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엄벌하다
로익 바캉 지음, 류재화 옮김 / 시사IN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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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이 주장하는 바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정책 확대는 고용 불안정과 질 낮은 일자리의 증가를 유발하고 필연적으로 도시 빈민의 증가로 이어진다. 사회 구성원의 연결 고리가 약화하고 불안이 증대되면 국가는 외부의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게토의 빈민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늘어나는 빈민에 복지가 아닌 경찰력의 강화로 대응하고 자연스럽게 수감자의 다수는 빈민으로 채워진다. 이 책의 원제는 ‘빈곤의 감옥’인데, 여기에서 ‘감옥’은 은유가 아니다. 
 

“채무국에 원조를 해주는 조건으로 국제기금 임대인이 ‘구조조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휘둘러 생긴 끔찍한 결과들을 보라! 긴축예산, 감세, 공공지출 삭감, 민영화, 자본의 특권 강화, 금융 및 외환 시장 개방, 고용 유연화, 사회보장비 삭감. 그러니 이제 이런 정책들의 논리적 결과물인 사회적 소외, 불안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에 대한 강력한 형벌 조치를 총괄할 때가 된 것이다”(91p)
 

책 사이사이에 워낙 다양한 유럽 국가의 사례가 나오면서 조금 난삽하기도 하고, 유럽을 일종의 이상향으로 사유해온 내게는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저자가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제기하고자 한 물음은 간단하면서 매우 근본적이다. 그것은 바로‘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다.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며 국가에 관리당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인간으로 존중할만한 이웃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인간을 믿으며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 믿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

“유럽식 사회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국가의 역량을 공격적으로 재구축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가 서민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문명과 문화의 유형이 무엇이냐에 달려있을 것이다(175p)"
 

저자가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점들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조금 헷갈렸다. 워낙 다양한 요소들이 엮여 있고, 그 요소들마다 상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가 쉽지 않았다. 예컨대 최근 한국 사회에는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가 인구 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지이공으로 말미암은 자아도취 등을 이유로 최근 한풀 꺾이지 않았나.(물론 노동계층은 여전히 힘겹고, 유럽 수준의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단지 그들이 강고한 조직화를 이루기에 세력이 작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시내 중심가에만 수 천 명이 있는 노숙자들에 비추어 봤을 때, ‘배제’가 분명한 문제이기는 해도, 그들에게 형법상의 처벌이 최근 특히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물론 배제가 더 심한 문제일 수도 있다) 이처럼 책의 내용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직접 대응할지는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분명한 경향성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에서 반복되는 흉악 범죄의 증가와 함께 증대되는 경찰력은 일반적으로 중범죄보다 경범죄의 관리에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골목골목마다 늘어나는 폐쇄회로TV는 복지시스템의 약화와 궤를 같이한다. 현행법상 무전취식 등의 경범죄를 저지른(당연히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을) 빈민이 대형 비리를 저지른 인텔리 혹은 유지들보다 구속될 확률은 훨씬 더 높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비유를 과감히 들자면) 장안동의 집창촌은 걸핏하면 언론의 십자포화와 경찰의 일제단속의 대상이 되지만 강남의 안마방과 룸사롱은 국가권력에게도 일종의 성역이다. 점차 공권력이 향하는 지점이 복지가 아닌 통제임은 분명하다.
 

더불어 지금 당장 고민해볼만한 몇 가지 화두를 책을 통해 얻은 것도 큰 소득이다. 수감자를 대상으로 ‘최저소득보조비’를 지원하는 것은 사회악에 대한 어이없는 재정낭비인가 아니면 재범률을 낮추는 궁극적인 방안인가. 부쩍 정치권에서 주장되기 시작한 워크페어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바람직한 대안인가 아니면 웰페어로부터의 신자유주의적 퇴보인가. 특히 언론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어린이 대상의 성범죄가 비정상적 괴물들의 병리적 행위의 결과가 아닌 대부분의 성범죄가 가정 내부에서 발생하는 현실을 감추는 정부와 미디어의 술책일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은, 오랫동안 머리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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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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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은 책이다. 어려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쉽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강의에 기반을 둬서인지 대체로 술술 넘어가면서도, 전개에 필요한 내용은 큰 누락이 없이 제대로 전달한다. 한국과는 정치사회적 지형이 상이한 미국의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개별성에 매몰되지 않고 근본적인 가치판단의 층위를 적절히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열풍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좋은 책이지만, 압도적으로 훌륭한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례와 학술적 해석이 때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덜컹거린다. 질문을 던지는 선택지는 재밌으나 이에 대한 대답은 각 판단의 정당성을 살짝 짚어주는 수준에서 정리될 뿐 역사나 철학적 차원의 심도 있는 대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질문이 진중하고 대답이 가벼우면 ‘훌륭한 문제제기’라고 부르고, 그와 반대면 ‘뜻밖의 성찰’이 될 수 있겠다. 또 두개가 모두 진중하면 우리는 역작이라 칭하는데, 이 책은 질문과 대답이 모두 가벼운 편이다. 그래서 현란하되 진중하지 못한 인기 강좌를 듣고 난 것처럼, 자극은 받았으나 체계적으로 남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분명 주관적일 비판을 한줄 더 붙이자면, 이 책은 결정적으로 내가 특히 기대했던 ‘분배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충분치 않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이 책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손에 잡힌 배경이다. 열풍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를 자세히 풀어내는 것은 때늦은 반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면, 사람들이 정의의 부재를 분명 체감하고 있다는 것. 그 부재의 전후에는 한쪽 날개가 꺾인 채 양 극단이 목소리를 높여온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자리한다는 것. 그럼에도 그 상실감을 채워줄만한 변변한 저작 한권이 그동안 없었다는 것. 우리는 아직 권위와 능력, 그리고 대중에 대한 존경을 고루 갖춘 학자 또는 학자의 작업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결국 다가오는 것은, 아쉬움이다.   

이틀 전,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한다는 취지로 다양한 필자가 모여서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책을 냈다. 단순히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닌 한계를 메우면서도 한국사회에 적합성을 지닌 대응물이었으면 좋겠는데 첫 단락 표제에 ‘공정사회’가 들어가는 것을 보니 시의성에만 매몰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도 필자들을 대체로 좋아해서 분명 읽어볼만한 책일 것 같고, 읽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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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만화 한편 열 소설/논문 안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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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시옷-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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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세상과 이어진 작은 징검다리
파마헤드
홍승우 외 지음 / 행복한만화가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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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주류들의 요란법썩 총천연색 뒤집기 한판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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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2. 설명이 필요있나?
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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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1. 리뷰를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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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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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우울한 가운데 더욱 우울한 영화를 보고 우울의 끝을 경험하면 그것이 해소되듯, 근래에 겪고 있는 개인적인 막막함을 그것을 가장 잘 다루는 그의 소설을 통해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 중에 막막함 - 혹은 먹먹함 - 을 가장 멋지게 그리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김훈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제법 그의 책들을 읽었다.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과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화장>을 읽고 나서 이것이 네 번째 책이니, 공교롭게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소진의 책보다도 그의 책을 많이 읽은 셈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그의 소설을 읽은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참고로 나는 자전거 여행 첫 번째 권을 읽을 때까지,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책을 펼치고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저자의 일러둠이다. 이것은 옳지만 그르다. 물론 ‘이 소설’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실’이 아니기에 소설이지만, 이 책은 세상에 대한 김훈식의 정치적 발언이기에 또한 소설이 아니다. 전직 파리의 택시운전사는 이 소설에서 FTA를 보지 않는다 하였지만(사실 나는 이것이 마음 넓은 좌파의 인사치례라 생각한다), 난 이 소설에서 그것을 보았다. 내세움은 당김을 부르는 법이며, 나는 김훈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조사助詞 하나에 대한 그의 철두철미함만큼이나, 자신의 밥벌이 전략의 완벽함에 대한 김훈의 욕망은 넓고도 깊다. 욕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니, 그 또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장은 아름답다. <칼의 노래>에 취해 그의 팬이 되어 버린 친구는 언어의 농도가 이전만 못하다 하였지만, <칼의 노래>와 <자전거 여행>의 가운데 즈음에 위치한 그의 문체는 인간의 비극과 자연의 무심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더구나 철학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옮긴 듯한, 아니, 철학으로부터 문학의 언어를 되찾아 온 것 같은 그의 문장들은 어렵지 않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리를 빛에 드러낸다. 예컨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 사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책값은 한다, 라고 생각했다.(물론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실질적 동기는, 아버지께서 몹시 읽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만)   


문장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그의 현실인식은 명확했다. 소설은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대립으로 시작하나, 양측의 가치를 물리적 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며, 무상한 표정으로 결국은 주화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김훈 식 현실주의의 명확한 결론이다. 나는 그저 <칼의 노래>에서 그러하였듯 막막함과 그것 아래의 무참함을 기대했지만, 김훈은 더욱 나아간다. 모든 것이 혼재된 듯 보이지만, 그는 선택지를 마련하며, 그것들의 가치를 판단한다. 명분을 택했던 이들은 탈출하였거나, 이중적이었거나, 매우 소수만 자발적으로 죽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현실인식이 재빠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광해군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도 있고, 사대부의 명분론과 당파싸움의 한계를 애통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김훈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과거의 ‘명분’은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겪으며 ‘싸그리’ 어딘가로 팔아먹은(혹은 그것을 담지하고 있던 이들이 합방 전후에 의병으로 죽고, 독립운동하다 죽고, 남북전쟁하다 죽어서 사라져버린) ‘개인’과 ‘국익’과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세 가지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여!) 이러한 현실에서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 그의 언설은 교양 없는 보수의 전형적 모습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나는 이문열과 김훈을 구분 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그러니까 그의 책을 보는 것이겠지만), 박정희와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를 쏟아내는 그의 현실인식을 접할 때마다 그 구분이 ‘나의 헛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훈을 조금 지나치게 비하(혹은 과대평가?)하자면, 그는 하루키의 한국식 버전에 다름 아니다. 하루키에 굶주림의 고명을 얹고, 분단의 비극이라는 그릇에 올리면 김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하루키에 열광하는 감수성이 때 묻으면, 그 때의 정당성을, 혹은 그 때에 대한 위로를 김훈에게서 찾기 쉬울 터이다. 나도 한 때 하루키를 즐겨 읽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문득 FTA를 걱정하는 시골의 농사짓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훈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간, 나의 막막함 자체가 ‘무참’해졌다. 이제 나는 나의 ‘막막함’의 ‘무참함’을 알았으니, 적어도 진정 막막해 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을 터이다. 진정 막막해 진다면, 그의 소설 따위가 위로가 될 리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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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3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urblue 2007-05-2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전 김훈이 안 땡길까요? 강산무진이던가, 서점에서 단편 하나를 읽었는데, 뭐 별로... 님의 리뷰 보니까 안 읽어도 될 듯 하구요. ^^;

happyant 2007-05-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 주변을 보니 아픔을 초연하게 견뎌낼 줄 아는 사람들은 김훈에 초연하더군요.^^ 전 아직 나약한 면이 많아서 김훈을 가끔 들여다 보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아니하려고요.ㅎㅎ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승진 옮김 / 향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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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식으로 말하다.


그러니까.

<이건저열하고도냉소에가열적인새벽세시의모방성짙은농담북>


1.

일본문화개방을 외치던 매국노 인사들이 연단위의 한 고등학생 갱에게 볼링 핀처럼 쓰러지다!  : 주간ㅈ선


십년 전쯤의 내 이름은 <아리랑 남벌 국민의례 송 북>이었다. 

나는 윤리와 국사교과서로 무장된 갱이었다.

하지만 내가 착각했던 건,

그때 해방이 된 줄 알았다는 것.

하지만 진실은 대한민국은 일본의 30년 정도 뒤진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부정하려 해도 갱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에는 훨씬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영웅들이 증명했다.

로쟈는 개머리판적인 시련을 겪었고, 트로츠키는 도끼적인 시련을 겪었고, 우리의 영웅들은 새로운 입시유형적 시련을 겪는다. 논술시장의 새로운 전설들은 열강熱講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빨리 강의를 갈아탄다. 그러니까,


부유한 사람들은 적응이 빠르다. 그리하여 사실 나는 부럽습니다. 그들의 안정이. 그들의 침묵이. 그들의 망각이. 사계절 잠만 자고 있는 투쟁의 기억이. 그것을 팔아먹는 만화가들이. 아아. 찬란히 빛나는 것은 컵라면뿐입니다!


라고 마르크스는 1841년에 프루동과 바쿠닌과 헤겔에 관해 토론하던 중 투덜대었습니다.


2.

나는 지저분한 짓을 많이 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1년간 썼습니다.

나는 ㅈ프 버클리가 좋습니다.

나는 ㅈ니스 조플린이 좋습니다.

나는 ㅈ미 핸드릭스가 좋습니다.

나는 ㅈ향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죽어버린 ㅈ이 좋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글을 쓰기에 좋지 않습니다.

조명도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먹을게 없습니다.

그러니 너절한 팝 문학은 집어치워 주세요.

어설프게 미친 사이코를 보면

나이스한 기분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미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들뢰즈를 20번쯤 보고, 푸코를 30번쯤 보고, 라캉을 50번 쯤 보고, 히치콕의 영화를 100번쯤 보고나서, 미침에 대한 계보학적 논문을 작성하여 봅니다. 그리하여 미침에 미치면, 21세기형 사이코에 대한 분열적 단상이 떠오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침은 결코 삶에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정신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버리니까요.  

 

3.

그렇다면 이것은 이름이 무엇이죠?

문득 찾아온 세이렌이 물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인 나는 대답했다.

<대한민국 마지막 사무라이 새마을 운동형 개그맨>이야.

쿠데타 이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에 짊어지고 있지.

역시나,

무거운 비극에 시름하지 않는 분단국가의 작가라는 건 심각한 비극이라 생각해요.

세이렌 옆에 북한산에서 날아온 앵무새가 말하였다.

하지만 그 앵무새는 훨씬 더 똑똑한 앵무새다.

세이렌쯤, 전자레인지에 구워 먹을 줄 안다.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소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노래는 광장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리하므로,

미안해요, 세이렌.

이것이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소설의 제목이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언어처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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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5-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얼마만이에요? 엄청 반갑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인사만 남기고, 리뷰는 나중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

마늘빵 2007-05-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를 보는 듯 합니다. 제목이. :)

happyant 2007-05-2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저도 반가워요!^^오랜만이지요?ㅡ.ㅜ

happyant 2007-05-2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네에. 잘 보셨습니다아.
제목은 상투적 패러디고, 리뷰 내용은 어설픈 패러디에요.ㅡ.ㅜㅎㅎ

blowup 2007-05-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설프다뇨. 이 책 읽다 말았는데도.
꽤 멋진 패러디란 생각이 드는데요.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happyant 2007-05-2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 그렇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