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리 학교 미술선생님의 작품 전시회(개인전)가 마지막 날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며칠 전에 다 다녀오셨고, 나만 못 가고 있어서 어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가 오후 늦게서야 집을 나서게 되었다.

   일단 전시회에 들고 갈 화분을 하나 사기로 하고 가까운 꽃집에 들렀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근처의 대형 마트까지 걸어가서 그 안에서 있는 꽃집에서 화분을 샀다. 처음부터 어떤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머니가 권유하는 대로 사다보니 생각보다 큰 화분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다 아무 생각도 없이 주황색 비닐 봉지까지 씌웠으니 들고 나오면서도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들고 걸어가기는 뭣해서 택시를 탔다. 전시회장에 금방 닿았다. 화분을 들고 전시회장을 걸어가니 다행스럽게도(?) 미술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슬그머니 들어가서 화분을 전시장 가운데다가 아무도 몰래 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색깔들이 참 따뜻하게 느껴진 게 인상적이었다. 천천히 그림을 보면 한 걸음씩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약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술선생님께서는 올해 전근오셔서 나와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어찌나 과묵하신지... 말 붙이기가 쉽지 않다.) 미술선생님께서 친구분과 말씀을 나누고 계신 듯했다. 나는 눈치를 슬글슬금 보면서 옆으로 걸었다.

   결국 미술선생님의 눈길을 피해다니느라 그림은 그림대로 편안히 못 보고 말았다. 대신 방명록에다 다녀간 흔적만 남겼다.(화분 이야기는 쓰지도 못했다.) 나올 때 보니까 미술선생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는 게 보였다. 얼른 옆 공간의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물을 좀 둘러보는 동안, '내가 왜 이러나'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조금 있다가 전시관을 나와 근처의 서점으로 가는 지름길로 가려다가 거기서 미술선생님과 친분이 있는 듯한 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시길래 바로 뒤돌아서 다른 길로 가 버렸다.

   동네 서점에 들렀다. 만원 짜리 도서상품권이 생긴 덕에 모처럼 동네 서점에 들른 거였다. 서점 안에서 책을 고르면서도 내내 오늘 일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는 행동이었다. 책도 잘 골라지지 않아서 시집 두 권 고르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한 권은 선물용으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골랐고, 다른 한 권은 내가 읽으려고 토종닭 연구소라는 시집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또 피로가 몰려왔다. 만사를 제쳐두고 잠을 잤다. 저녁 늦게 깨니 또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평소에 약간 수줍음을 타고, 부끄러움도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근데 우스운 일은 이런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도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 맞는지?) 아내와 오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역시 황당해 한다.

   가끔씩 이런 날이 있다. 바보 짓 하는 날! 어제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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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0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짓이 아니라 예쁜짓 같은데요, 미술 선생님이 그 마음 아셨음 좋겠어요..^^

아영엄마 2006-06-0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셨으면 인사라도 나누시지 그렇게 피해서 다니셨어요. ^^

425000

느티나무 2006-06-0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아니에요. 후회막급~! 이젠 안 그래야죠. ^^
아영엄마님, 고맙습니다. 센스가 대단하세요. ㅎ 25000을 지났네요. 별 것도 아닌 숫자인데... 저게 사람으로 생각하면 두렵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