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쌀한 ‘낙동’의 귀한 인연을 추억하며…….

                                                                  느티나무(15회 졸업생, 전 낙동고 교사)

 

낙동고 - 질기고도 아름다운 인연

   교지담당 선생님의 원고청탁을 받자마자 ‘쿨’하게 알겠다고 했을 땐, 어떻게든 그냥 쓰면 되겠지, 싶었는데, 쓰겠다고 말해 놓고 벌써 근 보름동안 손도 대지 못했다. 어떤 날은 두 시간도 넘게 컴퓨터에 앉아 있어도 기껏 서너 줄 써놓고 딴 짓만 하기 일쑤! 그것도 다음 날이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웠으니 결국 한 줄도 못 썼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담당 선생님께 못 쓰겠다는 문자를 보내려는데, 소심한 나는, 못 쓰겠다,는 말 대신에 시간을 좀 더 달라는 내용을 덜컥 날리고 말았다. 이런 젠장! 이젠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쓰긴 써야 이 마음의 돌덩이가 내려갈 것이다. 에휴, 쓰자. 한 번 써 보자.

   나와 낙동고와의 인연. 흔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1988년 3월 입학해서 1991년 2월까지 낙동고를 다니는 동안은 그야말로 코흘리개(?) 어린애가 온전히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 어른이 되는 성장통의 시간이기도 했고, 지금의 내 생각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곳이며, 힘든 인생길을 오래도록 함께 걷는 멋진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았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2005년 3월에 낙동고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돌아왔다. 정말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탕아(?)의 귀향(歸鄕)이 이런 기분일까? 그 때부터 4년 동안 후배들인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담임교사로, 국어교사로, 동아리교사로 여러 인연이 만들어졌고 학교를 떠난 지금도 일부는 그 인연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또 낙동고에 있었던 지난 4년 동안 나에게 귀감이 되는 동료교사들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고 겸손했더라면 지금보다는 괜찮은 ‘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9년 3월, 나는 낙동고에서의 4년 근무를 마치고 인근의 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새 학교에서도 자주 1년 동안 같이 수업했던 낙동고 3학년들의 풍문도 듣고, 동네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가끔은 같이 근무하면서 좋아했던 선생님들과 연락이 닿기도 한다. 더구나 오늘은 ‘낙동’에서 맺은 인연을 생각하며 ‘낙동’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밤을 새고 있으니, 나와 ‘낙동’과의 인연은 참, 보통 인연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내용은 낙동고에서 보낸 그런 달콤하면서도 행복한 추억-당연히 좋은 기억이 대부분이지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 한곳의 아픈 기억이고, 그 아픈 기억 때문에 한동안 무기력과 허탈함에 빠졌던 우울한 내용이다. 이 글의 내용이 담당 선생님의 청탁 의도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낙동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맨 먼저 떠오르는 어떤 사건! 그 사건을 빼고 다른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뭔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내 보려고 한다.

   사족이지만, 이 사건은 시간상으로 보면 아득한, 근 20년이나 된 옛날에 일어난 일이지만, 요즘 뉴스와 지상(紙上)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건을 자주 볼 수 있어 나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1990년, 낙동고 3학년,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내가 고 3이었으니까, 음, 그 때는 1990년이었다. 나 역시도 정신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학력고사를 앞두고 선지원(先支援)할 대학교를 고르기 위해 일주일 간격으로 네 번 치는 배치고사는 한 달도 남지 않았기에 모두들 마음에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해는 수험생도 역대 최다라고 떠들어대서 수험생들 모두가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날을 10월 9일로 기억하는데(아니면, 10월 3일이었을 것이다.), 휴일이었지만 학교에 나와 자습한답시고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은 여느 휴일과 학교의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고등학교 정문 근처에 전투경찰부대가 한동안 쫙 깔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 3이던 그해는, 6월 항쟁이 있던 그 다음해였으니까 전투경찰이야 텔레비전 속에서 익숙했지만, 이런 변두리 고등학교에서 전투경찰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있다 전투경찰 부대가 사라지자 술렁였던 학교도 이내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해져서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던졌다.

   다음날, 등굣길도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두들 모여서 웅성웅성. 내 책상에 가방을 놓고 앉기도 전에,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소리 -- OO이가 잡혀갔다더라. 아니다, OO이는 집에 있는데 학교를 못 나온다고 하더라. 학교에서 못나오게 했단다. 교육청에서 퇴학, 아니 제적시키라고 학교에 요구했대. -- OO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나와는 단짝은 아니었지만, 꽤 친했던 친구였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아니, 왜? -- OO이가 부고협(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어제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대. 교육청에서는 고등학생이 (허락 없이) 집단행동을 하고 또 OO이가 읽은 ‘성명서’의 내용도 문제 삼아서 징계하기로 했다더라. 어제 전경이 우리 학교에 온 건 그 ‘성명서’ 발표를 우리 학교에서 하기로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래.

   이날부터 ‘OO이 징계 반대’를 내걸고 수업 거부 돌입. 전교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첫날 오전은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다. 오후가 되자 1,2학년은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받았다. 꼬박 하루를 3학년만 운동장에 남았던 거 같다. 다음 날은 수업을 거부하고 교실에서 버티고 있는데, 3학년 이과 반도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문과 반 네 반만 그렇게 하루를 더 버텼다. 사흘째가 되자 우리 반만 빼고 세 반은 수업을 했다.

   우리 반은 책상을 뒤로 돌려놓고 앞문을 잠그고 교실에 앉아서 자습을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미리 알고 우리 교실로 올라오시지 않았다. 어쩌다 오신 분들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미 상처받은 우리 마음엔 그 말씀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책상을 돌리고 일주일을 더 버텼다.(그러니까 우리는 열흘 동안 ‘수업 거부’를 했다.)

   그 사이에 형사가 자주 학교를 다녀간다는 무서운 소문도 들리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교무회의에서 ‘OO이 징계’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시면서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고, 그사이 ‘OO이의 제적’이라는 징계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란 우울한 소문도 바람을 타고 교실 문턱을 넘어왔다. 조금 더 자세하게, 학교는 교육청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교육청은 학생의 징계는 학교장의 권한이라는 뻔한 소리로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도 이내 우리들의 입을 타고 건너다녔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고 분개했던지!

   아니, 우리는 누가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이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어디서든 난상토론을 벌였고, 열흘 째 되는 날 오후에 학생들의 투표로 다음날부터 수업 복귀를 결정했다. 수업에 찬성한 학생이나 반대한 학생이나 아무도 수업 복귀 결정에 대해서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냥, 부당한 힘에 졌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학교와 선생님이 싫어졌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싸움을 통해 학교 밖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싸움에서도 이렇게 지는구나, 하는 그 쓰라린 경험은 어린 나에게 적개심을 넘어 공포감,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진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기운을 잃어버렸다. 변명 같지만, 그 이후로 대학을 다닐 때 자주 일어난 시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 옳은데도, 싸움에서는 질 수 밖에 없다는 그 절망감을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그 상실감을 딛고 평상심으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날부터 수업은 시작되었으나 그 어느 선생님도 그 열흘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분은 없었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그만두셨고, 우리 반 아이들은 진학 상담을 낯선 선생님과 해야만 했다.(사실, 선지원시험제도라 입시 상담이 아주 중요했는데 다들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담임선생님으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우리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고, 입학하기 전에 딱 한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댁을 찾아간 기억은 또렷하나 다른 내용은 흐릿한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서 'OO이‘ 이야기는 거의 안 나왔지 싶다. 그만큼 우리에겐 상처가 깊었다.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게 잊힌 것처럼 보였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그냥 잊고 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 사범대에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 드디어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0년 10월의 어느 가을날의 그 사건이었다. 잊은 듯 했던 그 기억이 그렇게 또렷이 떠올랐다. 여전히 아릿한 기억. 그 아릿한 기억 너머로 떠오르는 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친구들……. 나에게 ‘낙동’은 그런 곳이다. 

낙동고를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이 아릿한 기억과 자랑스러운 내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밑절미 삼아 올해 낙동고를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흔하디흔한 잔소리 같은 당부를 해 본다. 이 당부가 내가 너희들과의 짧은 1년간의 인연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너희들은 어릴 때부터 ‘리차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을 테지? 우리는 그 책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의 놀라운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우리도 더 멀리 날수 있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고는(배우고는) 했다, 그렇지? 조나단이 겪게 되는 시련과 따돌림마저도 얼마나 멋있어 보이고, 거기에 반해서 조나단을 비웃고 배척하는 다른 무리의 갈매기들은 어찌나 답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지. 나도 어릴 때는 책을 읽으며 조나단을 따돌리는 다른 갈매기를 실컷 비웃는 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너희들이 조나단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에게 감히 부탁하고 싶다. 갈매기 ‘조나단’처럼은 아니더라도 조나단의 꿈을 비웃는 뭇 갈매기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은 앞에 쓴 내 기억을 곱씹어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너희들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이니 거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괴롭더라도 우리는 높을 날고 싶은 갈매기처럼 항상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꿈은 오늘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별과 같은 존재이지.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향해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 고통과 시련이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일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자기 마음에 선한 꿈을 품고,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 너희들이 바로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을 지닌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워서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마도 너희들은 현실에서 가슴으로 느껴볼 기회는 적었을 것이다. 앞으로 대학과 사회에서는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많은 지식을 담아갈 수 있기를 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제부터는 지금껏 배운 지식들이 너희들의 눈앞에 현실 상황으로 펼쳐질 것이고, 너희는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네 지식을 검증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껏 네가 배운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네 배움이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부디 세상을 냉철한 이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너희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에 온기가 돌게 했으면 좋겠다. 네가 가진 고운 마음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사는 것이, 결국은 네가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빨리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정말 작별의 인사를 건네야 할 시간이구나. 씩씩한 기상과 착한 마음을 지닌 낙동고 후배들! 그래서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너희들이 대견스럽고, 바라보는 내 마음이 뿌듯하다. 네 앞길의 시련과 고통에 맞서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모두들, 안녕!

   아쉽고 두려운 마음도 들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졸업은 겪어야할 일이다. 너희들의 졸업을 진심,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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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10-02-1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마다 교지가 만들어질 때는 글 좀 써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물론 내가 담당자면 부탁을 하기도 한다.) 학생이나 교사들도 글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 그래서 난 항상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다.-저렇게 머리를 쥐어 짜면서도 말이다- 올해는 근무하는 학교의 교지담당 선생님이나 학생으로부터 어떠한 청탁도 받지 못 했다.ㅠㅠ 그런데 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선생님께서 글 한 편 써달라고 하셔서 쓴 글! 맨날 교지에 하는 말을 짜깁기한 거다. 이것도 자기표절에 해당하려나?ㅋ 원고료도 준다는데...ㅋ

석란1 2010-02-1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설 잘 쇠셨습니까? 복많이 받으십시오. 올 해는 윗 지방에 눈이 많이 와 귀향할때 꽤 고생했습니다. 눈을 잘 볼 수 없는 부산에 사는 관계로 체인 준비도 않고 시골로 출발했다가 차창에 다가드는 눈 뭉치때문에 기어서 가다싶이 차를 몰아야했죠. 덕분에 눈구경은 실껏했답니다. 올 한해도 소망하시는 모든일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느티나무 2010-02-19 15:43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저도 올해는 눈, 구경 실컷 했습니다.(안나 푸르나 가서...)
근데 눈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네요.(부산에 살아서 그런가 봐요.)전, 지금 봄방학 중인데, 방학이 방학이 아니네요.ㅋ 학교 나와서 일하고 있음... 아무튼 올해는 쉬어가고 싶은데, 벌써 조짐이 어려울 듯 싶습니다. 헤휴~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