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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 콩
이시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6월
평점 :
우연히 이시백의 전작,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읽고 실컷 웃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의 농촌 현실을 맛깔난 충청도 사투리로 슬쩍 찌르고 눙치는 솜씨가 압권이었다. 읽는 내내 킥킥거렸고 책을 덮고 나서는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자꾸 생각을 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당연히 주변의 지인들에게 멋진 소설이라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다.
그런 작가가 새로운 소설집을 냈다. 야릇한 제목의 갈보 콩. 사실 소설집이 나온 지도 몰랐는데, 알라딘에서 놀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됐다. 이번 소설에서도 전작에서처럼 충청도 사투리의 맛은 농익은 감칠맛이 난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소리내서 따라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사투리 표현력에 있어서는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에 나오는 경북 사투리와 함께 최고다. 경북 사투리가 인물의 생각을 단선적이고 직선적으로 표현해서 아주 효율적인 느낌이라면, 충청도 사투리는 의뭉스럽고, 능청을 떨면서도 상대방의 헛점을 찾아 정확하게 찌르는 느낌이다. 아마튼 이시백 소설에서 충청도 사투리 표현은 단연 최고의 미덕이다. (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충청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는 이 소설가는 정작 충청도에 산 적은 없다고 한다. 기억이 정확한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읽는 재미가 무척 뛰어나다. 책을 넘기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대목도 여러 곳이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곳도 있으며, 나도 같이 한시름 다 잊고 소설 속 사람들과 어울려서 신나게 놀고 싶은 장면도 있다. 또 이러 장면들을 글로 옮겨 놓을 때는 마치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써 온 것 같은 농촌 생활이 반영된 탁월한 표현이나, 상황에 적절한 해학과 풍자가 곁들여 져서 읽는 내내 싱글거리게 된다. 흠, 나도 이런 표현을 기억했다가 어디 써 먹을 때가 없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들 정도였으니까... [갈보 콩이라는 작품을 보면, 여든이 다 된 할머니가 아들이 하는 식당의 손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맷돌을 돌리는데, 날이 너무 더워 "이젠 더 못하겠다. 기생 말년에 거시기 큰 놈 만나서 고생한다더니" 이런 표현이 나오던데, 읽다가 속된 말로 빵, 터졌다. 근데 이 분은 어디서 저런 표현을 배웠을라나?]
이시백의 소설에 나타나는 농촌의 현실은 도시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아름다운' 농촌은 없다. 이곳에도 4대강 사업이다, 농촌체험마을 조성이다, 골프장 건설이다 해서 개발의 광풍이 불고, 이에 따라 시골 사람들도 이런 개발 열풍을 빌려 한 몫 잡으려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 떄를 틈타 어떻게든자기 몫(?)을 챙기고자 이런 저런 일들을 벌여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인물들이다. (단편, 두물머리가 그렇고, 물레방아 노래' 역시 그렇다.) 이들이 맞서야 하는 농촌의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은 셈이다.
작가는 오늘의 이런 농촌 현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쌀 직불금 파동을 다루고 있는 '송충이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라는 작품을 보면, 그 당시 뉴스에서는 단순히 직불금 부정 수급 문제만 줄기차게 다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학교는 못 다녔지만 세상 이치에는 누구보다도 밝은 농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기 있다. 그렇기 때문에 ' 직불금'로 상징되는 농정의 무능함과 정책의 허구성이 여지 없이 드러난다. 이런 농민의 목소리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짜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놀라웠다.
소설의 내용과는 별로 상관 없지만, 책 뒷면의 해설에서 '민중 서사' 같은 말은 이물감이 든다. '민중 서사'라고 하면 왠지 도식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은가?(나만 그런가?) 이미 있는 말로 이 소설을 끼우려다 보니까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내용에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다. 또 하나, 이곳저곳에서 자꾸 이문구의 빈자리를 채운다, 라는 표현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이시백은 이시백일 뿐! 이것 역시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튼 그리 많은 소설을 읽어 본 건 아니지만, 최근에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이다. 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책이고, 아마도 좋은 책 권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이제 작가의 다음 작품은 미리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