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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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소박하게 말하면 남들보다 더 울 일이 많은 삶이거나, 한숨이 더 길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에둘러서 말하면 가난하게 사는 삶이 약간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난은 ‘약한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야비한 인간’처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그 극한으로 몰아가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권리를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 빼앗긴 권리 때문에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래 전에 사 둔 박성우 시인의 ‘거미’를 최근에 읽었다. 알라딘의 독자서평이 좋아서 샀는데 내키지 않아 책장에 그냥 올려두었다가 함께 샀던 책들을 대충 다 읽은 터라 거의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손에 들게 되었다. 책의 안쪽 날개에는 섬세하고 여리지만 단정한 차림의 한 청년이 사색에 잠긴 표정을 짓느라 약간 어색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상투적이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책날개에 적힌 시인의 약력을 훑어보니 또 걱정부터 앞섰다. 71년생. 젊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더 어렵다.

아마도 꽤 여러 종류의 시집을 펼칠 때마다 그랬듯이 이 시집도 시대와 독자를 앞질러간 다른 시인들 때문에, 평범한 독자에 불과한 나 같은 사람의 지적(知的) 능력을 의심하게 되거나, 좌절감만 맛보게 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시는 무엇보다도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서 작은 울림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게 좋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요즘 시집은 대체로 어렵게 느껴져서 읽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전적으로 독자인 나의 무지와 무능을 탓할 뿐,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마시라.) 그래도 시집 읽기를 그만두는 것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느낌이 들어서 가끔씩이라도 읽는다.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 시집에서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중심 내용은 시인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보이는 ‘가난했던 또는 가난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시인-정확하게 말하면 시작 화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게 가난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수렁 같아서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가난한 삶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시에 나타난 가난한 삶은 경험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고달픈 삶, 나의 노동(?), 그 밖에 눈물과 실직 등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분명히 가난 때문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가난 때문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다/ [‘생솔’ 부분]에서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친전-아버지께’] 등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손은 두꺼비 손’처럼 우둘투둘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누에고치에게 안방을 내주고’ 가족들은 헛간을 개조한 방에서 여덟 식구가 살아도, 가난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 번째 가난의 징표로 나타나는 것은 ‘(늙으신) 어머니의 고달픈 삶’이다.

성냥개비가 되어가는 줄 모르는 어머니는/베틀에 앉아 삼베 품을 팔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생솔’ 부분]에서 화자가 어린 시절일 때 본 어머니의 모습에서부터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중략) 막둥아, 맥주 한 잔 헐텨?/다음주꺼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먼 모가지라는디[‘찜통’] 오줌을 끓여서 다친 발을 치료하기 위해 화자에게 맥주를 권하는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가난은 여전한 모습이다.

이런 상황은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잡고 있었어요/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지탱시키려는 듯/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날카로운 호밋날이/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뭐허고 놀긴 이놈아,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어머니’부분]과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아직꺼정은 날품 팔만 헝게 쓰잘데없는 소리 허덜 말아라/ 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반나잘 혹은 한나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난한 현실은 화자 자신도 노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노동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가난 때문에-학교를 다닐 때라도- 일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한 상황인 것 같다.(학비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든, 생계를 위해 노동자가 되었든 말이다.)

딱, 5분만 자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김반장의 시선 피해/미싱 창고로 발을 옮긴다/[‘미싱 창고’부분]에서나 세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나는 자명종 시계보다 10분 늦게 일어났다 현기증이 결근을 유혹했지만 허겁지겁 봉제공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미싱들이 여성용 내의를 쉴새없이 만들어냈다 나는 포장대 위로 올라온 내의를 여덟 시간 동안 기계처럼 상자에 집어넣은 후 그 것들을 창고로 운반했다 트럭이 오면 제품을 실어보냈다 일과는 늘 그렇게 끝났다[귀퉁이 부분]에서 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이렇게 정직한 시들이 좋다. 시인 자신의 가난 체험을 표현한 것이야 특별히 새로울 게 없는 소재지만, 여전히 가난함이나 약하고 여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좋고, 거기에서 느꼈던 감정의 섬세한 결을 드러내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흔드는 시가 좋다.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이 가난의 구체적인 징표들인 노동, 눈물, 실직, 죽음의 상황을 당위의 목소리를 높여 외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더욱 아릿한 느낌을 준다.

시집을 읽다가 팽겨 쳐 둔 경험이 있는 독자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시집을 읽다가 무안해진 독자가 있다면, 앞으로는 시집을 사지 않기로 마음먹은 독자가 있다면,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이 시집까지는 읽기를 권한다.

시인의 다음 시집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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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2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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