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젖다 1

-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이 아닌 것들과.

   오늘, 따뜻한 이곳에는 폭설 대신 빗방울만 약간 비쳤다. 그 시간에 나는 내원사 뜰앞을 서성거렸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천성산 자락에 싸여 다부지게 들어앉은 절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그 절의 기운이 모두가 어리석다고,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싸움을 지금껏 흔들리지 않고 해오고 있는 저력이지 싶다. 빗방울 후둑거리는 절집을 바쁘게 오가는 저 비구니 스님들은 저렇게 가녀리고 앳되어 보이는데, 저들 중에 한 무리로 선방을 지키고 있는 지율스님은 어떤 에너지로 그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까?

   읽어본 시집도, 그래서 아는 시인도 몇 없지만, 내 마음에 좋아하는 시인과 시를 떠올리라면 이 분과 이 시를 빼놓을 수는 없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내원사 경내에서 나도 이 시와 함께 젖었다.


소/나/무

세월의, 역사의, 사랑의, 삶의 상처는 나에게 저리도 깊은 자국을 남기는가?

 


내원사 경내 입구의 오솔길

늘씬한 소나무들이 소담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길 옆에 늘어서 있다.

 

 


소박한 소원?

중창불사 기왓장에 써진 흰 이름들. 그 이름들의 소원이 비에 젖고 있다. '토요일에 학교 안 가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 앞에 교사인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원사의 소리를 찍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풍경에서 참 맑은 소리가 내원사 위 하늘로, 산으로 퍼진다.

 

 


內院寺 전경

눈 덮인 천성산을 머리에 지고 수행하는 비구니들의 삶의 터전, 내원사 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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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1-17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원사면... 통도사에서 양산 가는 길에 있는 그 내원사 맞지요??
중학교때 한번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앞까지만 갔지, 경내에 들어가 본 적은 한번도 없군요;;;

느티나무 2004-01-1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울산이 고향이라고 하셨죠? ㅋ 그럼 통도사, 운문사, 표충사, 석남사, 내원사, 홍룡사... 영남알프스의 그 아름다운 절들을 아시겠네요. 그러고 보면 부산은 참 좋은 곳이란 느낌이 들어요. 바다도 있고, 경주도 가깝고, 지리산도 좋고, 영남알프스도 너무 좋으니까요.

nrim 2004-01-1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제 고향이 울산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언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답니다. 몇해전 울산광역시에 통합되었지만... 제가 살던 시절은 통합되기 전이라.. 울산이라고 말하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사람들에게 언양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울산이라고 말하고 난뒤.. 울산에서 언양이라고 덧붙이지요... 그러면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아.. 불고기 유명한 곳.. 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지요.^^
영남알프스는 산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자랑이었는데.. 서울 올라와서 영남알프스 이야기를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알지만...) 속 상해하기도 했었죠...
통도사의 어느 암자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본 해질 무렵의 풍경과 절에서 들려오던 종 울리는 소리.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기억이랍니다..

이로운삶 2004-01-18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 몇년동안 부산에서 살았던 덕에 영남 알프스 일대는 거의 다 다녀 보았지요.
진달래, 철쭉이 산을 온통 물들이던 초봄의 내원사는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꽃들이 필 때 다시 가셔서 꼭 사진에 담아 오셔서 보여 주세요...^-^

느티나무 2004-01-1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rim님은 언양이 고향이시군요. 언양은 별로 크지 않은 읍이었지요. 저야 이방인인 터미널 앞에 펼쳐진 시장을 보며 신기해 하고, 수많은 소불고기집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석남사나 갈 때나, 가지산 옆으로 난 도로(운문고개인가요?)를 따라 운문사로 넘어갈 때 늘 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만... 군대 있을 때 고향이야기만 들어도 아릿했던 것 같아요.

느티나무 2004-01-18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로운삶님 반갑습니다. 방금 님의 서재 구경하고 왔어요. 초봄의 내원사를 기억하시는군요. 제가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꼭 봄에 다시 내원사를 다녀와 사진을 올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어요. 장미의 이름이 책 사는 데 계속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말씀에 웃음~! 저 역시(지금도) 그렇거든요. 페이퍼를 보니 빨리 사서 봐야겠어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