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종류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에 대한 시기일까, 아니면 현란한 상술과 번번히 그에 넘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일까. 그러나 지금 나의 관심이 관심이니만큼, '나 이렇게 내 꿈으로 달려가고 있수'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글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충동적으로 선택했다.
<나나 너나 할 수 있다>는 금나나의 반쪽짜리 자서전이다. 반쪽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니 군더더기도 많고 집중력이 분산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그 속에서 몇 가지 알맹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항상 만족한다. 몇몇, 금나나의 주관이 뚜렷하게 문자화된 부분이나 가슴을 찔러오는 인용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본문 83쪽에 '에디슨은 99퍼센트 노력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40~50퍼센트 정도의 노력으로 그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읽고 있자니 전에 내가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고, 99퍼센트 노력한 사람이 죽어서 하늘에 올라갔을 때 에디슨을 만나 "99퍼센트 노력했는데도 천재가 될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에디슨이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1퍼센트의 영감이 없었지 않나?"하고. 좀 웃기는 생각이었다. 40~50퍼센트? 나는 그만큼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인 주제에, 머릿속에는 그런 불경한 생각만 잔뜩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천재가 되는 게 아니다.
최근에 "다 같이 출발해도 한 사람은 걸어가고, 다른 사람은 기차를 타고,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탄다면 아무래도 도착지점이 달라지지 않겠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과정이 주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 그래, 가능성. 앞서있는 출발선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비행기에 올라타는 가능성. 이 책이 얄밉지 않은 것은 제목이 말해주듯, 금나나가 UFO에 탄 다른 행성의 생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나나 너나 지구별 인간이니까, 라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바란다. 몇 십년 뒤에 이 자서전의 깔끔한 완결판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읽을 때의 나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때의 내 손에 하명란의 자서전도 들려있기를.
현재의 우리 학교들은 죽에서 밥 사이 정도만 줄기차게 지어주면서 미음을 먹는 아이들이 소화불량이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오곡밥을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의 왕성한 소화력을 못본 척한다. (165쪽)
한 학생의 가능성, 성실성, 노력, 의지 등이 어떻게 점수로 평가될 수 있을까? (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