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잠으로 날렸다. 굳이 '날렸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으나, 그냥 잠으로 보낸 시간이 아까웠다는 말이다. 지난 밤은 정말 잠을 설쳤다. 방에 들어 온 귀뚜라미 탓이다. 귀뚜라미 소리가 시끄럽기도 해도, 신기하게 여겨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새벽녘까지 깨어있게 되었다. 그 핑계로 게으름을 만끽했다.

   숙소를 나와 날씨를 보고, 우선 수퍼에 들러 물을 한통 샀다. 마침 얼려놓은 생수가 있는지라 냉큼 집어들고, 더 살게 없나 싶어 기웃거리가 탐스럽게 잘 익은 자두 두 알이 포장되어 있어 간식으로 먹으려고 그것도 샀다. 너무 늦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늦었는데도 자꾸 동네만 서성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집, 흔한 중국집이다. 이 동네 자장면 맛은 어떤가 싶어서 맛보기로 했다.

   평범했다, 자장면은. 내가 자장면을 먹는 동안, 아들 딸과 투닥거리며 점심을 챙겨주는 자장면집 아주머니를 보면서 '행복'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고단해 보이기도 하고, 즐거워보이기도 한데 저런 게 행복일까? 평생 자장면을 만들면서 살면 행복할까?를 생각했다가 근본적으로 이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평생 무엇을 하면서 살면 행복할까,로 질문할 때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것은 행복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했던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지금 행복해?

   어제 걸었던 곳까지 가는데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처음엔 내 이야기를 주로 하다가 아저씨께서 말씀하시는 게 예사롭지 않아서 뭘 하시는 분이냐고 여쭈니 '목사'라고 하셨다. 이후부터 이어지는 설교 아닌 설교! 일정 부분 수긍하는 점도 있고, 또 나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씀도 하신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저렇게 살면 살아있는 동안 행복함을 느끼기는 참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부터 걸어야 하는 길은 함평에서 영광까지 약 25km정도이다. 정상적으로 걷는다면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오늘처럼 햇볕이 짱짱한 날에는 아무래도 쉬는 시간이 많을 것이니 시간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혹시나 중간에 오르막이 가파르다면 또 더 많은 시간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걸은 길은 대부분 평탄하면서도 아름다운 길이었다. 나는 이 평범한 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중간에 더위도 식힐 겸 삼거리 수퍼 앞 평상에 앉아 쉬었다. 옆에는 함평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신다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버스 정류장은 반대편이었으나 그곳은 그늘이 없어서 수퍼 앞에 앉아 있다고 하셨다.  조금 후에 군내버스가 왔으나 그 버스는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걸 보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버스가 두 번째 그랬다고 하시며, 이번에는 덥더라도 건너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시며 걸어가셨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버스는 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나는 할머니의 그 끈질기게 버스를 기다리시는 모습을 존경과 안쓰러움으로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셨던지 주저앉았다. 할머니가 점점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오후 늦게 걸려온 전화 때문에 약간 바쁜 일이 생겼다. 이렇게 급히 인터넷을 써야할 땐 우체국이 젤 좋다. 그러나, 시골 우체국에서 느껴지는 한적함이 오늘은 약간 짜증스러웠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급한 일은 해결했고, 근처 농협마트에 들러 더위를 식히고 나니 어느새 해가 설핏 기운다.

   차들도 뜸하고, 걸으면서 늘 보던 풍경이다. 새삼 사진기를 만지작거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은 나에게 새롭게 느껴지는 '무엇'이 없었나 보다. 이 새로운 무엇은 도보여행 일상에서 벗어나 있어 내가 깊은 '인상'을 받았거나 지금까지 못 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인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여행객인 나에게는 인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난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늘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려고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 여행 중에 받은 인상을 우리는 자신의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인상은 근본적으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일상을 인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일상을 담지 않은 인상은 그 사람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짜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정된 시간에 영광읍에 도착했으나 그 때부터 다리가 좀 아팠다. 더구나 숙소의 방향을 잘 못 잡아서 엉뚱한 곳을 좀 많이 걸었더니 더 그렇다. 일단 저녁부터 먹고, 숙소를 구했다. 내일 걸으려면 더 늦게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생각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그 순간의 틈새를 뚫고 솟는다. 의미가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아무 곳에도 쓸모 없이 행동하는데 오히려 방해만 될까 걱정이다. 어떤 생각을 하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을 끈덕지게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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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나무 2005-08-1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여행을 하고계시군요. 저는 죽었다깨어나도 못할 도보여행을..마음만이라도 글을보며 따라나서 봅니다. 저는15일 시어른과 동서,형님네,시외삼촌네 가족과같이 설악산에 갑니다. 다리아픈 어른이 있으신지라 되도록 차로 이동하는편이죠.^^그래서 휴가갔다오면 몸이 비대해지는 느낌입니다. 많이먹고 차만타고 잠만자고..그래서 휴가가 싫답니다. 건강유의하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소굼 2005-08-1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주무셨나 모르겠네요

느티나무 2005-08-1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나무님, 휴가가 싫다는 분도 있으니...놀랍습니다. 아마도 정말 잘 노시는 분이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 없을 틈이 없으신 분이시니까요. 월요일에 떠나시는군요. 대식구가 이동하시는데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많이 드신만큼 또 다른 무엇인가를 잘 하시겠지요. ㅋㅋ

느티나무 2005-08-1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1t님, 신경 써 주시는 덕분에 좋은 곳에서 편하게 잘 잤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