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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웨슬리
스테이시 오브라이언 지음, 김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7월
평점 :
가끔 책장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의외로 안읽었거나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는 책들이 있다.(눈과 손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과도한 지르기 현상이 낳은 결과다;;)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어머? 내가 안 읽었었나?' 그렇게 집어 읽게 된 책.
순해 보이는 한 마리의 올빼미 삽화.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아동용 도서같다는 느낌' 물론 표지만 보았을 때다. 책을 펼치고 그 안에 가면올빼미를 비롯한 여러 동물에 대한 사전 이상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으니 말이다.
이 책은 가면무엉이와 인간과의 19년간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솔직히, 이런 류의 책들은 뻔하다. 저자의 각별한 동물사랑 그리고 종을 뛰어넘는 우정의 이야기. 그러다가 동물은 죽게 되는. 이 책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느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과 교감하고 공감되는 정서를 가졌다고 알려진 개나 고양이같은 일반적인 포유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면 올빼미. 이 동물이 저자와 사랑과 우정을 나눈 동물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항상 동물이 끊이질 않았다. 온 가족들이 모두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특히나 내 남동생은 거리의 버려진 온갖 동물들을 구조해 오기도 했다. 상가 셔터문에 끼인 채 울고 있던 아기 고양이를 데려와 우유를 먹여 키우기도 했었고 주인에게 버려지기 직전의 개 한 마리가 안타까워 데려왔다가 심장사상충에 걸려 어마어마한 돈을 병원비로 투자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 밖에 다양한 동물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실제로 제 발로 들어와 가족처럼 먹여 살린 동물들도 여럿이다.
항간에는 '동물에게 지각이 있는가?' 논의가 일고 있지만 동물을 반 나절만이라도 들여다본 사람들은 대다수 그들도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아픔과 두려움, 슬픔을 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방금 본 인터넷 기사에서도 로드킬로 사망한 동료 고양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턱을 얹고 눈을 감은 고양이를 보았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매일 주말 아침에 방영하는 동물 다큐쇼만 몇 번 챙겨보아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 들이다.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길렀던 고양이 두 마리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고양이 둘은 한 날 한시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 담벼락을 넘어 들어와 버젓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마냥 생활하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역시 그들의 무단 침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마침내 그들은 우리 고양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사를 가야했고 새로 이사가는 곳의 주인네는 동물들을 절대로 들일 수 없다고 하여 눈물을 머금고 모든 동물들을 분양했다. 그러나 그 두 마리의 고양이는 어느 누구도 데려다가 기르려 하지 않았다. 이삿날은 임박했고 우리는 별 수 없이 밥을 듬뿍 퍼주고는 고양이를 그 집에 남겨두고 떠나왔다. 어린 우리는 "고양이를 데려가면 안되요? 주인도 고양이를 보면 귀여워 할텐데..." 하며 부모님을 설득해 보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고양이를 잊어갈 즈음, 새벽녁 문 앞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났다. '아직도 내가 고양이를 그리워 하는가봐' 하고 잠이 들려는데 그 소리는 너무나 명확했다. 엄마를 깨우고 문을 열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고양이는 예전 집에 두고 왔던 그 고양들이었다. 그것도 두 마리 모두 우리 집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누가 나의 고양이들을 말 못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그저 움직이는 생물일 뿐이라고 할텐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마침내 우리 집을 찾았던 고양이의 반짝이던 두 눈을. 이뿐 아니라 동물들과 나눈 따스한 추억이 내겐 너무나도 많다.
이렇듯 이 책은 나에게 지난 날 함께했던 동물들과의 추억과 애정을 일깨워 주었다. 그랬기에 저자가 가면 올빼미에게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모두 생생하게 나의 것이 되었다. 어떻게 올빼미가 인간과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올빼미의 날개가 어깨를 감싸주며 잠드는 밤이란, 마치 한 편의 포근한 동화 같았다. 역시 어떤 종이냐를 떠나서 진실된 사랑을 주고 하나의 개체로 존중해주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동물을 내 맛대로 기르기는 쉽다. 옷을 입혀주고 향기가 좋은 샴푸로 씻겨주고 고급사료에 외출때는 신발까지 신겨주고. 그것들을 과연 동물들이 원한 것일까?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간이 원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동물이 원하는대로 기르기는 정말 힘들다. 만약 당신의 반려동물의 주식이 '쥐'라면. 다른 어떤 것도 먹지 못하고 오로지 '쥐'만이 영양공급원이 된다면. 이런 동물을 키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끔찍한 쥐를 잘근잘근 씹은 입에 입맞춤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스테이시 오브라이언은 자신의 가면 올빼미 웨슬리를 위해 그렇게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가 힘들지만 이 부분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오~ 맙소사. 나는 올빼미는 절대 기를 수 없겠어'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스테이시 오브라이언은 생물학자다. 그가 보여준 생물학자들의 이야기 또한 아주 흥미진진했다. 음.... 그 중에서도 피부 밑에 기생하는 벌레를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피부에 직접 기생충을 기르는 생물학자의 이야기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지한 동물애호가들은 도리어 동물들을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혀 야생에서 살 수 없는 동물들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금류나 야생동물들을 건물 안에 들여놓고 기른다는 사실에 그 곳을 찾아 난동을 피우고 모든 동물들을 쫓았다는 이야기였다. 몰랐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얼마지 않아 많은 동물들이 야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단다. 무작정 동물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사랑인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못했음이 부른 화였다.
그리고 웨슬리의 마지막을 함께 해 준 동물병원의 수의사에게도 참으로 감사했다. 예전 나의 어린 거북이는 이유없이 아팠고 야간 진료를 받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의사의 첫마디는 '거북이는 고치지 않아요' 고칠 수 없어요도 아니고 분명 고치지 않아요였다. 왜, 왜죠? 당신이 돌보는 개들과 같이 생명이 있는 동물인데 왜 고쳐주지 않나요? 돌아오는 길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 돌아보면 그는 고치지 않는 것도 고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고칠 줄을 모를 뿐. 나는 아주 작고 연약한 동물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동물병원들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수의학이라는 것이 과연 개, 고양이에게만 국한된 것인지. 수입을 창출하지 못할 극소수의 동물들은 수의학에서 배제되고만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병원 진료 종료 시간을 신경쓰지 말고 기다릴테니 오라'던 책 속 의사의 따스한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인지는 마지막을 쫓는 동물을 곁에서 지켜본 자만이 안다. 그들의 그런 수의학 정신과 의료서비스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웨슬리와의 즐거운 추억과 사랑의 이야기들. 그들이 나누었던 19년간의 우정의 이야기는 밤새 나를 울렸다.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얼마만인지. 내가 책을 보고 운 일. 이 모든 이야기는 단지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창작된 동화가 아니라 사실을 담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작은 책은 나에게 너무나 큰 것들을 일깨워 주었다. 생명의 귀함. 그 가치로움. 그것이 비록 어떠한 우리 말도 할 수 없는 동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