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을 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가 존경하는 거장'이라는 롤링 광고가 뜨길래

뭔가 봤더니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집이다.

바나나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키가 다자이 오사무를 존경해??

흠. 대체 어디서 근거한 얘기일까.

하루키가 어느 에세이에서인지 자기는 사소설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다자이 오사무하면 또 사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고.

<그래, 무라카미 씨에게 물어보자>라는 하루키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들이 물어본 질문에 답을

모아 만든 책을 보면(지금 당장 옆에 하루키책이라곤 이거 하나뿐이라서)

"왜 일본의 소설이라 음악에 대해 코멘트 하지 않나요?" 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 작가의 책은 잘 안 읽게 되지만, 그 대신에 옛날 작가는 곧잘 본다.

그러면서 예를 드는 작가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나쓰메 소세키.

존경한다면 여기서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도 나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혹시 이 사정이나 내막을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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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ai2000 2007-04-2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래 존경했나 봅니다..-_-;;

한솔로 2007-04-2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런 것이었나요...

하이드 2007-04-25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혹 그런 광고 보고 '말도 안 되' 하고 찾아보면, 어디 있기는 있더이다. ( 더 잘아시겠지만 ^^) 일어가 안되서 찾아보는건 포기.

한솔로 2007-04-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일본구글에서 하루키, 다자이 오사무, 사소설 이런 걸로 막 찾아봤는데, 결국 못 찾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_-
 

오츠 이치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너밖에 들리지 않아>와 <쓸쓸함의 주파수> 두 권.
두 권 모두 라이트노벨로 분류될 만한 작품이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오츠 이치에 대한 소개를 보면 '경이의 천재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상 붙어 있다.
국내에 소개된 두 작품만을 보면, '엣, 정말 그럴까?'와 '음, 어쩜 그럴지도...' 사이에서 망설이게 하지만
최소한 <GOTH>를 보면 '나루호도なるほど'가 절로 나오게 한다.
<GOTH>가 거머쥔 타이틀만 봐도, 본격 미스터리 대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2위,
야후재팬 베스트 미스터리 1위 등 2002년과 2003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다시 놀라게 하는 사실은, 이 작품이 쓴 시기가 20살이라는 것.
이러니 '경이의 천재' 운운할테고.
그럼 <GOTH>가 진짜 그만한 값을 하는가. 아주 흡족스레 그렇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은 하나하나가 엽기적이다.
동물과 인간의 손목을 잘라 모으는 남자, 정원에 인간을 생채로 매장하는 남자, 밤마다 개를 사살하는 소녀,
여성을납치한 뒤 온몸 해부하고 나무에 걸어두는 남자 등등.
이런 내용만으로도 괜히 거북스러워질 것 같은데 그닥 그렇지가 않다.
죽이는 자나, 죽는 자나 서로 납득한다는 듯 그 엽기적인 행태들이 설득력 있게
(설득력 있는 엽기라는 것 자체가 뭔가 형용모순 같지만) 그려지며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설정과 구조의 힘도 있겠지만, 문장의 힘도 크다.
문장 하나만으로는 묘하게 치졸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라이트노벨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화감 없이 전체 속에서 문장은 기능한다.
비유가 이상하지만, 아주 기분 좋은 온도에서 샤워하는 느낌이랄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런 온도.
전체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마지막에 실린 <Voice>.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니 당연하게도 이야기가 매조지되고, 그 매조지 짖는 방식이 꽤나 마음에 든다.
서술트릭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GOTH>라는 전체 구조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작용하는
서술트릭은 꽤나 매력적이다. 독자의 마음을 서서이 조여가다가 기분 좋게 안도하게 만드는 끝맺음.
읽기 조금 불편했던 것은 <Dog>와 <Grave>.
<Dog>는 개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 방식이 낯설어 읽는 데 조금 힘들었고,
<Grave>는 심리묘사가 조금 장황해서 늘어진다는 느낌.
어쨌든 호러든, 본격 미스터리든, 라이트노벨로서든 이 작품은 보기 드문 퀄리티를 보여준다.
어서 한국에 소개되어 오츠 이치가 제대로 평가 받기를!

*사실 꽤나 오래전에 계약된 걸로 알고 있는데 여태껏 안 나오고 있다.
이번에 나올 때는 괜히 라이트노벨풍으로 꾸미지 말고 제대로 된 단행본 형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츠 이치의 문장은 대체로 간결하고 단아하다.
일어 원서 초기 입문용으로는 제법 괜찮은 작품이 아닐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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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나오는 격주간지, <기획회의> 196호 특집이 '일본출판계 철저 연구'다.

일본의 미디어전문지 <쓰쿠루(創 )>의 기사를 번역전재한 것.

한해 일본의 출판동향과 메이저출판사들의 현황이 담겨 있어, 꽤 재밌다.

개중 몇 개 눈에 띄는 흥미로운 대목.

*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만 판매되는 책 매출이 1800억~1900억 엔.
로손과 패밀리마트를 합치면 역시 그정도라고.
(한국의 편의점 책 판매는, 실질적인 판매 효과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편의점에 배치되는 광고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

*아마존재팬 매출이 기노쿠니야(일본 최대의 서점, 한국에서 교보의 위상을 생각하면 될 듯) 매출을 넘겼다고 추정.
미국 아마존의 경우 책과 DVD 판매로는 수익을 못 맞추지만, 일본의 아마존은 책과 DVD로만 이미 흑자라고.
(국내 출판사들의 대부분은 온라인 서점 판매 비율이 50% 이상일게다. 온라인 대 오프라인 매출 비율이 크게는 7:3에서 8:2까지 가는 출판사도 있다.)

*일본도 전체적인 출판시장의 규모는 계속 마이너스지만 독서인구는 더 늘었다고 추정.
최근 5년간 일본인 도서관 연간 대출권수 6억권, 일인당 일년에 5, 6권은 빌린다는 이야기.

*<노다메 칸다빌레>(고단샤)가 드라마화로 한층 탄력을 받아 곧 누계 2000만 부 돌파 예정이라고.
얼마전 완간된 <데스노트>(슈에이샤)는 누계 2500만 부, 해설본(왜 안 필요하겠어!)도 7, 80만부 판매.
(참고로 1억부 넘게 팔린 만화책으로 드래곤볼, 슬램덩크,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 명탐정 코난, 원피스 등이 있다. 최다 판매는 아마도 드래곤 볼일 듯. 1억9천만 부라는 얘기가 있다)

*고단샤 연간 만화 단행본 발행 권수가 1억 권, 작년 고단샤 전체 매출은 1500억 엔.
(한국 메이저 출판사의 매출액은 삼, 사백억 사이. W출판사라면 몇 년 안에 1000억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년이 만화잡지 <주간 소년 매거진>(고단샤)과 <주간 소년 선데이>(쇼가쿠칸)이 함께 창간 50주년을 맞는다고. 그래서 두 잡지가 함께 특별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 구상이 꽤나 흥미롭다. 예컨대 <거인의 별>, <맹세의 마구>, <터치>에 나오는 팀들이 겨루는 게임이라든가 김전일과 코난이 협력해서 사건을 수사하는 게임 등이 구상되고 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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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셔고양2님의 ‘홍석천 같은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페이퍼를 읽다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썼던 글이 기억났다. 경우가 다르긴 해도 내게도 친구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상 끝의 사랑>을 읽었을 때 그 친구가 떠올라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기록이란 차원에서 여기 부기해둔다.

 


그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못 되었다. 아니 오히려 짐작했던 바라고나 할까. 그와 처음 만난 것도 벌써 8년 전의 일이었고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만큼 우둔했더라면 그의 세심함은 지레 나를 거부할 것이었기에. 그렇다 그의  세심함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때로는 병약하다 느낄 정도로 투명한 흰 빛을 띤 그의 피부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워왔다는 그의 길고 여린 손가락은 그 세심함을 어떠한 집착이나 강박으로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기에. 화가 날 때면 햇빛을 여과하는 유리창 같은, 그의 투명한 우윳빛 피부는 스포이트로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발갛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말을 할 적이면 그 다채로운 제스츄어 - 경탄의 양팔 벌림, 분노의 분끈 쥔 주먹, 의아함의 내보인 손바닥 등 - 속에서 그의 (어쩌면 앙상하다라고까지 할) 손가락은 말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도 그 세심함은 언제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자유로운 언동은 일반의 편견과 관습과 버성기어 몸 어딘가에 꽤나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있는 듯하였고 그것은 주변의 몇몇에게 우려와 근심을 끼칠 만한 것이었다. 마치 두 손안 쥔 작은 새의 날개짓하려는 의지가 담방거리는 심장 고동소리에서 느껴질 때의 그 안쓰러움처럼 말이다.

그와 처음 만난 건 8년 전, 갓 입학한 고등학교의 포악스러운 분위기 - 선생님이나 선배나 다 가릴 바 없이 하나만을 강요하고 그에 따르도록 하는 도구로써 욕설과 매질이 동반되는 - 에 당황하여 가뜩이나 상처 입기 쉬운 17살의 나이를 절감하고 있던 때였다(포악스러운 문화에 대한 당황의 경험은 대학에 들어와 다시 부딪치나, 이미 그 때는 '경멸'과 '냉소‘라는 허무적인 도구를 몸에 지닌 뒤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소위 말하는 범생이, 그 자체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까만 뿔테 안경에 크다고 할 수는 중키에 몸무게는 내 반 정도밖에 안 될 성싶게 너무 말라 보이는 그의 인상이었기에. 게다가 그의 신경질적인 눈매에서 나의 심증은 더욱 굳어갔다. 물론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호의라니. 감히 바랄 처지가 아니다. 쥐 뜯어먹은 듯한 더벅머리에 여드름 자욱이 얼굴을 덮고 있는데다가 그 인상마저 타인게 거북스럽기 이를 데 없는 그때의 내가 말이다(그렇다면 지금은? 이라고 묻지 말아다오, 제발). 어쨌든 서로간의 그닥 나을 바 없는 첫인상에도 그와 나는 한 써클 안에서 활동을 해야 했기에 거짓 미소로 그러한 불편을 감추며 지냈다. 그러며 일 년이 지난 뒤 어쩔 수 없이 그와 나는 행동의 반경을 서로 근접시켜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 써클에서 서로 회장과 총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는 범생이라고 본 나의 첫인상을 확인시켜주듯 전교에서 일, 이등을 다투고 있었고 나는 올라갈 이유가 없는 성적 때문에 집안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있는 신세였다. 내 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똘똘이 스머프와 천덕꾸러기와의 콤비라고나 할까. 그러나 주변의 우려는 물론 우리 스스로도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묶음일 거라 생각했음에도 의외로 쉽게 가까워졌다. 어찌하여? 라는 질문을 해온다면 난감할 따름이다. 말한 바대로 자기들 스스로도 맞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이들이 그러한 질문에 맞는 대답을 준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게다가 기껏 18살일 뿐인 고등학생의 정신 상태란, 당신이 이미 겪었다시피 언어로 설명될 만한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때의 우리를 까닭 모르게 마냥 절망하게 했고, 또한 그렇기에 그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멋대로 만들어지고 윤색되었기에 마냥 희망에 부풀게 하였던, 18살이라는 나이. 그 미묘한 시점이 만들어낸 마법과도 같은 무언가가 우리를 묶게 했으리라.

그는 어쩌면 차갑게도 보이는 외견 속에 다감한 세심함을 감추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하숙하는 그의 집엔 의외로 많은 이들이 마실 줄도 모르는 소주를 들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그러한 데서 연유한 게 아니었을까. 내가. "나 눈물 많고 동정식 듬뿍한 사람이야"라고 아무리 광고를 해대도 카운셀링을 청하는 경험을 거의 갖지 못한 처량한 상황의 우스꽝스러움과 견주어 더욱 그랬다. 나의 수다가 냉소를 머금은 황량한 것이었다면 그의 말의 풍성함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 할 '배려'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와 내가 속해 있던 써클에서 누군가에게 지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어 나는 가차없이 내뱉어 꼭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식이었다면 그는 여린 목소리로 별 상관없이 보이는 자신의 얘기를 하는,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인식하게끔 하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방식은 때론 가슴 시리게 나를 돌아보게 하는 뼈아픈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 그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명징한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 어설픈 의견에 반갑게 동의를 표하며 그가 꺼내드는 말들은 내 빈약한 논리를 노골적이지 않게 부숴 내리며 내 머리를 차갑게 했다. 나의 촌스러운 분노 속에 감춰진 비겁함과 다르게 그가 아주 가끔씩 내비치는 분노는 그의 행동 속에서 충일하게 지켜나가며 나를 비춰주었다. 그러한 그의 자신에 대한 엄격함들은 나의 말과 행동을 추스르게 했고 그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에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그와 함께 들었던 음악들을 기억한다. 독서실에서 나란히 앉아 공부하다가도 좋은 음악이 나오면 서로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 들려주었고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라이브 앨범을 통해 알게 된 누나의 레코드 가게에 함께 가 테이프 하나를 사기 위해 두세 시간을 넘기는 것은 예사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고른 테이프를 독서실을 향해 걸어가는 중 겉비닐을 벗겨 속지에 있는 해설지를 읽어가며 미리 상상해보며 서로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당신도 기억하는지. 특히나 전영혁 특유의 사자성어로 점철된 감상적 음반 해설들을. "이들의 숭고한 음악 정신은 독야청청하리라"라든가, "내 고등학교  시절을 지배한 감동의 곡들이었다"식의. 지금 꺼내보면 미소보다는 폭소를 떠뜨리게 되지만). 그 음악들 중 언제나의 베스트는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이었다. 'Another brick in the wall'에서의 로저 워터스의 울부짖는 보컬은 우리의 척박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했고 'Mothe'의 속삭이는 슬픔은 괜한 감상에 빠져들게 했다. 어디 그것들뿐이었겠는가. 어렵게 구해 본 영화 <The Wall>을 보며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했던 음악의 가사들을 실제로 확인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손에 배인 땀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의 충격과 감동은 그와 나를 포함하여 몇몇이 함께 올렸던 연극의 극본에 깊이 배어 있고 그 극본 속의 몇몇 문구들은 <The Wall>을 명백하게 표절하여 나름의 오마쥬(?)를 표했다.

길을 함께 걸을 때의 그에겐 묘한 습관이 있었다. 주절주절 수다를 떠는 와중, 어느 순간인가 그가 내 팔 한편에 기대든가, 팔짱을 끼어 왔다. 어쩌면 징그러울 수도 있을 그러한 스킨십이 이상하게도 그가 해오면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쩌다가 얼큰하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함께 길을 걷던 중 내가 나서서 그에게 기대 팔을 끼고 유쾌하게 웃으며 걸어간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함께 음악을 듣고 가끔씩은 무거운 대화도 나누고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93년의 겨울은 지나갔다.

대학에 들어와 그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서로의 자취방이 5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고 텔레비전이 없는 내가 <느낌>의 우희진을 보기 위해서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그의 집에 찾아갔다. 여전히 그는 세상과 위태로운 버성김 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듯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게 나에게 묘한 위안과 함께, 여전한 불안감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해 말 그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부터 예전처럼 빈번한 만남은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더 뜸하게 몇 개월에 한 번 만나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해 보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긴 공백에도 서로의 관심사는 비슷한 곳에 걸쳐 있었고, 그렇기에 오랜만의 만남에도 묘한 흥분과 긴장감, 그리고 유쾌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인터벌은 조금씩 길어져갔고, 연년에 한 번 정도를 가까스로 유지하다가 결국, 어느 해부터인가 그의 소식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떠다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짐작하고 있었기에.

<세상 끝의 사랑>의 작가, 마이클 커닝햄은 미국 내에서도 커밍아웃하고 소설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한다. 동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이란 게 얼마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하고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 감히 짐작 못하겠다. 아니 짐작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나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별로 믿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보는 그들 - 이반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떠오르고 그러한 잣대로 그들에게 다가서게 됨을 감추기 힘들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소수자로서, 약자로서,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는 이혼녀와 장애인과 전라도인과 외국인 노동자와 고졸자와 그들을 동류항으로 놓는 그 어설픈 휴머니즘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한 사람의 소수자라는 자조적인 인식이 그러한 사고를 지탱한다. 사실 이 소설은 그러한 배경지식을 버리고 봐도 충분히 아름답고, 적당히 기이하며, 묘한 슬픔을 준다 성(性)에는 관심이 없는 바비와 그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동성애자 조나단, 그리고 양성애자인 클레어가 만들어가는 기이한 가족 구성에 이르기까지 읽는 즐거움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그 주변을 이루는 이들의 삶마저 작가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고 등장인물 하나 하나에 자신을 투과시켜 보게 만든다. 읽는 속도는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 정도가 좋을 듯싶다. 그 '빠르게'는 내러티브의 진행에 맞추면 어련히 따라게 돼 있고 '조금/'의 정도는 감동의 여진에 따라가시길.

* 위에서 주절거린 그에 관한 묘사에는 조금의 윤색과 과장이 섞여 있다. 감히 그에 대한 배려라고는 하진 못한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가 그의 단편 중에서 "진실이란 조금 비틀어진 상황에서 강렬히 설득적이다"라고 했던 걸, 감히 기억해본다(그러나 그가 이 글을 읽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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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전 이성애자이면서 동성애자의 사랑의 고통이나 절망감, 그것을 넘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평생의 고민을 어떻게 이해한다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받아들여주고 싶어요, 편견없이요. 아니, 서로 받아들여야지요.
누가 누굴 약자로서 허용하는 게 아니라요. 잘 읽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건 즐겁다.
원체 수다스러운 인간인지라, 특히 술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혼자서 문자텍스트를 읽는 것, 역시 즐겁다.
굳이 그걸 '대화'라고까지 표현할 나위는 없지만, 역시 혼자할 수 있는 것 중
독서만큼 즐거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처럼 말귀 못 알아들었다고 군소리 들을 일도 없고,
썰렁하다고 핀잔 먹을 일도 없으며, 술 취해 저지르는 뻘짓도 없다.
'책'과 그것을 읽는 '나'가 있고, 그 '책'은 '나'에게 온전히 전유된다.
괜한 수인사도, 호들갑스러운 맞장구도, 쌉쌀한 헛웃음도 필요없다.
그냥 내 멋대로 읽으면 그만.

그런데, 최근 어떤 소설과 관련한 독자 문의를 받으며, 멋대로 읽는다는 게
다소 아슬아슬한 데가 있다는 걸 새삼 절감.
한 번은 이 소설의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니냐며 전화가 왔다.
어째서 처음에는 '나'로 시작하더니 갑자기 '그'가 나오냐는 거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다가 계속 말을 듣다보니 이 독자는 소설이 어떻게
1인칭 시점에서 기술되다가, 3인칭 시점으로 바뀔 수 있냐는 거다.
이 소설이 '나'에 의해 기술되는 부분과, 3인칭으로 기술되는 부분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는데 그걸 전혀 납득을 못하는 것이다.
번역 잘못된 것이 아니니, 읽다보면 그 방식을 이해하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또 한 번은 메일로 문의가 왔다.
읽으면서 나오는 오타를 나올 때마다 계속 보내오더니(이건 부끄럽지만 고맙기도 하다)
다소 황당한 오타 지적을 해왔다.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어떤 부탁을 하였고, 남편은 이에 충실히 따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면서 작가는 남편을 '늙은 하인'이라고 은유하는데 이 독자는 그걸 전혀 이해 못하는 게다.
집안에 하인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늙은 하인이 나오냐고 지적을 한다.
이러저러해서 저자가 쓴 은유라고 답을 해도 통 납득을 못하겠다고 메일이 왔고
원서에 명백히 그렇게 나와 있다고 다시 메일을 보내자 그제서야 잠잠.

(재수없는) 이인화의 첫 소설의 제목에서 따자면,
"내가 읽은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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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1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자신을 못 믿어서 오타 지적을 왠만하면 못합니다 ㅜ.ㅜ

한솔로 2007-04-1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무 생각없이 읽은 책인데 사람들이 오타를 마구 지적하고 계시면, 앗 그랬나 하고 뜨끔한데, 제가 만든 책에 오타를 지적하면 또 얼마나 뜨끔하겠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