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난 다음날의 학교는 이제 막 전력질주를 끝낸 마라토너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아이들의 표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은 어리벙벙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오늘까지는 시험이 끝난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가 보다. 방송에서는 시험에 대해 여러가지 평가가 있는 것 같더라만,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평소처럼 봤지만, 다른 사람이 잘 쳤을까봐 내심 불안한 눈치다.
아무튼 난 오늘은 1교시 1학년 수업시간이다. '진로와 직업' 시간. 중간/기말 고사도 없는 교양과목이다. 지난 두 시간은 가족신문 만들기를 했었고, 오늘은 집단 상담 프로그램으로 배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는 것과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설명하는 수업을 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진지하게 집중해서 놀랐다.
2교시부터는 어제 수능을 친 3학년들이 도서관으로 책을 빌리러 많이 왔다. 책을 빌리기도 하고, 나와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당연히 이번 시험 점수가 안 나와서 걱정과 한숨을 푹푹 쉬고, 성급하게 '재수'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이번 학예전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가요제의 예심을 봐 달라는 부탁도 들어오고, 수시 '구술 고사'에 대한 정보도 물으러 오기도 했다. 당연히, 좋은 책-읽을 만한 핵- 추천해 달라는 부탁도 많았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이야기는 적은 편이고, 그냥 도서관에 앉아서 '노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마음 내키면 도서실의 도우미 어머니들께서 준비해 놓으신 차 한 잔을 건네기도 하고, 잔잔한 음악도 틀어주고-내가 불러준다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말린다- 아이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참 시간이 잘 간다. 그러다가 마음이 잘 맞으면 여러 명이서 영화보러 갈 계획도 덜컥 잡고.-어쩌면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볼 지도 모르겠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도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도서실에 들렀기에 한동안 신나게 놀았다.
오늘 온 아이들에게 도서실에 무슨 차를 있으면 좋겠냐고 했더니, 겨울엔 유자차가 가장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은 가까운 마트에 다녀올 생각이다. 3학년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날은 이제 얼마 없지만-시험이 끝난 고3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주로 견학을 나간다-, 그래도 가끔씩은 도서실을 찾아 올 그 녀석들을 위해 따끈한 유자차 한 잔 준비해 놓고 도서실에서 기다려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