아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것이다. 제 아무리 똑똑한 대통령이라도 결코 한국의 경제를 예측하거나 책임질 수 없다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그만큼 한국의 방송 언론은 대중의 필요 사안보다 대중의 관심사에 집중하고 있으니, 일반 대중들은 그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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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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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과 인터넷 카페에서 리뷰어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그곳 주인장들은 다양한 리뷰어들을 불러 모은다. 리뷰어들이 책을 읽고 쓴 글들을 통해 다양한 소통 양식을 찾으려는 이유다. 당연히 종이책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과 그 판매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한계가 있다. 단순한 책 홍보 수준에 그치는 게 그것이다. 그 때문에 책에 대해 칭찬일변도로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을 고민하고 극복하고자 시도한 책이 나왔다. 도서포털 사이트 리더스가이드(readersguide.co.kr)가 기획하고 김보일·김용찬 외 여러 아마추어 책벌레들이 쓴〈100인의 책마을〉이다.

이 책은 틀에 박힌 서평을 뛰어넘는다. 책에 대한 지식과 자기 삶에 관한 에세이로서 '책세이'(Book-essay)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책에 대한 100자평의 촌철살인도 들어가 있다. 이른바 '책수다'(Book-talk)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기존의 리뷰가 주는 식상함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웹 2.0의 형태에 어울리는 책 소개라 할 수 있을까? 

특히 '책수다'는 어느 리뷰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리더스가이드가 오랫동안 누적한 도서 콘텐츠만의 결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서평 속에 흐르는 소통의 고리를 하나의 주제로 연결한 것이다. 결국 여러 사람이 하나의 소통 창구로 모여들어 여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셈이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책 속에서 가장 많은 책을 언급해 놓고 있는 게 다치바나 다카시의 <지의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누군가 410권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100인의 책마을〉에서는 그보다 20권 이상 더 많이 등장한다. 그 모두가 국내에서 출판된 책이라고 하니,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을 것이다. '100'이라는 숫자가 나름대로 상징성을 갖는다면 이 책은 100인 100색의 토크(talk)라 할 수 있다.


"'책을 말하되 책만을 말하지 않는다. 잘나지 않은 평범한 나도 책을 소개할 수 있다. 내가 빠져든 특정 분야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 독서는 곧 생활이므로, 내 삶과 독서 경험을 잘 버무린다.' 이런 원칙들을 바탕으로 이 책은 만들어졌다. 어쩌면 위의 원칙을 모두 충족시키는 글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마추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저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이 돼서 덤비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서 덤비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것이 진정한 아마추어리즘이다."(책머리에)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와 〈14살 인생멘토〉를 쓴 배문고등학교 김보일 선생은 한 때 친척의 빚보증으로 인해 황폐해졌다고 한다. 살도 찌고, 스타일도 구겨지고, 체력도 고갈될 때로 고갈되었다고 한다. 그때 인생의 탈출구로 삼았던 게 바로 마라톤이었다 한다. 

그토록 힘든 시절을 통과한 그에게 조지 쉬언의 〈달리기와 존재하기〉와 요쉬카 피셔의〈나는 달린다〉는 어떤 책으로 다가왔을까? 단순히 체력 증진서였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김보일 선생에게 고통을 이겨내도록 힘을 북돋아준 인생동반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세이가 끝나는 지점을 잇고 있는 책수다의 주제도 '고통을 이겨 낸 삶의 에세이'로 잡고 있는 것이다.

"〈운명이다〉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이다. 이 책은 '사후 자서전'이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노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자서전을 쓸 요량으로 조금씩 썼던 것을, 사후에 엮어 낸 것이다. 그 분은 이 책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자서전'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한 나라의 국가 원수를 지낸 분의 '성공하지 못한'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즉 국가 원수든, 농부든, 환경미화원이든 그 사람이 성공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들려줄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서전을 쓸 수 있으냐 없느냐를 결정한다."(87쪽)

이는 '삶이 어떻게 책이 되는가'에 나오는 한 대목 글이다. 리더스가이드에서 stella09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장부가 쓴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장을 쓰고 있다는 그녀는, 나를 비롯한 세상 여러 독자들에게, 자기만의 가치 있는 스토리를 쓸 것을 부추긴다. 

그것이〈운명이다〉를 읽고서 그녀 스스로 '눈물로 읽은 자서전'이었다고 밝힌 이유였을까? 그리고 그것을 안대회의 〈정조의 비밀편지〉에 견주고 있는 것일까? 아마추어 책벌레인 그녀가 한 시대를 책임졌던 분들의 일기와 편지를 비교하여 자기 생각을 곧추 세운 이유가 뭘까? 자기 삶을 가치 있게 건져 올린 자만이 이유 있는 자서전을 쓸 수 있다는 까닭일 것이다.

아무쪼록 여러 책에 대한 비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삶과 가치판단을 함께 농축시키고 있는 〈100인의 책마을〉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이 함께 호흡하고 함께 소통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책을 통해, 이 책의 각 꼭지마다 이야기하고 있듯이, 책이 삶을 변주하고, 책이 세상과 관계 맺고, 책이 아름다운 문화와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들을 추적해 봤으면 좋겠다. 웹 2.0의 형태의 책세이와 책수다는 거기에서부터 기초를 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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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6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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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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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만들어진 신이 아니다. 다만 그를 둘러싼 철학적 사유와 종교제도가 변질된 예수를 그려냈을 뿐이다. 그의 행적과 가르침은 실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요, 후대의 사변적인 논쟁들과 교권주의 정치체계가 그의 진리와 생명을 흐려놓은 것이다.

 

예수를 둘러싼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는 그의 행적과 갖가지 기적들이 잘 그려져 있다.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는 도마복음과 같은 외경 속에도 진지하게 드러난다. 역사가 요세푸스와 여러 초대교부들의 글에도 그의 실체와 가르침은 신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가 실재하지 않았던들, 그의 가르침이 뜬구름 잡는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었던들, 결코 그의 가르침이 계속 전수되기는 만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실체가 가공된 것이거나, 그의 행위와 가르침이 꾸며낸 게 아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에 태동된 기독교를 둘러싼 철학적 사유는 여러 가지 분파와 이단 시비를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녔던 로마가톨릭교회는 살아생전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행적과 가르침을 숱하게 왜곡시켰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쓴 〈그리스도 철학자〉는 바로 그와 같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는 예수의 삶과 메시지와 가르침을 통해 종교적인 차원이나 도덕적인 윤리 논쟁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 곧 사랑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토록 엄청나게 혁명적이었던 이 메시지가 이후 뒤따르는 어떤 시대에는 그 메시지를 전달할 책임을 진 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변질되었고 왜곡된 적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필자가 이 책의 본론에서 보여주게 될 것들이며, 기독교의 역사와 서양 근대성의 출현에서 그것이 담당한 역할은 종합적인 방식으로 변경될 것이다."(프롤로그)

 

여기에서 말한 '책임을 진 자들'이란 로마의 국교를 인정한 콘스탄틴대제로부터 교권주의적인 권력을 통해 예수의 본질을 변색되게 한 여러 지도층 인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그것은 기독교의 탄생 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철학적 사유로서, 그리스도의 가현설과 양자론, 그리고 단일신론과 양식론 등 여러 분파를 형성케 한 일이다.

 

물론 그런 철학적 논쟁과 분파 형성으로 정통적인 교리를 보호하고 채택하는 좋은 결과도 도출되지만, 그 사유가 권력층의 지지기반을 더 확고히 해 주는 부산물이 되기도 했다. 정통교리 자체가 교회권력을 유지하는 데 대한 시녀로 전락한 게 그것이다. 십자군 전쟁과 마녀재판 그리고 면죄부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 제도의 증명서를 가지고 정식으로 이루어진 매매였다. 교회는 스스로 성스럽고 흠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신자들에게 내세에서 고통을 감면당할 수 있음을 보증했다. 부자들이여 평안하라! 하늘나라는 그대들의 것이니 말이다!"(200쪽)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둘러싼 인간의 철학적 사유가 어느 정도까지 괴이한 현상을 자아낼 수 있는지, 그것이 정치권력과 손을 맞잡을 때 얼마만큼의 무서운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깊이 각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일들이 예수의 원 행적과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들임을 자각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유럽의 제국주의적인 기독교의 틀을 여전히 세계 속에 확장하려는 교권주의는 아직도 오염된 중세기적 잔재라 할 수 있고, 보편타당한 종교를 지향하는 일들마저도 정통교리라는 잣대로 마녀 사냥식 재판을 벌이고 있는 일들은 아직도 중세의 소아기적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책을 쓴 그는 교리나 집단적인 외적 종교심을 부각시켰던 예전 일들로부터 이제는 개인적인 내재적 영성을 고취시켜야 할 때요, 그것은 인간존재에 대한 동등한 관심사인 사랑을 통해서만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드러나는 일들로서, 그때 예수는 그 여인을 통해 제도권 교회를 뛰어넘는 참된 진리를 전해 주었고,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참된 사랑의 길도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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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아이들의 행복한 시골살이 산촌유학 - 초등 한 학기, 내 아이 산촌으로 유학 보내기
이현숙 지음 / 노브16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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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너도나도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다. 자기 주도권도 없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흘러할 뿐이다. 늘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아야 하니 차근차근 생각해 볼 거리도 있지 않다. 그야말로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사육당하고 있는 꼴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어떠할까? 대부분 해외 유학길에 오르는 추세다. 미국이나 호주, 말레시아나 중국으로 등지로 엄마와 함께 떠난다. 아빠는 나 홀로가 되어 국내에서 돈을 벌어 부쳐 주는 또 다른 기계 부품이 된다. 그 일로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도 종종 벌어진다.

 

이러한 때에 아이들이 자기 주도권을 확립하면서도 국내에서 유학할 수 있는 과정을 담아 낸 책이 나왔다. 도시 아이들의 행복한 시골살이를 담아 낸 이현숙의 〈산촌유학〉이다. 이는 이전의 대안학교 차원을 뛰어넘어 좀 더 끈끈한 가족구성원과 같은 관계를 엮을 수 있고, 시골 학교 학생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유학을 떠나보낸 부모들도 정한 때에 만날 수 있는 이로움들이 있다.

 

"산촌유학은 기숙사 생활과는 또 다르다. 시골의 작은 집에서 아옹다옹 지내며 옹기종기 모여 한솥밥을 먹다보면 너와 내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형제의 정을 나누다. 유학생활 처음에는 집에서 가져 온 책이나 연필, 공책 등 자기 물건에 대한 소유 개념이 강했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 젓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자유로워지고 유연해진다. 함께 살다 보니 자기도 형이나 누나, 동생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고 서로 나눠 쓰고 베풀고 양보할 때 마음이 편안하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110쪽)

 

서로 남남이던 아이들이 한 집에서 대 여섯 명 씩 가족을 이루어 살다보니 친형제자매와 같은 끈끈한 정이 흐른다. 함께 시골학교에 유학을 떠나왔으니 함께 기대고 기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나눠 쓰고, 없는 것은 더욱 아껴 써야 할 판이다. 어쩌다 시골 장터로 나들이를 가면 필요한 것만 골라 산다고 하니, 비로소 자기 주도권을 확립한 셈이다.

 

산촌유학이 주는 이로움은 또 있다. 도심 속 꽉 찬 콘크리트 문화에 주눅 든 아이들은 산과 들에서 맘껏 활개를 친다.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자유만만이다. 뭐든지 자연에서 얻는 것으로 먹고, 싸고, 뿌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니 순환의 법칙도 자연스레 깨우친다. 나무 의자를 비롯해 된장과 간장과 많은 효소들도 손수 만들어 먹으니, 그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할 때는 일하는 것만, 책 볼 때는 책 보는 것만, 식사할 때는 식사하는 것만, 놀 때는 노는 것만 생각한다. 이른바 산촌유학의 가훈인 셈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스스로 이불 개고 옷 갈아입고, 산책과 운동 후 방을 정리하고, 어른이 말할 때는 잘 귀담아 들어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식사 후에는 3분 이상 이를 닦고, 저녁식사 후에는 학과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쓴 다음 명상을 하고, 휴대폰과 MP3와 게임기는 사용치 않고, 컴퓨터는 인터넷 검색으로 자료만 찾도록 한단다.

 

이 책 뒷부분에는 산촌유학을 체험한 학부모들과 아이들의 감동이 담겨 있다. 모두들 아이들의 뿌리를 튼실하게 뿌리내리게 해 준 계기였다고 말한다. 뿌리가 튼튼하니 분명 그 열매도 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산촌유학이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그저 훗날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열어나가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 그때 품어 나올 수 있는 '자기 에너지'를 축적하는 발판으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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