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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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만치 않았던 역사적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한 재일 조선인이 서양미술이라는 도구를 훌륭하게 써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다듬어낸 이 책이 내 마음을 울렸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책과 인물,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더구나 내가 읽었던, 서경식 씨의 앞에 두 책(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유려한 문체도 조금은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의 다음 미술 순례가 기다려진다.

 

   위 글은 2006년 여름에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고 내가 쓴 감상문의 끝부분이다. 이후에도 꽤 여러 권 그의 미술 순례기를 읽었다. 그런데, '서양미술 순례' 만큼의 감동이 없었던 탓인지, 글쓰기에 대한 내 게으름이 더욱 깊어진 탓인지 그의 순례기를 읽고도 흔적 한 번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갓 나온, 미술이 아닌, 음악 순례기를 읽고 다시 내 마음이 흔들거렸다.

 

   처음 책이 나왔다는 광고를 봤을 때는 음악 순례라고 해서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다가, 책을 사고 나서는 반신반의하다가, 책을 읽으면서는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책을 덮고는 꼭 리뷰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물론, 내가 서양미술 순례를 읽고 쓴 리뷰를 읽어 봤는데, 내가 썼던 글에서 미술을 음악으로, 고흐를 말러나 윤이상으로 바꾸면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대신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밝혀두지만, 이 책이 '서양미술 순례'에서 살짝 사고의 도구만 바꾼 그런 태작(怠作)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그의 생각은 지난 30년의 시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양미술을 찾아 방황 같은 순례를 혼자서 다녔던 30대 때나 아내와 여름이면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다니며 서양음악에 듣는 예순을 앞둔 그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30대의 그와 지금의 그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평생을 붙잡아 둔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문제가 여전히 그에겐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어쩌면 변할 수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음악, 그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작곡가, 연주가, 청중 등), 문화, 사회,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 꽤 길게 소개하고 있는 윤이상의 경우나, 특히 유대인인 작곡가 말러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내게는 삼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어서,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어서.

 

   잘 알려져 있는 말러의 말이다. 와인의 취기가 약간 오른 나는 이 말을 F에게 해주면서 "그런 그가 분열된 존재인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고 덧붙였다. "당신과 같군요....." F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녀도 약간 취한 걸까. (257-258쪽)

 

   이미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은 사람은 알 것이다. 저 구절이 저자 자신이 평생 동안 짊어지고 걸어왔던 분열된 자기 존재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을. 게다가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사실을. 길게는 태어나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짧게는 자아의식이 생기면서부터 스스로에게 던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지금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그 질문을 안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운명적으로 변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일본에서도 이름난 에세이스트답게 늘 그의 문장은 정확하면서도 단정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제법 힘든 시간을 보낸다. 이 책뿐만 아니라 그의 책은 늘 그랬다. 책을 덮고 나면 글쓴이의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그의 고뇌는 좋은 문장에서 나온 예민한 감성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더 날카롭게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릿한 아픔 같은 통증을 남긴다. 통증으로 내 마음이 출렁거린다. 이 출렁거림이 평온해지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린다. 그러다가 통증은 가라앉고 평온해진다. 파문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영원하다. 언젠가는 다시 그의 책을 다시 펼치는 날, 그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평온한 마음이 다시 출렁거리는 날이 올 것이다. 더 자주, 더 많이 그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 사족 같은 나의 클래식음악 이야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상반된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낀 적이 있다. 또 클래식이라는 음악을 처음 만나게 되는 계기나 환경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몇 가지 적어 두고 싶다. 서경식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일반적 편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기에, 그리고 스스로 그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갔기에 그 음악을 이해하고 자기 인생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일반적 편견에 머물렀기에, 그래서 그 음악에 다가갈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은 이 음악에 무지하고 인생의 좋은 벗을 사귀지 못한 느낌이다.  

 

1. 어느 날 갑자기 꽤 큰 전축이 거실에 들어앉았다. 아마 1층 슬라브 집에다가 2층을 올려서 우리가 살면서 부모님이 사 놓으신 듯하다. 당연히 부모님은 클래식은 고사하고 그 때만 해도 겨우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는 트로트만 흥얼거리셨는데, 거금 200만원-지금 생각해도 거금인데, 그 때가 80년대 말이었으니-을 들여서 양쪽 스피커가 내 허리까지 오는 전축을 장만하신 거였다.

   시커먼 전축에서 세상의 모든 노래가 들을 것 같은 기세등등한 날도 잠시였고, 곧 버튼식 유리문 틈으로 먼지만 켜켜이 쌓여 있는 듯 없는 듯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제일 많이 전축문을 많이 여닫은 사람이었다. 대중가요 LP를 사기도 했지만, 국악 LP(황병기의 '미궁'을 샀었다), 클래식LP(그래봐야 피아노 소품집이나 베토벤 소나타곡)도 사서 들었다. 물론 동생들은 아직 어렸고 그런 LP를 듣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2.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음악 시험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의 제목을 쓰는 게 있었는데, 그 시험 때문에 골랐다가 하이든의 현악 4중주에 빠져서 카세트 테이프를 닳도록 들었다. 물론, 비발디의 '사계'도 열심히 들었다. 물론, 그 때도 우리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은커녕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작은 관심도 보인 사람은 없었다. 물론 우리 집 거실에 전축은 있다는 사실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 때 우리나라에서 제법 유명해진 '리차드 클레이더만'이라는 피아노 연주가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사람의 피아노 연주곡도 듣게 되고, 문화적 기반이라고는 전무한 대도시 변두리 학교 환경에 한 반에 한두 명이 될까 말까하는 연주곡을 듣는 그런 특이한 취향의 친구들에게 피아노 연주곡에 대해 귀동냥을 하기도 했다. 그 때는(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술술 얘기하는 친구들이 부럽다기보다는, 놀라웠다. (아쉽게도 고등학교 때 기타 말고 다른 악기를 다루는 친구를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3. 대학의 1학년 2학기 예술 분야의 교양수업으로 고른 과목이 서양 음악의 이해, 였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 과 교수님들이 가르치시는 영화나 연극에 대한 이해 같은 수업을 골랐는데, 나 혼자서만 그 수업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업에 대한 기억은 없고, 기말고사로 지금까지 들었던 음악을 들려주고 음악의 제목을 써내는 시험만 기억이 난다.(그 때 답을 제대로 써내지 못해서 장학금-그 때 당시엔 사범대생들은 재학생의 70% 정도가 장학금을 받았다-을 받는 게 위태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업은 제대로 안 들었으면서 시험 문제만 탓했던 못난 기억과 함께 1학년 2학기 교양수업이 끝났다. 

 

4. 그 이후로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접해 본 적이 없다. 음악이 나를 찾아온 적도, 내가 그 음악의 매력에 끌려서 다가간 적도 없다. 그러니 나는 서양음악에 대해선 백지다. 어떤 대상에 대해 무지는 상태는 대체로 그 대상에 대한 편견을 낳는다. 내가 서양음악에 대해 가진 편견과 똑같은 생각을 이 책은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클래식음악을 즐길 수 없고, 악기를 구입하거나 어릴 적부터 전문가에게 배우고 음악학교에 진학해서 해외유학을 가기도 하는, 음악가가 되기 이한 문화적 투자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산층의 세계와 클래식음악의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죽이 잘 맞는다. 중산층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건 클래식음악에 대한 동경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62쪽)

 

  나는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사회적 인식이 지극히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클래식에 대한 내 감정은 막연히 저 정도였다. 난 지금도 여전히 저 정도의 인식 수준에 머물고 말았는데, 서경식 씨는 이미 오래 전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무렵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중산계급의 세계와 클래식음악의 세계는 죽이 잘 맞는다. 하지만 양자를 등식으로 묶을 순 없다. 예컨대 모짜르트는 궁정과 귀족의 비호를 받았기에 수많은 명작을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 곡들은 귀족사회의 가치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음악은 어쩐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69쪽)

 

   결정적으로 그는 음악의 힘을 꿰뚫어 보았으며 음악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음악과 평생의 좋은 친구가 된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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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1-12-12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과 좋은 친구인데요.ㅎㅎㅎ...계급성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측에서는 더욱더 말입니다. 문제는 그런 중산층의 계급성 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베토벤이니 바흐니..하는 것의 고결함만을 이야기하며 자신과 그 고결함을 동치시키는 그들의 천박함에 있습니다. 모두는 아니겠으나...클래식 청자들 보다 클래식 창자들 중에 헛구역질 나오게 만드는 이들 엄청 많습니다.3분만 이야기해도 그 사회의식의 협착함과 그 현실감 없는 고결함과 그리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입신의 비루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아이들에게 tv에만 나오는 대중문화 말고도 다른 문화의 다양함과 풍성함이 있다는 걸 전달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일종의 수혜자근성이 아닌가 성찰하게 됩니다.(실제로 대부분 교육운동이나 하방운동하는 사람들이 갖는 고민입니다.)즉 더 나은 지식이나 문화를 더 낮은 곳으로 전파하겠다는 식의 허튼 생각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을 넘은 지는 좀 오래되었지만, 늘 붙들고 있어야할 문제입니다...^^ 진복이는 건강합니까? 저희 집 아이들은 무럭 무럭 잘 크고 있습니다. 아빠가 몇 주 째 감기등으로 골골거리고 있는데...운동부족에 의한 면역력 약화가 주원인인듯 하빈다.

느티나무 2011-12-12 19:02   좋아요 0 | URL
진복이는 잘 크다가도 가끔 아프고 그렇습니다. 어제도 장염 증세가 있어서 고생했습니다. 저도 콧물이 줄줄 흘러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도한 운동에 의한 면역 기능의 약화가 주원인인듯 한데요 ^^::
시혜의식에 대한 고민은 지난 10년 동안 공부방 교사로 활동하면서 늘 갈등했던 주제였지요. 그래도 항상 제가 내린 결론은 다른 결론이 날 때까지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였습니다.
제가 워낙 클래식 음악과 먼 사람이라 그런 일을 하는 친구는 잘 없었지만, 예전에 제법 친했던 친구 중에 오르간연주가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삶에 워낙 치열한 인간이었던지라, 전 클래식 음악하는 사람을 존경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 음대 옆을 지날 때면 늘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학생들이 있는지 노랫소리나 연주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그게 허수룩하게 대학생활 하던 저를 참 부끄럽게 하더라구요.
제 수준이 딱 요정돕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예술과 계급성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 그걸 넘어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에겐 새로운 친구가 필요합니다.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몸도 마음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