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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살이 어느 때고 그 살아가는 모습이 혼란스럽고 과도기적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을까? 2004년 지금도 우리 사회는 '호주제'를 둘러싸고 시민-여성 단체들과 유림들의 갈등이 첨예하고, 우리 나라의 이혼율을 두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느니 그래서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느니, 출산율이 너무 낮다느니, 너무 쉽게 이혼하는 경우가 잦아 이혼 조정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느니…….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아마도 정도의 문제겠지만, 어느 사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이런 갈등과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아마 17세기 조선사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그랬던가 보다. 이 책을 볼 때 어쩌면 그 사회적 갈등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17세기말에도 새로운 사회 문화적 흐름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삶은 변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 사회 문화적인 변화의 속도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변화의 그것보다 빨랐는가 보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은 사회 문화적 흐름을 더 잘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 시대에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이혼'이라는 상황과 '개가(改嫁)'의 문제로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났으니.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성격적인 결함이 아니라면 시대와의 불화가 원인일 테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당시 사람들도 변화하는 사회와 일종의 불화를 겪은 것이리라.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우리에게 조선 후기의 서민 열녀로 알려진 '향랑'을 통해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 특히 그 중에서도 조선 사회 가족 제도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창문'(窓門)을 내어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향랑' 개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가 안고 있는 조선 후기의 가족 제도와 가족 문화의 문제점을 이해하려는 것이 더 필요한 듯하다.
필자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는 계모의 악행, 아버지의 무능력, 가정 폭력, 이혼, 개가의 문제와 함께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문제도 오롯하게 담겨져 있다. 그래서 '향랑'의 죽음에는 '향랑'의 가족들-특히, 남편-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양반층의 몰이해는 엉뚱하게도 '향랑'을 열녀로 만들어버렸다. 서민층에서는 너무 빨리 사회적 변화를 수용-여성의 개가(改嫁) 금지를 내면화하는 것을 보면-해서 자살에까지 이르렀는데, 양반들은 여전히 '향랑'의 자살을 열녀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적 몽매를 드러내었다.
天何高遠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天地雖大 천지가 비록 크다하나 一身靡託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寧投江水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葬於魚腹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그러나 머리로 이런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연민이다. '향랑'이 죽기 전에 읊조렸다는 백제 시대의 이 노래에 잘 담겨있듯이 그의 짧은 삶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가난한 환경이야 당시의 서민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환경이었을 것이겠지만, 악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되었든 '향랑'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던 계모의 존재와 계모의 눈치를 살피는 무능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파국으로 몰아넣은 그녀의 남편 '임칠봉', 또 향랑의 딱한 처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하거나 개가(改嫁)를 종용하는 시부모와 숙부. 결정적으로 이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시선과 관습은 여자의 이혼에 냉혹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혼한 여자인 향랑의 탄식처럼 '하늘과 땅이 얼마나 넓고도 아득했'을 것인가?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필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체 내용을 이야기로 전개하되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체로 전달하는,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호(好)·불호(不好)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필자의 노력이 우선 반갑다. 아무래도 필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픽션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부족함을 설명체의 논픽션이 깔끔하게 만회하고 있는 것 같다.
용기있는, 새로운 글쓰기 시도를 깔끔한 형태로 담아내었고,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이 돋보이는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시대는 달라졌으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창이 될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