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설렘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파멜라 심스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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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직 생활 8년차. 나는 지극히 평범한 교사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남다른 인연으로 내가 만난 몇 아이들에겐 괜찮은 선생으로 그려지기도 했겠지만, 내가 담임을 맡았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학교를 떠난 지금에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그저 그렇고 그런 여러 선생중의 한 명일 것이다. 지겹고 지루하기는 하지만, 학생들이 마냥 무시하고 안 들을 수는 없는 그런 ‘문학 수업’을 하는 국어 선생이 지금의 내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도 가끔씩은 학교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판단할 때도 있는지라 학생들과는 큰 마찰 없이 지내고 있는 점이 내 교직 생활의 작은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인 셈이였는데, 며칠 전에는 수업이 끝나고 잔뜩 화를 내서 내 작은 위안거리마저 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난 몇 주 동안(사실은 지금껏 계속이었을텐데, 내 눈에 띄인 것이 최근 몇 주 정도) 계속해서 수업 시간에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는 녀석이 있었다. 수업 시간마다 내가 가서 깨우고, 잠시 후면 녀석은 다시 엎드리기를 반복했다.(내가 몇 번 지적한 후 다른 선생님들께도 여쭤보니 대부분의 수업시간에 그렇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안 되겠다 싶어서 교실 뒤로 나가 서 있게 했다. 수업 시간에 녀석과 얘기를 하면 길어질 것 같아서  수업이 끝난 뒤로 미룬 셈인데, 그 날 녀석과 나의 대화는 이랬다. 

“니는 나한테 잘못한 거 없나?”

“……”

“니는 수업시간에 그래, 엎드려 있는 거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잘 모르겠는데요.”

“니가 한 일인데 니가 모르면 누가 아노?”

“……”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라, 니 내한테 잘못한 거 없나?”

“……”

어느새 내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나 보다.

“대답을 좀 해봐라, 이 총각아! 답답하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데이, 니 진짜로 잘못했다는 생각 안 드나?”

“수업 시간에 자는 거는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하고 올라와서 내 목소리는 좀 더 커졌다.

“니 뭐라캤노? 학생의 선택? 니가 착각하나 본데, 수업시간에 공부하는 건 학생의 선택 아니거든. 그거 학생의 의무다. 내 말이 맞는지 니 말이 맞는지 교육부에 한 번 물어봐라.”

“저, 급식 당번이라 배식하러 가야 하는데요”

“니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나? 왜 딴 이야기고? 그리고, 내랑 이야기도 덜 끝났는데 어딜 간단 말이고?”

“애들이 나 때문에 밥 못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요.”

“니만 당번하는 거 아니잖아. 오늘은 딴 사람이 좀 보내고 우리 이야기 마무리 하자.”

“……”

“니는 나한테 잘못한 거 없나?”

“……”

“안 되겠다. 그라믄 점심 묵고 내한테 좀 찾아온다. 다시 얘기하자.”

“저도 바쁜데요. 화장실도 가야하고…… 쉬는 시간은 학생이 자유롭게 지낼 권리가 있잖아요.”

“아니, 이 총각아! 내가 니를 아무 이유 없이 부르나? 분명히 해야 할 말이 있고, 아직 지금 이 이야기가 덜 끝나서 부르는데, 니는 니 권리만 얘기하노? 나도 학생을 지도할 권리와 책임도 있거든. 지금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점심시간 지나고 다음 쉬는 시간에라도 꼭 찾아 온나! 알겠제?”


이후 그 녀석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내가 교실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알량한 자존심 탓인지 올라가기 싫었다. 그러는 내내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학생의 권리'란 말에 속에서 불길이 확 솟았던 거 같다. 이런데 써 먹으라고 학생의 권리라는 게 있는지 답답했다. 내 스스로는 학생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했던지라 더 화가 났었다. 마음은 점점 무겁고, 침울했다. 다른 반에 수업을 들어가는 것도 평소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그 다음날, 나는 선생님들과의 공부 모임에서 이 사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알렸더니 자연스럽게 선생님들의 여러 가지 충고와 조언들이 해 주셨다.

- 수업시간에 공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도 검토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고 다그치는 교사의 태도에 학생이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닌가?

- 그럼 선생님(나는)은 그 학생이 반듯한 자세로 공부하는 척 앉아 있기를 바라는가?

- 그 학생이 수업시간에 계속 엎드려 있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 학생이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현재의 문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가?

- 학생의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에서 교육은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자신이 정한 기준을 벗어난 학생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 학생이 말한 내용보다 태도 때문에 이런 충돌이 생기고 갈등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그 날 나는 당연히 내가 옳고, 몰지각한 학생의 태도에 대해 분개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내 생각이 여러 곳에서 허점을 드러내어 약간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나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교사들도 많구나! 싶었다. 그것도 바로 내 주변에……. 그러면서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문제의 그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우선 어쩌면 그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는 게 내가 덜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벌과 잔소리는 2분이면 충분할 수도 있지만, 그 녀석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차분하게 이유를 묻고,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제로 그 녀석의 학습태도가 나아지는지 지켜보고…… 이런 과정은 분명히 따끔하게 혼내는 것보다는 훨씬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만나면서 나름대로 조심하느라고 하는데도, 내 생각과 행동이 가끔 이렇다. 한동안 그냥 좀 ‘이렇게 하면 되었다’ 싶다가도 어김없이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겨서 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고, 기운이 쭉 빠져 있던 시기인 이틀 동안에 파멜라 심스의 ‘처음 그 설렘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늘 책상 위에 두고, 아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학교 생활하다가 언제라도 이번처럼 기운이 빠지는 일이 있을 때면 아무 부분이라도 펼쳐두고 읽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이 말하는 ‘진정한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 사이에 강한 인간적 유대 관계를 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단순히 교과목의 내용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교사(good teacher) 보다는, 학생을 온전히 한 인격체로 대하며 가르치는 교사(great teacher)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격체로 대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교사가 먼저 학생들을 대하라.’것이다. 이러면 규칙이 사라져서 질서가 없어질 것이라고 불안해 하지만, 스스로 참여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일방적인 지시와 통제, 교사의 위협으로 생긴 아이들의 마음 속 불안이다.

교사들이 학생 시절에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선생님들은 어떤 태도와 성향을 지녔는지를 떠올려보는 게 필요하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듯이, 예전의 그 학생들(지금의 교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처럼 지금의 학생들도 교사의 감시와 위협, 지시와 통제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따뜻하고 다정한 관심과 배려, 긍정적인 자기암시와 적극적인 격려를 통해 학생들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고, 이것이 모든 교육의 출발점이 된다고 말한다.

학생들의 영혼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을 위임받은 우리 교사들의 몫이다. 교사들이 학생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사고와 생각을 보여 준다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그 녀석이 속한 반의 수업이 든 날이었다. 그 반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 녀석이 그렇게 행동할만한 이유를 아시는지 여쭤보았다. 뾰족한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싶었다.

약간 긴장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녀석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왜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역시나 같은 대답! 그러나 내 마음은 저번처럼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은 것 같다. 약간 웃으면서 이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내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언제든지 시간이 나면 꼭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일렀다. 그랬더니 녀석이 다음 시간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도 괜찮다고, 다음 ‘문학 수업’이 든 시간 전까지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게 했다.

 

여러 번 배우고,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도 내 몸에 익숙해지기는 어렵고, 스스로 다짐하고, 굳은 결심을 해도 다시 흐트러지고 쉬워서 며칠 전과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전날에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더라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대로 된 ‘교사’가 되려면 두고두고 읽고 마음에 새겨야 할 보석 같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우문(愚問) 하나!

교사는 왜 학생들을 사랑하고, 관심을 보여 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가? 현답(賢答)은 우리의 미래가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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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6-2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매일 저지르는 일이죠. 아이들을 이해하지는 못하면서 교사 자신의 입장은 같은 교사들끼리 늘 위로받고 싶어하거든요. 에구.. 그렇다고 녀석들을 늘 엎드려있게, 늘 지각하게, 늘 도망가게 둘 수도 없고... 어쩌나...

고사성어를 공부하잖아요? 아이들에게 '후생가외'라는 성어를 이야기할 때는 정말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우리-어른, 교사-들이 거의 잊고 사는 後生可畏... 아이들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할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교단에서 완전히 내려온 게 아니라 한쪽발은 살짝 걸쳐놓고 있는 게 아닌지...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권위'는 제외하고.

그런데 긍정적인 의미에서 교사의 권위란 뭘까요? 무조건 내 기준이 옳다고 거기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죠? 흠...

글샘샘께서 쓰신 리뷰읽고 '스승의 날' 선물로 저 스스로에게 선물했던 이 책!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사실 너무 빠른 효과와 긍정적인 면만 보고 있는 듯 해서 약간의 반감이 남아있거든요.

느티나무 2006-06-22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네요. ^^ 늘 안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거 같아요. 사실은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모르고 있는데요...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거, 실수의 지름길인거 같습니다. 저는 제목처럼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가 보고 싶어

 

가보고 싶어 꿈이라도 좋아 금강산 너머 압록강까지

만나고 싶어 이름모를 친구 어떤 선물을 참 좋아 할까

왜 우리들은 갈 수 없을까 왜 우리들은 만날 수 없을까

고구려 할머니의 옛날 얘기 듣고 신나는 새 친구들 기차놀이 할텐데

독립군 아저씨들 말달리는 소리 백두산 꼭대기에 힘찬 노래 울릴텐데

가보고 싶어 어깨동무하고 백두산 너머 만주 벌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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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은 모두가 얼굴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우리 반은 8교시 보충수업이 끝나면 종례를 한다.

내가 교실로 들어가면 언제나 시끌벅적, 어수선한 분위기다.

(요즘엔 교실에 들어가자 마자, 정리하자고 말하면, 자리에 앉으면서 모두 노래를 부르는데, 'go west' 라는 월드컵 응원가에 우리 반 한 녀석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대충 정리를 해 가면서 간단히 전달사항을 말하면서 끝내고 인사를 한다.

내가 "반장아, 마치자~! " 이렇게 말하면,

반장이, "2학년 O 반" 이라고 외치고,

나머지 학생들이 "짝 짝짝 짝짝짝짝 짝 짝짝 짝짝" 박수를 친다.

그리고 모두 양팔을 머리 위로 45도 방향으로 들면서 우렁차게 말한다. 

 "사랑합니다."

그러면 나도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하트 표시를 하면서 "나도"라고 말한다.

담임을 맡은 몇 년 동안 해마다 종례 인사를 만들었는데 올해 종례 인사가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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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6-1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네요..저런 인사는 첨봐요. .

해콩 2006-06-17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경시켜줘요~

느티나무 2006-06-1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경이라... 그걸 어떻게 구경시켜 줘요... 부끄럽게~! 날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답니다. ㅜㅜ
 
글쓰기의 즐거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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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끔, 그것도 지나가는 말투로 글을 써보라고 한다. 선생의 말에 혹해서 처음엔 의욕에 가득 찬 녀석들의 눈망울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힘이 없다.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어쩌다 아이들이 써 온 글을 볼 때, 선생으로서 아쉬움이 많이 든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 고치고 싶은 부분이 금방 눈에 띄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빨간 펜을 집어들고 싶어진다. 역시 내가 쓰는 것보다 남의 글을 읽고 고치는 게 훨씬 쉽다.

나도 가끔씩 쓰는 리뷰를 비롯한 작은 모임의 주제발표문, 편지글을 비롯한 자잘한 일상사를 기록하게 되면서 알았다. 글쓰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내가 좋아서 쓰는 이 짧은 글쓰기만 해도 어쩔 땐 텅 비어버린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자책해 보지만, 그래봐야 내 머리만 아플 뿐, 소용없는 일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아이들에게 글을 써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내가 쓰는 척이라도 해 보니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렇게 앉아서 지난 주말에 읽었던 '글쓰기의 즐거움'-교수 강준만의 표현대로 말하면 ‘글쓰기로 세상보기’의 즐거움-이라는 글쓰기 방법에 대해 소개한 책을 덮고, 스스로는 이렇게 글쓰기의 괴로움을 절감하며 ‘글쓰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은 내 느낌을 말하려고 하니 모순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왜 괴로운데도 글을 쓰려고 애쓸까?’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지식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중략) 글은 엉켜진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해 주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또 이 생각을 저 생각으로 옮기는 능청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 글쓰기가 논리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운다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내가 쓰는 다른 모든 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알라딘에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답을 이 구절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다면,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처음에는 책을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씩 글을 쓰다 보니, 책을 읽을 때 들었던 생각과 감정보다 조금 더 정리된 사고와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도 글을 쓰다보면 그냥 툭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다. 나는 어느새 책을 읽어서 얻는 지식과는 따로, 글을 씀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던-그러나 생각의 표면으로 떠올리지 못했던- 조금 더 깊은 생각을 조직했을 때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알라딘에서의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지만,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예전에도 글쓰기 방법을 다룬 책을 한 두 권 정도는 읽어 보았는데, 그것과 대비해 보면 이 책의 전개 방식이 독특하다. 대체로 글쓰기 방법을 다룬 다른 책들은 교과서적인 글쓰기의 틀을 가지고 독자가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혹은 독자에게 세련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방향인 것에 비해, 이 책은 마치 실전을 코앞에 둔 이종격투기 선수의 연습처럼, 실제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영역을 전략적 사고, 심리적 유혹, 감정의 통제, 수사학과 국어학, 시사 논쟁의 이해라는 장으로 나누고, 학생들의 글로 예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 1장, 전략적 사고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쓰기의 다양한 방법을 전략적 사고라고 알려주고, 글쓰기에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로는 글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적인 의사소통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몇 가지 방법으로 잘된 인용과 정확한 통계를 인용한 글쓰기, 인상적인 도입부 작성하기, 브레인스토밍과 배경지식 넓히기, 전체의 흐름이 논리적으로 잘 연관된 글쓰기 등을 예시 글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 2장, 심리적 유혹에서는 글쓰기에서 자신의 익숙한 심리상태를 의심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타성이나 관성에 젖은 생각을 관리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몇 가지 방법으로 ‘흑백논리’, ‘거대담론’, ‘도식주의’에 빠지는 것과 지나친 구어 중심의 글쓰기를 경계해야 하며 충분히 이해해야 쉬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예를 들어 잘 보여준다.

제 3장, 감정의 통제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엄격히 통제한 글이라야 좋은 글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논쟁에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비분강개, 감정의 과잉, 극단적인 어휘선택과 같은 감정에 빠지는 경우는 자제하고, 때로는 ‘억지 주장’도 참으면서 끝까지 듣거나, 대상과의 고통스러운 ‘거리두기’를 통해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제 4장, 수사학과 국어학에서는 글쓰기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수사학 기법과 국어학적 측면을 다루면서, 말하려고 하는 ‘무엇’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글쓰기에서 형식과 수사학이 중요한 시대이며 ‘완곡 어법’과 ‘다문화주의 언어 사용법’의 의미와 효과, 모순어법과 사자성어의 묘미에 대한 예가 아주 풍부하다. 문장의 주어와 술어의 호응 같은 문법 사항은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강조한다.

제5장, 시사 논쟁의 이해에서는 배경지식을 갖춘 글쓰기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평소 시사 주제를 대해 많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시사 논쟁에 대한 학생들의 글을 평가한 예시를 들고, 뒤에 주제별 토론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강준만 교수의 여러 책처럼 전체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여느 글쓰기 방법을 다룬 책보다 내용이 어렵지 않고, 구체적이어서 나같은 초보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나에게는 이 책을 통해 글쓰기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 점도 큰 소득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내 글쓰기의 두려움과 고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해 나에게 손바닥만큼의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언제나 글을 쓸 때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주의 사항들이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에서 열심히 ‘리뷰’를 쓰시는 분-특히, 논쟁적인 글을 좋아하시는 분-도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글쓰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깨달아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뱀발

‘강준만’ 이라는 이름의 아이콘은 분명한 당파성을 상징하고 있는데도, 이 책의 서문에서는 학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할 때는 ‘중립’을 지켰다고 하고, 이 책은 좌우와 여야를 초월해 논리전개의 방식만을 평가대상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 비평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알려진 강준만 교수의 놀랍고도 눈부신 업적은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지만, 이제는 정서적으로 너무 멀어져버린 저자의 ‘중립’적인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그렇지만 나도 ‘중립’적으로, 이 책에 기꺼이 나의 별 다섯 개를 달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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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2-0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교수가 중립을 이야기한 것은, 우리 사회가 너무너무 완전 오른쪽으로 치우쳐있어서, 중립이라도... 하고 이야기한 거 아닐까요?

느티나무 2006-12-0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문제는 정작 중립을 지켜야 할 인간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지요. 그들이야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럴수도 없겠지만. 강교수님의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왠지 늘 손해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니 사족처럼 달았구요. 아무튼 관심, 고맙습니다.
 
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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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소박하게 말하면 남들보다 더 울 일이 많은 삶이거나, 한숨이 더 길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에둘러서 말하면 가난하게 사는 삶이 약간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난은 ‘약한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야비한 인간’처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그 극한으로 몰아가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권리를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 빼앗긴 권리 때문에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래 전에 사 둔 박성우 시인의 ‘거미’를 최근에 읽었다. 알라딘의 독자서평이 좋아서 샀는데 내키지 않아 책장에 그냥 올려두었다가 함께 샀던 책들을 대충 다 읽은 터라 거의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손에 들게 되었다. 책의 안쪽 날개에는 섬세하고 여리지만 단정한 차림의 한 청년이 사색에 잠긴 표정을 짓느라 약간 어색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상투적이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책날개에 적힌 시인의 약력을 훑어보니 또 걱정부터 앞섰다. 71년생. 젊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더 어렵다.

아마도 꽤 여러 종류의 시집을 펼칠 때마다 그랬듯이 이 시집도 시대와 독자를 앞질러간 다른 시인들 때문에, 평범한 독자에 불과한 나 같은 사람의 지적(知的) 능력을 의심하게 되거나, 좌절감만 맛보게 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시는 무엇보다도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서 작은 울림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게 좋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요즘 시집은 대체로 어렵게 느껴져서 읽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전적으로 독자인 나의 무지와 무능을 탓할 뿐,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마시라.) 그래도 시집 읽기를 그만두는 것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느낌이 들어서 가끔씩이라도 읽는다.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 시집에서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중심 내용은 시인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보이는 ‘가난했던 또는 가난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시인-정확하게 말하면 시작 화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게 가난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수렁 같아서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가난한 삶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시에 나타난 가난한 삶은 경험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고달픈 삶, 나의 노동(?), 그 밖에 눈물과 실직 등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분명히 가난 때문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가난 때문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다/ [‘생솔’ 부분]에서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친전-아버지께’] 등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손은 두꺼비 손’처럼 우둘투둘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누에고치에게 안방을 내주고’ 가족들은 헛간을 개조한 방에서 여덟 식구가 살아도, 가난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 번째 가난의 징표로 나타나는 것은 ‘(늙으신) 어머니의 고달픈 삶’이다.

성냥개비가 되어가는 줄 모르는 어머니는/베틀에 앉아 삼베 품을 팔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생솔’ 부분]에서 화자가 어린 시절일 때 본 어머니의 모습에서부터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중략) 막둥아, 맥주 한 잔 헐텨?/다음주꺼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먼 모가지라는디[‘찜통’] 오줌을 끓여서 다친 발을 치료하기 위해 화자에게 맥주를 권하는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가난은 여전한 모습이다.

이런 상황은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잡고 있었어요/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지탱시키려는 듯/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날카로운 호밋날이/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뭐허고 놀긴 이놈아,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어머니’부분]과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아직꺼정은 날품 팔만 헝게 쓰잘데없는 소리 허덜 말아라/ 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반나잘 혹은 한나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난한 현실은 화자 자신도 노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노동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가난 때문에-학교를 다닐 때라도- 일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한 상황인 것 같다.(학비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든, 생계를 위해 노동자가 되었든 말이다.)

딱, 5분만 자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김반장의 시선 피해/미싱 창고로 발을 옮긴다/[‘미싱 창고’부분]에서나 세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나는 자명종 시계보다 10분 늦게 일어났다 현기증이 결근을 유혹했지만 허겁지겁 봉제공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미싱들이 여성용 내의를 쉴새없이 만들어냈다 나는 포장대 위로 올라온 내의를 여덟 시간 동안 기계처럼 상자에 집어넣은 후 그 것들을 창고로 운반했다 트럭이 오면 제품을 실어보냈다 일과는 늘 그렇게 끝났다[귀퉁이 부분]에서 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이렇게 정직한 시들이 좋다. 시인 자신의 가난 체험을 표현한 것이야 특별히 새로울 게 없는 소재지만, 여전히 가난함이나 약하고 여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좋고, 거기에서 느꼈던 감정의 섬세한 결을 드러내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흔드는 시가 좋다.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이 가난의 구체적인 징표들인 노동, 눈물, 실직, 죽음의 상황을 당위의 목소리를 높여 외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더욱 아릿한 느낌을 준다.

시집을 읽다가 팽겨 쳐 둔 경험이 있는 독자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시집을 읽다가 무안해진 독자가 있다면, 앞으로는 시집을 사지 않기로 마음먹은 독자가 있다면,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이 시집까지는 읽기를 권한다.

시인의 다음 시집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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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2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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