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서 잠들다 

   오늘은 편지가 좀 이르지요? 조금 더 가야하는데 성산봉 앞이라 그냥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을 생각하면 마음은 조금 급하지만 내일 우도에 들어가 볼 거라면 역시 여기(성산읍)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오늘도 늦게 일어나 '시간아, 네 마음대로 흘러봐라!'는 듯이 느릿느릿 챙겨서 숙소를 나왔습니다. 서귀포 시내 중심가-그래봐야 200m 정도지만-가 월요일이라 약간 활기찹니다. 우유,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버스를 탔습니다. 어제 걸었던 곳까지 가는데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저는 그런 길을 하루 종일 걸었으니 미련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제주군 남원읍 신흥리에서 11시부터 오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날은 잔뜩 흐려서 곧 비가 내릴 듯했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걷기에 무척 편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자전거 여행팀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올라가는 일행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건냈습니다. 별 것도 아닌 건데 무척 고마워하기에 '다른 여행자에게 꼭 갚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 아이스크림이 다시 저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도로는 다시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을 연결하며 지나갑니다. 덕분에 이것저것 구경할 것들이 많습니다. 감귤 농사가 여전히 대부분이고 파인애플도 좀 재배하고, 여러 종류의 밭들도 많이 보입니다. 해안 마을에서는 양식업과 낚싯배로 살아가시는데 어딜가나 '살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많이 하십니다.(외지인에게 너무 엄살부리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시간을 걸어 표선해수욕장이 유명한 표선면에 들어와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모처럼 곱배기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또 하나 입에 물고 길을 나섰습니다. 한라산 쪽에서 내려온 구름은 점점 더 짙어지고 낮게 내려와서 이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합니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조용한 도로의 정적을 깨우며 엄청나게 퍼붓습니다. 달리 피할 곳도 없어 목소리만 더 키워 노래만 불러대며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조금 후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자전거 여행팀(2명)이 비를 피하려고 정류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몸 전체가 완전히 새까맣게 탄 걸 보니 집을 나선 지 오래되었나 봅니다. 

   제가 들고 있던 과자를 건네면서 '어떻게 여행오셨냐'고 물으니까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다가 1억여원을 날리고 상심한 나머지 자전거를 끌고 완도까지 왔다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왔답니다. 자전거로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비는 더 퍼부어 대고 엄청난 번개와 천둥(정류장 바로 옆에 번개가 내리쳐 죽는 줄 알았습니다)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1시간 동안이나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전거팀은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서둘러 떠났고, 전 날이 갤 것 같아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왜 이번엔 비오는 거에 대한 준비를 아무 것도 안 해 온 것인지... 비는 조금 있다가 그쳤고, 날이 개자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신나게 잘 걸었습니다. 어제 붙인 밴드가 별로 효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덥지가 않아서 제가 아는 노래를 메들리로 쭉 불러가며 걷는 동안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비가 쏟아지고 가늘어졌다가 다시 폭우...이렇게 반복되는 상황이라 비를 피하기도 어렵고, 이미 옷은 다 젖었고 비를 맞고 걸어도 이젠 별로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한 두어 시간을 갔을까? 또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비도 피할 겸 다리도 쉴 겸해서 앉았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온 몸이 뻐근하게 아프다는 걸 느끼면서도 얼핏 선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 때 갑자기 "안녕하세요?"하는 목소리. 아까 본 그 자전거팀이 민속마을에 들렀다가 내려온 길이라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계면쩍게 웃고, 여러가지 정보도 물어보고,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헤어졌습니다.

   저는 멍하니 그 정류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갑자기 왜 왔을까?' 왜 내가 여기 앉아서 이렇게 졸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펐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등받침대도 없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졸고 난 다음 마음이 허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걸어오는 내내 노래만 불렀습니다. 내가 가사를 알고 있는 노래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비는 더 세차게 오고, 제 발걸음도 더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저녁 6시. 성산읍에 닿았습니다. 오늘은 맛난 저녁을 먹기로 하고 해물 뚝배기를 먹었는데, 우리 동네 해물탕이랑 똑 같더군요. 뉴스를 보니 오늘 비가 80mm가 내렸다네요. 성산읍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내일 우도로 들어가려면 항구쪽이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은 2km 정도 더 걸어서 성산포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이야 말로 일찍 자야 내일 일출-날이 맑으면-을 보고 우도-배가 뜨면-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 오름'과 '비자림'도 둘러보고 싶은데 시간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덕분에 건강하게 잘 걷고 있습니다. 내일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2003년 8월 25일

제주도 성산포항구에서 느티나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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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아드 2003-12-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헛+_+ 오타발견 !!//어딘지 말은안해드림 (*__)ㅋ
근데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사서 나눠주시는건지 =ㅋㅋ

느티나무 2003-12-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이아드님, 열심히 읽어주니 고맙네요. 아이스크림은 제가 시골 가게 앞에서 쉬고 있을 때 자전거 여행팀이 지나가고 있기에 불러서 건네줬답니다. ^^ 너무 고마워하던데요. 이제 시험문제 완전히 정리하고 자렵니다. 낼 퉁퉁 부어 있겠네요.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