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 - 화답
지니(genie)뮤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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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마녀가 좋다.(여기에서 ‘마녀’라는 단어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이건 그냥, 가벼운 리뷰다.) 진지한 마녀도 좋고, 활달한 마녀도 좋고, 섹시한 마녀도 좋다. 오래전부터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진지한 마녀와 함께 숲에서 반자본주의 의식화를 위한 세미나를 한다든가(물론 마녀가 나를 지도하는), 활달한 마녀와 들판 위에서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든가(물론 나는 코러스다), 섹시한 마녀와 음란하게 정을 통하다 함께 화형 당하는 등등의 상상. 물론 상상속의 마녀는 대체로 이미지 일 뿐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아무튼 그런 식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주 가끔씩 정장을 입은 나를 보고 친구들이 '너 60년대의 나약한 지식인 같다.' 라고 놀릴 때면, 60년대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라고 투덜대면서도, 나약한 지식인과 터프한 마녀. 뭔가 어울리지 않나? 라고 내심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도 보는 눈이 있을 터인 즉, 나는 아직 마녀를 실제로 만나지 못했고, 사랑해 보지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15세기의 종교재판관처럼 숨어있는 마녀를 한눈에 알아보는 성스러운 시력도 없고, 21세기의 잘 팔리는 '세련된 마녀'들이 그/녀들의 은밀한 의식으로 나를 유혹하도록 만들 만한 매력과 재력 따위도 없으니, 마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겨우, '내'가 생각하는 마녀는 '그런'게 아냐. 라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골치 아프게 '그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는 말자. 누가 마녀를 논리적으로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마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벤야민 아저씨가 정치적 해방의 냄새를 맡았을 법한 상품들에서 마녀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껏 두 명의 마녀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가수다. 우선 한 명은 27살의 나이에 그토록 꿈꿔오던 결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쓰리제이 중의 한명인 ‘재니스 조플린’이다. 그러니까, 재니스 조플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몹시 짜증이 나는 어느 날 밤에, 라이브 버전의 '섬머타임'과 '볼앤체인'을 듣는 것이 대체 어떠한 기분인지. 그것은 마치 쇠사슬로 결박된 채로, 한 땀 한 땀 해부당하면서 환각제로 뼈마디를 세척당하는 듯한 기분인 것이다. 기절할 듯한 몽롱함이라고나 할까.

  

재니스가 무겁고 거칠게 절규하는 마녀라면, 온 힘으로 위로하는 두 번째 마녀는, 바로 대체 나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경화다. 오래 전 어느 날 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나에게로의 초대'가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만들었었는지. 그때 내가 인식한 정경화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욕망하는 내 상상속의 섹시하게 진지한 마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자신의 은밀한 의식에 초대했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울림 속에서 난 그 어렸던 시절, 나 스스로도 솔직히 다가설 수 없었던,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마치 화형당한 마녀처럼,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나버렸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6년 만에, 그녀가 화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녀도 변했고, 나도 아마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하고, 나의 갇힘과 외로움도 여전하다. 또 한번의 계절이 가는 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한번씩 불렀던 노래들을 불렀고,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사랑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녀의 화답을 들으며, 세상을 한발자국 정도 관조하게 된 듯한 그녀의 어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패닉'처럼 지나치게 세련된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며, 앨범의 첫 번째 곡의 마지막 가사 한 줄에 그만 심하게 가슴 아려하는 것이다. 내 맘을 어루만져 주세요, 라는 그 가사 한 줄에. 그렇게, 그녀의 애원과 외침이 나를 위로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위의 다섯 단락은 순수하게 헛소린데, 그것은 왜냐하면, 이따위의 글로는 그녀의 노래가 품고 있는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나름대로 고생해서 써놓은 글을 폐기하기는 못내 아쉬우니, 볼품없는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그냥 처박아 놓기로 한다. 아, 뒤늦게 생각난 것인데, 이 글은 이 음반을 추천하기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으며 별다른 이유로 불쾌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책사는 김에, 이 음반도 사서 들어 보시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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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헛소리, 제가 무지 좋아합니다.
음반 리뷰가 이렇게 재미있으면, 요즘은 음악이랑은 담 쌓고 지내는데, CD를 당장 구입해야할 것 같단 말이지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구만.

happyant 2005-12-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옹. 96년도 2집의 '나에게로의 초대'는 분명(^^)어디선가 들어보셨을걸요. 꽤나 히트했으니깐. 그리고, 저야 뭐, 읽어주시니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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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씩, 아니 자주, 이 나라는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기회주의가 소명인 듯한 정치인들이나, 부패가 주식인 듯한 고급관리들이나, 양심은 엿 바꿔 먹은 듯한 부유층들이나, 상아탑의 벽돌을 팔아 끼니를 구걸하는 지식인들이나, 마녀사냥에 재미 들린 키보드 워리어 들이나, 그리고 항상 현실에 굴복하는 스스로를 볼 때면 막연하게 총체적인 개념으로서의 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이 도저히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부정적인 모습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컨대, 치안유지법이 아직 남아있다든가, 신자유주의 정당이 빨갱이로 몰린다든가, 하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금껏 몇 종의 한국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은 없었다. 물론 여러 차례 한국전쟁의 기록들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 투쟁들의 기록들에 가슴 두근거려 보기도 했지만, 불만스럽게도 대부분의 책들 속에서 좋은 것들은 당연히 좋은 것이었고, 나쁜 것들은 당연히 나쁜 것이었으며, 그러한 이분법 아래에서, 대중(이든, 이념적 언어인 민중이든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사람)은 이념에 의해 어떤 때에는 혁명적 투사로, 어떤 때는 반동적 소시민으로, 또는 어떤 때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공란으로 일관성도 없이 그저 몇 마디의 말로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뜨거운 이념들과 멋진 규정들은 보았으나, 엉터리 지도자와 가여운 민중을 막론하고, 생활을 살아가는 그들 사람들의 냄새는 맡지 못하였던 것이다.

관점 없는 역사(책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용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그리웠다.(물론 무엇보다 자료를 찾는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이러저러한 대한민국 대중의 특성을, 혹은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케 한, 절대적으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요인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솔직하고 쉽게 설명한 글들이. 바로 생각보다 약하고 예상보다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들과 그들을 억압한 사건들 간의 연계로서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글들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만,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쉽사리 신나하거나, 쉽사리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를 상당부분 채워준다는데 장점 이 있다. 저자는 그의 '최대의 무기인 성실함'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복원해낸다. 곳곳에 인용된 증언들은 오래전에 박제된 인물들과 사건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기본적으로 두세 가지 관점에 의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된다. 예컨대, 419혁명의 과실을 취한 사람들이 '가장 실천이 늦었던 서울의 명문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국민 개조 작업이 결과적으로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응시함으로써, 왜 명문대 학생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이 이따위 비정규직 법안을 내놓고 그것의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홍보하고 있는지, 또는 마치 가미카제가 자폭하듯 수많은 여성들이 황교주에게 난자를 제공하겠음을 선언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객관을 지향하는 역사관은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형태로서 그것 자체로 보수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을 향한 강준만의 노력이 양비/양시론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우선 첫째로, 한국사회가 그동안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문화에 익숙했다는 점과, 둘째로 한국 현대사를 통해 진정한 대중의 민주주의나 혹은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진 적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쓰인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인간성과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보수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보통'이기 위해선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은, ‘우와 정말 새로운데?’보다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에 가깝다. 그리하기에 열다섯 권의 압박이 극심하기는 하지만(그래서 조금 빼곡히 내용을 채워서 두꺼운 책 다섯 권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 책은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읽어야만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보수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지피지기면 승률이 조금 오르기는 할 터이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꽤나 유용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419나 518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써도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품을 수 있겠지만, 그 점은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금껏 이토록 꿋꿋하게 살아왔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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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동춘 교수가 자신의 책 <전쟁과 사회>를 50만명에게 읽히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변할 것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책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진달래와 무궁화가 깔린 사진을 보고 기막혀하던 참이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님의 글은 여전히 반갑습니다. ^^

happyant 2005-12-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편이 허락된다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리고 싶은 책입니다. 십년치씩 선물하려 했으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인지라, 좌절.;;;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려진 무궁화에 한번 놀라고, 방송계의 조선일보 에스비에수의 집중과 왜곡에 또 한번 놀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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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 없는 소설이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면 그러한 기분은 더욱 극심해진다.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논리로 차분히 비평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울림을 지닌 책을 만나는 것은 물론 두말 할 나위 없이 '기쁜'일이겠으나  - 돌덩이든 쇳덩이든, 쳇바퀴 같은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죠(이우진식으로읽어야함) - 그것도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뇌까지 스민 무기력 증에 밤새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존 쿳시’의 '추락'은 내가 세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이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에코 페미니즘 적 여성에 대한 본능적 반감으로 별 감흥이 와 닿지 않았으며, 두 번째 읽은 '페테르크부르크의 대가'는 내용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대가의 자의식에 침몰된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그라는 존재를 잊고 있다가, -책장에 꽂힌 책 두 권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 또한 '삼세번‘은 내 유년기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언명령에 가까운 원칙이 아니었던가. - 집어든 세 번째 이 책에서, 나는 끔찍한 먹먹함을 느낀 것이다.

 

일단(그리고 아마도 이 리뷰 내내), 이 책이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남아공의 흑백 간 완전한 화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잊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외재적 비평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가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곳을 한번 여행해 본 적도  없으니, 몇 권의 역사책과 '호텔 르완다'(혹은 ‘부시맨’)정도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연찮게도, 나는 이 책을 지력이 아닌 감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논리에 의한 딱딱한 리뷰를 뱉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속이는 일임과 동시에 재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역사를 가장 비역사적으로 그린 소설을 다시금 역사를 끌어들여 읽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외부에 위치한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것은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 교수의 무력함이었다. 그것은 그를 교수직에서 박탈되게끔 만든 존재에 대한 무기력이 아닌(오히려 그러한 무기력 하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존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자,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다.(물론 역사에 대한 무기력이 가장 크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그는 때때로 못이기는 척 - 필사적으로 - 반걸음 정도 나아가 보지만 항상 커다란 장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그의 주체적인(동시에 배제적인) 합리성에 대한 벌이요, 그의 폭력적인 남근에 대한 벌이자, 동시에 그의 깨닫지 못했던 오만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내가 루리에게 감정이입했다는 사실이다. 대략 두 배 정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에게(그가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감정이입했다는 것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손톱만큼이나 잃을게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어지는 의문점들, 나는 내가 저질러야 했던, 혹은 저지르게 될 죄로 고통 받은/을 사람들과 과연 화해 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루시’처럼 나는 용서하거나 계속 견뎌내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물음이 남고, 풀리지 않는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은 아픈 거다. 그렇다, ‘루리’는 항상 꿈꾸던 오페라를 못 쓰고 헉헉대지만, 나는 이 짧은 리뷰조차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헉헉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은 그것뿐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운데에서도 ‘야만인을 기다리며’부터 품게 된 하나의 껄끄러움은 여전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인 ‘설정’이다. 현실을 가득 매운 화해 불가능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어떠한 캐릭터와 설정을 사용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겠지만, 어찌되었거나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혹은 그래서 역으로 구원하는) 여성으로 귀착되는(주요한 장치인 섹스와 강간을 통해 어찌되었거나 고통 받은 성性은 무엇인가) 남성 노대가들의 소설에서 주로 보이는 설정은 역시나 껄끄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나로선 이 느낌은, 그러한 설정이 아무리 위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루리도 살아가고, 루시도 살아간다. 쿳시도 인세 받고 잘 살아가고, 나도 나름나름 잘 살아간다. 정형근도 잘 살아가고, 그에게 고문당한 많은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쿳시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끝이 났지만,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게 남겨진 몫이다. 삶은 역시나 언제나 고된 법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한 층 한 층 지하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이런 CM송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난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한편, 이렇게 말하는 거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즐기시지 못한 게 있으시면 자유롭게 즐기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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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8-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한 권으로 조용히 마무리한 작가로군요. ^^;
이백오십구만층까지 추락하기, 라니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happyant 2005-08-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포인트는 '지하'라는 것과, 한층한층 천천히 추락한다는 거죠.;;;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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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녹슨 초록빛 곪은 상처를 미친 듯 후벼 파게 하는 사람, 당신은 헐린 가식의 벽에 부어오른 목젖 같은 소리를 내던지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달콤한 말조차 썩어갔던 나의 어린 사랑의 마지막을 길어 올리게 만드는 사람, 당신의 시는 항상 내 상처, 끝없이 갈라진 벽에 자랑스레 하얀 방부제처럼 독한 단어들을 뿌려버려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벅찬 부끄러움에, 벽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도록 만드는 당신은, 백만 번 접힌 신문지 조각마냥, 별것 아닌 내 안의 아린 이야기를 항상 깊은 곳에서 발견하도록 내 손을 이끄는 당신은, 그리하여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부수는 사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한 숟가락의 밥과, 한 숟가락의 눈물이 만드는 그 어슴푸레 빛나는 안개의 조각 칼이, 당신의 시를 읽을 때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저 나를 바라봐야 하는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처참하게 부수는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멀쩡히 서있는 나는, 그리고 당신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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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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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머리 속이 ‘문과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라 그 동안 신문이건 잡지건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돌려버리거나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가 일쑤였다. 어렸을 적 ‘과학 동아’를 꾸준히 보지 않았던 탓인가, 과학은 내게 너무나 멀고도 먼 무엇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과학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라는 발언을 보고, ‘그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만든 프리츠 뭐시기가 한 말과 비슷하군, 파시즘 스러워.’ 라고 한마디 중얼거려 주는 것이 지난날 내가 생각했던 ‘과학에 대해(혹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과학 관련 기사에 대해) 내가 가져야할 충분한 교양 수준’이었으니 나의 무지를 설명할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어쭙잖게 미디어 관련 학문 전공자라 자신을 내세우며, 사회민주화 이후 언론의 기업화와 함께 광고 수익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사의 연성화가 어쩌고저쩌고, 의제설정기능을 통한 관심사의 조작이 어쩌고저쩌고, 왜곡, 선정성, 인터넷 언론의 상업성이 어쩌고저쩌고, 이러한 뻔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언론의 비판적 독해를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언론을 통해서 유통되는 과학에 대한 이 거대한 무지를 나는 반성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일상/비일상적 판단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과학 자체 혹은 과학과 관련한 기사들에 대해 말이다. 모르니, 그게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알 리가 있나.

제왕절개, 우울증, 혁신적인 기술들, 유전자 조작 식품들, 편도선, 흡연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언론이 쏟아내는 상투적인 기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는가. 이것은 “근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따위의 한, 두 마디 당위적인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과 세부 사항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구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사회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가치판단 할 수 있는 ‘시선’이자, 과학과 관련한 텍스트를 제대로 독해해 낼 줄 아는 ‘실력’이다. 이것을 체득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학과 관련한 서적들을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읽어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과학이 현실에서 유통되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는 것이다. 이충웅의 저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후자의 방안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재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알게 모르게, 첫 번째의 방안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현실 적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잘 설명된 포토샵 책 펼쳐놓고 바로바로 사진 수정하듯 개별 기사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인 비판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학섹션의 기사를 읽을 때의 시야가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논리학 서적처럼, '실험 과정상의 추론의 타당성', '균형적인 시선', '신비화', '오역' 등등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머릿속에 담고 한번씩 고민해봐야 하는 원칙들이 각각의 단락 속에 예시문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한 장을 아예 황우석 박사와 관련한 근래의 줄기 세포 연구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근래 언론에 가득한 상찬이 뿜어내는 빛을 걷어내고 주어진 사건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시류에 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황우석 신드롬에는 사실 이 정도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진 책을 보면 딱딱하다는 생각에 지겨워지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러한 위험을 다행스럽게도 피해간다. 일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지겹지 않은 것은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콩, 바퀴벌레, 날씨,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다룬다. 암, 흡연, 우울증, 저자가 두 번째 장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과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유명 철학자들의 말이 이데올로기로서(누구의 이데올로기이든) 우리의 일상에 작용한다면, 과학은 우리가 살을 맞대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우리 몸의 생체 기관 자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세 번째 장에서 ‘미래’와 관련된 이슈로 나아가는데, 그가 다루는 속도, 민족, 굶주림 등등의 개념은 흡사 사회과학에 더 어울리는 문제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까의 깨달음과 더불어, ‘삶’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인문학도 물론) 오늘 날의 분과학문체계처럼 구분된 형태가 아닌,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지루해지지 않는 또 다른 큰 이유는, 이 책이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과학 기사에(혹은 과학 자체에) 접근하면서도, “학문 간의 '장벽'을 깨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공은 외부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역설하는 저자의 소개 글에서 언뜻 스쳐지나가는 '저자다움'이 책의 곳곳에 박혀서 생동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사의 분석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하되, 스스로의 관점에서 문제제기 해야 할 부분에는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이러한 ‘저자다움’은 책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이 책이 무색무취한 논리학 서적의 한계에 갇히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바퀴벌레 퇴치 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 퇴치 업체들이 바퀴벌레 멸종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인간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바퀴벌레 종류는 몇 종 안 되기 때문이다.'(80p), '과거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영역들을 의학적으로 ‘규정’하고,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114p) '인체의 자기 조절 능력에 대한 불신은, 조급하고 과도한 의료적 개입 속에서 강화되어 왔다.'(128p) '굶주림은 저급한 기술력 보다는 지배자의 피지배자에 대한 착취나 환경 파괴와 더 연관성이 깊다는 증거도 많다'(183P) '관계의 문제는 사회에서의 ‘권력’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예측’의 공표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종 그것은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 된다. 혹은, 현실을 잊는 ‘마취제’일 때가 있다.(205p)

말하자면 이 책은 말 그대로 대체로 ‘엉망’인 한국의 과학을 주제로 한 기사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저자가 자기 스스로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이다. 분과학문간 배타적 장벽을 깨는 것이 그 운동의 하나이며, 미디어가 쏜 ‘열광’의 빛에 가려진 과학에 ‘성찰’을 부여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저자가 과학을 다루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과학을 향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가다듬어 본다. 어찌 보면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안은 뻔하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비판적이 되고, 더 많이 세상과 부딪칠 것. 한편,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다. 과학기사든 또 다른 어떤 기사든, 믿지 마라.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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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기엔, 역시 지식이 너무 없습니다. 과학이라니, 쩝.

happyant 2005-07-2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저도 이 책을 읽고 뒤늦게 띵-해서, 쉬운 교양서적부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어차피 한계야 명확하지만서도, 어찌어찌하면 '주체적으로 과학기사 읽기'의 수준 정도에는 근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009-01-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