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본가에 들러 자동차를 빌렸다. 일요일에 아내와 바람 쐬러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기분이 살짝 좋아진 것 같다. 아내는 어디를 가든 상관이 없다고 한다. 이제 고민은 나의 몫이다.

   사실, 이번 방학에는 제대로 집 밖을 나선 적이 거의 없다. 뭐, 집안 사정도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집 안에서 뒹구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아는 나 때문이다. 이번 방학엔 어디 나서는 게 그렇게 싫어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니, 몸에 군살도 붙고 생각도 게을러지는 게 역시나 지나고 나니 약간 후회가 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일요일 아침, 놀러가기로 한 날 아침인데도 늦게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 때까지도 우리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섰다. 자동차에 밥을 먹이면서 우리는 지리산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진주를 거쳐 단성IC를 빠져나온 우리는 산청 남사 예담촌에 들렀다. 남사 예담촌은 제대로 준비하면  멋진 민속마을이 될 수 있을 듯 하나, 현재는 덩그러니 마을만 있는 상태였다.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기는 어려워서 마을만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단속사지'로 갔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의 절이 있었던 터인데, 고즈넉한 시골 마을길 옆에 지금은 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고 있는 탑만은 옛모습 그대로 솟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내와 오후 햇볕이 따사로와 봄이 성큼 달려와 있는 밭고랑 사이를 걸으며, 꿈결 같이 '이런 곳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속사터를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길을 계속 달려서 찾아간 곳은 산청의 '율곡사'라는 절이었다. 율곡사야 말로 '단속'의 이미지가 어울리는 절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웅전 하나 만큼은 멋지게 지어졌다는 말과 대웅전의 꽃살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내심 기대가 컸으나 아쉽게도 이미 수리를 마친 뒤여서 꽃살문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인적 없는 대웅전에 혼자 앉아 불경을 외는 소리와 목탁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아내와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산청에서 합천으로 넘어와 황매산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터'를 들르기로 했다. 사실, 영암사터야 이번 나들이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삼가면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식당이 문을 닫아서 영암사터 아래까지 와서야 '보리밥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슬금슬금 걸어서 절터에 닿았다. 언제 보아도 귀엽고, 토실토실한 쌍사자 석등이 단연 돋보인다.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과 무지개형 돌계단은 그 옛날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유감 없이 보여주는 멋진 유물들이다. 지금 터에 남은 유물을 보면 기암괴석들이 불꽃 같이 솟아있는 모산재를 배경으로 한 영암사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유추하고도 남는다.

   영암사터에 해가 지기 시작한다. 폐사지의 무상함을 느끼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 영암사터 서쪽에 있는 서금당터에도 들르고 다시 절터를 돌아 내려왔다. 어느새 해는 많이 기울었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합천까지 왔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서진주까지 국도를 달려 고속도로에 들었으나 이내 정체! 이유를 알고 보니 교통사고가 났었다.

   마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천천히 달려서 본가로 갔다. 부모님은 외출 중이시라 자동차만 돌려드리고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의 나들이라 아쉬웠으나, 하루치고는 꽤 쏠쏠한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다.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나면 그 기운이 꽤 오래 간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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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3-01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속사지, 엄두도 못 낼 이름인데 어쩐지 궁금하네요. 여유로운 나들이였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