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얼굴 맞대고 지내던 녀석들도 졸업을 하면 어김없이 멀어진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같이 보냈던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서 이젠, 스스로의 고딩 때를 생각해도 까마득하게 느낄 녀석들과 아직도 연락이 닿고 있으니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S 고등학교의 졸업생 K 군, L 군 

   전설 같은 사고뭉치 반과 의욕만 넘치는 담임이 만났으니 그 땐 참 온갖 기기묘묘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더랬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 싶을 정도다.(나의 기발한 상상력은 정말 예측불허!) 그런 고해의 바다를 묵묵히 지켜봤던 녀석들이 기특하게도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다.  

   전문대학 졸업 후에 자동차 만드는 공장의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가 성실함 그 자체로 정규직이 된 K. 주야 맞교대로 일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바쁠텐데도 늘 5월만 되면 이리저리 연락을 돌려서 한 무리의 애들을 끌고 학교로 찾아오는 녀석. 네가 건네는 음료수는 정말 먹기가 미안하더라. 현장에서 일하느라 거칠고 굵은 네 손이 참 자랑스럽고, 만지니까 두툼해서 듬직하더라.

   전문대학교의 경찰행정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호주로 일하러 떠난 L. 졸업 후엔 경북 경산으로 이사를 갔지만 늘 부산에 있는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 받고, 부산에 오면 꼭 나에게도 안부를 물었던 속이 깊고 무던한 녀석. 네가 참 마음이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래도 네 아픈 마음을 온전히 다 내 보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네가 참 부럽고, 무덤덤히 앉아서 빙긋 웃는 네가 난 그냥 좋았다. 2년 과정으로 떠났으니까 돌아오면 얼른 연락주겠지? ㅋ

H 고등학교의 졸업생 L 양, O 양, S 양 

   인문계 고등학교는 이렇구나,를 느끼게 해 준 H고. 학생들의 학습의 강도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으나, 나랑은 죽이 잘 맞는, 아름다운 아이들이 있어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던 곳이다. 아, 그 때 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학교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임하기 전 2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다는 L 양.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배려하는 마음이 뛰어나서 모든 선생님들이 칭찬하던 L 양. 그것도 좋았지만, 가끔 쉬는 시간에 나랑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 더 생각이 잘 맞아서 좋았던 녀석. 국어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가 결국 교대에 진학했고, 2-3년은 방학 때마다 우리 집에 들러 저녁을 먹으면서 대학(교대)의 모습을 전해주곤 했었는데...근데, K. 우리가 같이 고민하던 좋은 선생님이 넌 꼭 되어 있을 거 같다. 

   수업 시간에 자고 싶으면 자고, 깨우면 신경질 내고, 늘 날카로운 반응에다가 약간 냉소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던 O 양. 그러면서도 공부는 제법 잘 해서 여러 선생님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녀석. 늘 날이 선 표정 뒤에 답답해하는 것이 느껴지길래, 그냥 맘에 안 들어도, 참자, 참자, 하면서 넘겼더니 졸업을 앞두고는 많이 친해져서 지금껏 연락이 닿는다. O. 며칠 전에 전해 준 회사 생활 얘기는 무척 재미있었어. 앞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으니 새로운 각오로 조금 더 신나게 살도록 노력하렴. 

   H 고에서 만난 진정한 주체적 인간, S 양. 하고 싶은 건 하고마는 자신감이 너의 매력이지. 책도 많이 읽었고, 생각도 깊어서 1학년 때도 벌써 사고력의 폭과 깊이가 나에겐 좀 다르게 느껴지더라. 매번 혼나면서도 꾸준히 지각하는 것도 놀랍고, 보충수업이든 야자든 네 의지로 판단해서 결정하는 게 놀랍고 대단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S 양.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의 공허한 소리 같겠지만, 네 도움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 잊지 않았으면 한다.

N 고등학교의 졸업생  L 양, K 양, K 군, H 군   

   나의 모교였던 N 고. 내가 다니던 그 때나 얼마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곳이었다. 건물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벌어지는 살풍경한 모습들. 한동안 깊은 좌절감이 들었으나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그 속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들. 그래서 수업 준비를 열심히 했고, 책읽기 모임을 만들었고, 해마다 담임을 맡았다. 나를 거쳐간 수 많은 녀석들 중에 지금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녀석들!

   지금 병원에 있는 L 양. 몸도 마음도 힘든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아파서 이 글을 쓴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네가 조금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으렴.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견디자. 수술이 잘 끝나도록 나도 기도해 볼게. 이게 네 삶에 가장 최악의 상황일거야. 더 나빠질 수는 없어. L. 앞으로 퇴원하면 진복이 보러 놀러오너라. 꼭!

   K 군, 오늘 일은 끝냈나? 지금쯤이면 자고 있겠지? 이제 일은 몸이 적응해서 별로 힘들지는 않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몸이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느 곳에서든 대체로 적응하지. 근데,난 너처럼 힘든 상황이라면 마음이 참 힘들었을 거 같아. 아마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됐을 지도 모르겠다. 근데, 넌 참 덤덤하게 말하더라. 고등학교 3년 동안 너처럼 제대로 된 책을 많이 읽는 학생도 드물었다. (책의 힘인가?) 내년이면 상황에 변화가 있다고 했으니까 차츰 나아지겠지. 동생도 어쨌든 이번에 대학을 갈테고... 이젠 네 차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잔 한 게 언제였더라? 곧 다시 볼 때까지 씩씩하게 잘 지내라. 

   K 양, 아까 문자가 왔었는데 전화기가 충전기에 달려 있느라 뒤늦게야 확인! K, 너를 생각하면 끊임없이 바른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나이 또래의 여느 아이들은 예쁜 것, 재미난 것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데, 너는 오롯이 네가 옳다고 믿는 대로 네 삶을 꾸려가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 지내고 있는가?'하고 비춰본다. 그 생각의 실천으로 힘들게 공부방을 찾아 온 것이겠지?ㅋ 옛 선생에게 -분명 어렵게 구했을- 저자 사인이 적힌 시집을 수줍게 건네는 대햑생의 그 마음이 참 기특하고 고맙다. 

   군복무 중인 H 군. 찬바람이 쌩쌩 불어도 잘 지내고 있지? 군대에 있어도 네 할 일은 똑부러지게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좀 엉뚱한 면도 있고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는 애늙은이 같을 떄도 있지만, 그래도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어디에 가서도 그리 힘들게 지내지는 않을 것 같다. 지난 번에 휴가 나왔을 때, 같이 소주 한 잔 했었다, 그치? 참, 어느새 세월은 훌쩍, 선생과 학생이었던 사이가 이제는 같이 소줏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아, 근데 좋은 일이다.) 다음에도 휴가 나와서 갈 때가 없거든(성격상 애인은 나중에 생길 것 같다), 언제든 찾아 오너라. 그럼 네 덕분에 난 편안히 자련다.

 *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한 녀석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사람도, 군복무중인 군인도, 입원한 환자도 모두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가끔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 때 그랬지... 하고 말이야. 선생이란 사람은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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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 2009-12-16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인 상속법이 남은 이때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왜 뭔가를 남기고 죽을려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모두들 다쓰고 죽으라는 법을 만들어야 하지 안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 선생님처럼 열심히 생각하는 사람과 알게 지내게되서 기뻐요ㅎㅎ 밤을 새고 정신이 혼미해진 이때 저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선생님의 서재를 엿보고 있답니다. 단지 실없는 친구이던 저를 이다지도 좋게 평가해주다니ㅋㅋ 역시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죠ㅎㅎ 선생님의 생각의 깊이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09-12-17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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