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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남한산성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우울한 가운데 더욱 우울한 영화를 보고 우울의 끝을 경험하면 그것이 해소되듯, 근래에 겪고 있는 개인적인 막막함을 그것을 가장 잘 다루는 그의 소설을 통해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 중에 막막함 - 혹은 먹먹함 - 을 가장 멋지게 그리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김훈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제법 그의 책들을 읽었다.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과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화장>을 읽고 나서 이것이 네 번째 책이니, 공교롭게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소진의 책보다도 그의 책을 많이 읽은 셈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그의 소설을 읽은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참고로 나는 자전거 여행 첫 번째 권을 읽을 때까지,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책을 펼치고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저자의 일러둠이다. 이것은 옳지만 그르다. 물론 ‘이 소설’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실’이 아니기에 소설이지만, 이 책은 세상에 대한 김훈식의 정치적 발언이기에 또한 소설이 아니다. 전직 파리의 택시운전사는 이 소설에서 FTA를 보지 않는다 하였지만(사실 나는 이것이 마음 넓은 좌파의 인사치례라 생각한다), 난 이 소설에서 그것을 보았다. 내세움은 당김을 부르는 법이며, 나는 김훈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조사助詞 하나에 대한 그의 철두철미함만큼이나, 자신의 밥벌이 전략의 완벽함에 대한 김훈의 욕망은 넓고도 깊다. 욕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니, 그 또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장은 아름답다. <칼의 노래>에 취해 그의 팬이 되어 버린 친구는 언어의 농도가 이전만 못하다 하였지만, <칼의 노래>와 <자전거 여행>의 가운데 즈음에 위치한 그의 문체는 인간의 비극과 자연의 무심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더구나 철학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옮긴 듯한, 아니, 철학으로부터 문학의 언어를 되찾아 온 것 같은 그의 문장들은 어렵지 않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리를 빛에 드러낸다. 예컨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 사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책값은 한다, 라고 생각했다.(물론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실질적 동기는, 아버지께서 몹시 읽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만)
문장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그의 현실인식은 명확했다. 소설은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대립으로 시작하나, 양측의 가치를 물리적 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며, 무상한 표정으로 결국은 주화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김훈 식 현실주의의 명확한 결론이다. 나는 그저 <칼의 노래>에서 그러하였듯 막막함과 그것 아래의 무참함을 기대했지만, 김훈은 더욱 나아간다. 모든 것이 혼재된 듯 보이지만, 그는 선택지를 마련하며, 그것들의 가치를 판단한다. 명분을 택했던 이들은 탈출하였거나, 이중적이었거나, 매우 소수만 자발적으로 죽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현실인식이 재빠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광해군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도 있고, 사대부의 명분론과 당파싸움의 한계를 애통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김훈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과거의 ‘명분’은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겪으며 ‘싸그리’ 어딘가로 팔아먹은(혹은 그것을 담지하고 있던 이들이 합방 전후에 의병으로 죽고, 독립운동하다 죽고, 남북전쟁하다 죽어서 사라져버린) ‘개인’과 ‘국익’과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세 가지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여!) 이러한 현실에서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 그의 언설은 교양 없는 보수의 전형적 모습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나는 이문열과 김훈을 구분 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그러니까 그의 책을 보는 것이겠지만), 박정희와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를 쏟아내는 그의 현실인식을 접할 때마다 그 구분이 ‘나의 헛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훈을 조금 지나치게 비하(혹은 과대평가?)하자면, 그는 하루키의 한국식 버전에 다름 아니다. 하루키에 굶주림의 고명을 얹고, 분단의 비극이라는 그릇에 올리면 김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하루키에 열광하는 감수성이 때 묻으면, 그 때의 정당성을, 혹은 그 때에 대한 위로를 김훈에게서 찾기 쉬울 터이다. 나도 한 때 하루키를 즐겨 읽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문득 FTA를 걱정하는 시골의 농사짓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훈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간, 나의 막막함 자체가 ‘무참’해졌다. 이제 나는 나의 ‘막막함’의 ‘무참함’을 알았으니, 적어도 진정 막막해 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을 터이다. 진정 막막해 진다면, 그의 소설 따위가 위로가 될 리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