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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어느 분의 페이퍼에서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라는 제목을 보고 따라 들어갔었다. 그 때 한창 수영(水泳)을 배우려던 때라 눈에 번쩍 띄였다. 그런데, 수영이 시인 김수영일 줄이야! 어쨌든 그 페이퍼 때문에 김수영 시집까지 새로 사게 되었다.(예전에 샀던 정지용시전집, 김수영시전집(민음사)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흘러 들어간 지가 10년이 넘었다.)
다시 펼쳐든 김수영의 시집. 그러나, 숱한 시인들의 격한 찬사와 칭송을 받고 있는 김수영의 시집은 내가 읽기엔 아직 문턱이 높았다. 흔히 모더니즘 경향이라고 불리는 초기 시들은 더 읽기가 힘들었다. 몇 차례 건너 뛰며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러니 더욱 시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어느새 불탔던 독파의 욕구는 금방 식어버렸고, 날마다 조금씩 책을 펼치는 시간이 줄어들다가, 다음에는 책을 펼치는 날이 적어지다가, 어느 날은,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는 서가 한 귀퉁이에 '멋있게' 꽂았다. 꽂혀 있다, 지금도!
김수영을 펼쳤던 비슷한 시기, 그 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백석시집도 읽으려고 정본 백석시집을 사서 학교에 들고 다녔다.(읽는 책은 늘 들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자랑 겸 소개한다.) 사실, 백석 시집이야 집에도 두어 권 꽂혀 있지만, '정본'이라는 말에 끌려서 다시 서점에서 샀다. 제법 익숙한 시집을 야금야금 읽어가면서 평소처럼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소개도 하고 그랬었는데, 어느 날인가 책이 없어졌다. 분명 수업시간에 들고 갔다가 교탁에 둔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몰라서 애가 탔다. 며칠이 지나도 책이 돌아오지 않자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교내 메신저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결국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백석 시집을 잊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잃어버린 시집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했는데, 잊을만하면 꼭 한 편씩 백석의 시가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여우난 골족'이니 '여승'이니 '고향'이니 하는 시는 차치하고서도 적어도 대여섯 편은 넘을 것 같다. 그러니 잃어버린 시집이 머리에서 잘 지워지지가 않았다.(잡았다가 놓친 물고기가 가장 크다고 하지 않던가?) 결국 할 수 없이 다시 '정본 백석시집'을 샀고, 며칠 동안 자기 전에 시를 읽었다. 시집을 읽는 밤이 모처럼 행복했다. 그리다가, 맨 마지막 구절에서 울컥!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올해 1년 동안 문제풀이용 지문으로 나온 백석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시렸다가 뜨뜻해지곤 했다. 그래서 유독 백석의 시를 읽을 때면 내 목청이 커지곤 했다. 가르치는 내가 아무리 핏대를 세웠어도 녀석들은 시인이 말하는 가난함이, 외로움이, 또, 쓸쓸함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를 것이다. 왜, 내가 백석의 시를 읽을 때 더 큰 목소리를 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내가 그랬다는 사실도, 심지어 저희들이 백석의 시를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먼 훗날 어느 한 때,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어느 날, 우연히 어쩌면 운명처럼 이 시와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그 날이 오면, 그 녀석도 오늘의 나처럼 백석의 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옛날에 멀뚱하던 내가 오늘 이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 읽은 시 몇 편을 백석시집에서 골라 기록해 둔다.
이미 익숙한 구절인데... 처음 백석의 시집을 읽었을 때도 여기서 울컥, 했는데. 그 때가 이미 10년 전인데... 나는 여전히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짧은 시 구절에서 만금(萬金)에 값하는 위로를 받는다. 나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대목에 잠시 기대서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다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이 삶을 견뎌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굳센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휴식은 주어져야 공평한 일이라고 믿는다.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나도 좋을 것 같다
반찬 친구(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시. 화자는 마음 맞는 친구, 나와 닮은 친구만 같이 있으면 세상 밖으로 나가 살아도, 아니면 세상의 눈 밖에나더라도 나더라도 좋다고 한다. 이런 친구와 함께 있으면 '가난해도 서럽지 않'고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고 한다. 매일 먹는 밥이나 반찬 같이 늘 내 같이 있으면서 나를 닮은 친구,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나는 그런 친구가 있나? ...... 화자가 부럽다. 비록 반찬 친구일지라도!
북신
-서행시초 2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한다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를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믄드믄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나라는 망했지만, 그 나라의 백성들은 여전히 오늘도 그 땅에서 살아간다. 이는 일제에 강제병합된 '조선'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오랜 옛날에 망한 나라 고구려의 유민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비록 또 다시(?)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지만, 그 옛날 만주 벌판을 내달리며 씩씩한 기상을 뿜던 조상들의 후손이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이들은 털도 안 뽑은 고기를 한 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화자는 이 백성들을 보며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나라의 이름과 상관 없이 우리 민족-조상-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으리라. 그러면서 그 지역(북신)에 있었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의 왕들을 생각한다.
적막강산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 동림 구십여 리 긴긴 하룻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화자는 산길을 혼자 걷고 있다. 오늘은 정주 동림으로 가고 있다. 이 길은 오가는 사람이 없는 산길이다. 그러니 '적막강산'이라고 했다. 화자가 이런 적막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그런데 의외로 산 속에서 온갖 새소리들이 들려온다. 산길을 조금 벗어나 들판으로 나와도 다시 새소리가 들려온다. 적막하(다고 생각했)던 산속길이 이런 새소리 때문에 들썩거린다. 그러나 화자 자신은 주변의 이런 들썩거림 때문에 오히려 '나 홀로'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주변 상황과 반대로 화자의 외로움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라는 말로 끝을 맺는데, 나는 저 구절이 어쩐지 '내 마음이 무척 적막하노라'로 읽힌다.
멧새소리
처마 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明太)는 꽁꽁 얼었다.
명태(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가 저물고 날은 차가운 겨울 저녁에 어느 집 처마 끝에 매달아 둔 명태가 꽁꽁 얼었다. 이 명태를 본 화자는 이 명태가 자신과 무척 닮았음을 느낀다. '길다랗고 파리한' 모습과 '길다란 고드름'이 달린 처지가 같기 때문이다. 아마도 화자 자신도 추운 겨울 같은 세상을 고드름을 잔뜩 매달고 꽁꽁 언 채로 살아가고-아니면 명태처럼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명태를 보면서 더욱 '서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제목은 멧새 소리일까?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 책상의 유리판 밑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이 시. 언젠가 알라딘의 페이퍼에도 옮겨 놓은 시다. 살다가 기운이 없을 때면 늘 펼치게 되는 시가 또 바로 이 시다. '굳고 정한 갈매나무'로 살고 싶다는 다짐을, 그렇기에 바위 옆에 외로이 눈을 맞고 서 있을 수 있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해 준다. 다른 길은 없다. 굳고 정하게 살려는 모든 것은 외로이 눈을 맞으며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이 어설픈 리뷰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그 구절로 돌아가 곱씹어 본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