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찍이 클램프의 [클로버]에서 극단적으로 분할된 컷과 틀을 부순 배치를 통해 정적인 뮤직비디오의 만화 버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만의 고독한 향연이자 해독불능, 혹은 너무 얕았던 자폐적 유희로 채워진 오만에 가까웠고, 더군다나 음악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방법상으론 그 음악을 느낄 수 없었던 독자로선 흑백화면 속에 배치된 감각적으로 야심찬 몽타주들이 되려 빈한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경험을 치러야 했다.

[서플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또한 [클로버]에서 이미 확인했던 과격하게 분할된 몽타주의 흐름이다. 그러나 오카자키 마리는 클램프보다 훨씬 능숙하고 솜씨 있게 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과감한 실험을 성공시키고 있다. 작가의 머릿 속에 그려져 있을 인물의 동선 속에서 조심스럽게 골라내진 각 컷들은 대담하다 싶을 정도로 분리되어 다닥다닥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배치는 산만하지 않으며 인물의 감정을 풀이해내는 큰 흐름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되려 자유롭게 분할됐지만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방만하다는 인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적인 탁월함과 인과의 부드러움을 산출해내는 컷들의 계산된 연결은 [서플리]의 기술적 미덕이다.

 



 

저 2권 속에서, 양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에 대한 연출을 보라. 두 페이지의 위쪽 중앙을 가로지르며 압축된 컷과 컷들 사이로 물고기가 자리한, 컷이 있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여백-공간-물은 흐르고 흘러 그녀의 회의의 너비를 가늠하게 만들고 있고, 그것은 물고기의 꼬리끝과 머리가 이어주는 페이지를 넘어서는 대사의 연결('게이나 됐으면 편하겠다는 심정' -> '어쩌면 난 그러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게 아닐까?')이 극히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오른쪽 페이지 아래에서의 그녀의 사고의 전개가 일종의 심화과정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덧붙여 격식을 깨는 컷의 분할과 배치에서 혹여나 빌지도 모를 감수성의 공백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말풍선의 적극적인 응용과 의식속-물 속에서 이뤄지는 나레이션의 절묘한 배치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들이 얼마나 부드럽게 도출되는지를 말그대로 두페이지를 통괄하는 의식의 구조-그림 그 자체로서 설명해보이고 있다.

[서플리]는 뒤늦게서야 세상에 눈을 떠서 하나씩하나씩 삶과 사랑과 일에 대해 깨달아가는 한 워커홀릭의 눈을 통해 여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는다. '여자라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더없이 어렵게(혹은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흐름 속에서 고도로 집적된 이미지들을 통해 우회해서 보여지는 섬세한 감정의 충돌들과 깨달음들은 어느 사이엔가 뒤틀려버린 인물들의 관계도를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간다. 이 리얼함은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능숙했다면 얻을 수 없는 경지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공감마저 더해져서 보너스 점수가 팍팍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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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11-2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 사는 양 좀 줄이려고 했더니만 bdafuck님께서 저에게 지름의 시련을 새로이 내려주시는 군요. 기꺼이 받겠나이다. 어흑. ㅠ ㅠ;;;

hallonin 2006-11-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owup 2006-11-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너무 달게 받으시네요.
그나저나 이 만화 당기네요.
아무래도 bdafuck님은 만화 평론가로 데뷔하지 않으실까 싶은데요.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제가 일찍이 알아 봤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겁니다. ㅎㅎ)

hallonin 2006-11-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집에 쌀이 떨어져가고 있어서 쿨럭-_- 데뷔고 자시고 당장 먹고 살 일자리와 돈이....

카프리 2006-11-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플리>.. 동네 대여점에서 들여놓을 것 같지 않아 몹시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살게 몇 권 있다보니 왠지 만화책구입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해야 한다는게 눈치보이네요.. ^^''''''

iamX 2006-11-28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헉. 저러면 곧휴 진짜 아플 것 같은데요. ;;;

hallonin 2006-11-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 현재까지 훌륭한 작품이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죽었다] 같은 만화를 왜 그렸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뭐 [그녀가 죽었다]도 1권의 몽롱한 정사씬 만큼은 실로 출중했죠. 더군다나 네크로맨틱의 대상인 히로인이 단발!

거듭 태어나는 겁니다. 강안남자로....

iamX 2006-11-2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녀가 죽었다'의 그 오카자키 마리 인 줄 몰랐네요. 그림체가 바뀐 건지. 상당히 토실토실한 그림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그녀가…' 1권 봤을 때는 꽤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 2권에서 그렇게 끝내버릴 줄은 ;; 그리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hallonin 2006-11-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스토리작가와 별로 안 맞았던 듯.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무간도]는 다소 아쉬운 영화였다. 그것은 '무간지옥'이라는 제목에서 따온 그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추어 영화가 너무도 '인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은 홀로 범죄 조직 속에 들어가 있지만 황국장과 부자관계와 비슷한 정서를 꾸준히 유지하기에 세상에 달랑 혼자 남았다는 억울한 면모가 상쇄된다. 더군다나 인덕이 높은 나머지 한침의 두둑한 신뢰를 얻게되며 그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된 조직원에게조차 그 높은 품성 덕에 폭로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같은 입장인 유건명과 진영인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심적으로 서로에게 공명한다. 이 모든 것들은 홍콩영화의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의, 그 아시아적 정서의 전통적인 현현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유건명이 진짜 무간지옥에 들어가 있음을 절절하게 느끼기 위해선 거의 심리스릴러에 가까웠던 [종극무간]까지 가야했으며 [무간도]의 화면이 내비치는 이미지들은 CF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도시적 세련됨과 더불어 홍콩영화 특유의 후까시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고 보긴 힘든 혈통성을 보장하고 있었다. [무간도]는 온전히 무간지옥이라고 부르기엔 좀 화려하고 너무 인간적인 세계였다.

 

시나리오만 봤지 원작은 안 봤다고 누누이 얘기했던 마틴 스콜세지는 [디파티드]에서 어떤 인의도 느껴지지 않는 진짜 지옥을 열어보인다. 여기서 진영인역이 컨버전된 빌리 코스티건은 정말 살아남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바둥거려야 할 운명이다. 그와 그를 침투시킨 국장과의 관계는 정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철저하게 계급관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빌리와 보스인 코스텔로와의 관계 또한 오직 냉정한 업무관계의 연장에서만 파악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코스텔로의 손에 의해 죽게 될지, 아니면 무언가 틀어져서 바깥세상과의 연결이 모조리 끊기게 될지를 계속해서 걱정하는 신경증적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유건명의 컨버전인 콜린 설리반 또한 마찬가지다. 반복해서 보여지는 주의회의 이미지 속에서 신분상승의 욕구를 강하게 내비치지만 코스텔로와의 위험한, 그리고 철저하게 '비즈니스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는 유건명처럼 충분히 능력있는 면모를 보이면서도 훨씬 비열한 인상으로 쉬지 않고 초조해하며 불안 속에서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이 둘은 한가지 공유하는 게 있지만(원작과 비교하여 가장 달라진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서로에게 공감하는 정서가 아니라 그나마 인간답게 살기 위해 차지해야 할 조건, 제한된 위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한정된 자원을 차지해야 하는 절박함에 있어서 또한 이 둘은 교감이라기 보단 서로 어떻게든 물어뜯어야 할 처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멧 데이먼은 이 두 바닥난 인물들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손색이 없는 기량을 보여주며 그것은 스콜세지의 기름기 쫙 뺀 연출과 부합된다. 보스턴시에서 벌어지는 이 아귀지옥을 다루면서 스콜세지는 어떠한 후광과 이미지적 화려함도 동원하지 않고 지독하게 삭막하고 건조하게, 심지어 [무간도]와 비교하자면 촌스럽고 투박하게까지 묘사해보인다. 그래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무간도]에서 느껴졌던 그윽한 눈빛 하나로 만사를 파악했던 고수들간의 무언의 합이 아니라 주먹질과 끊이지 않는 진한 욕설, 내내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오가는 투견장에서의 진탕속 개싸움에 가깝다.

 



 

사실상 두시간 이십여분의 상영시간 속에서 더이상 얘기할 건덕지가 없이 온전하게 이야기 자체를 끝마치는 [디파티드]는 원작과는 달리 남은 이에게 영원한 억겁의 지옥을 선사해주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하게 [디파티드]가 [무간도]와 같은 자리에서 시작하여 다른 이야기가 된 것을 보장한다. 마지막씬에서도 드러나는 그 노골적인 미장센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가히 '미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토성과 관련해서도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산 채로 지옥을 순례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죽은 이(the departed)'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추가 -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난 이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아마 짐 호버만은 기억에 안 남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1&article_id=43075

잭 니콜슨의 과잉연기에 대해선 적절하게 동의. 그러나 그렇다고 2인자였던 레이 윈스턴이 더 무서웠다고 하는 것은 먹물 특유의 텍스트에 끌려간 엄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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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5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11-2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쓴 [무간도]에서의 세련됨이라고 하는 것이 접선장소인 옥상의 열기 속에서 일그러진 도시의 모습, 자동차 위로 떨어지는 황국장, 유건명의 머리 위로 총을 겨눈 진영인의 모습 등등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적 랜드마크를 말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무간도]가 별로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그 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란 것도 위에서 말했듯이 [종극무간]에 이르러서야 느낄 수 있었죠. [종극무간]이 한 미쳐버린 인간에 대한 긴 해설이었다는 걸 감안하자면, [무간도]에서의 고독과 불안은 [무간도] 그 자체만으론 부족했다는 것을 시리즈 자체적으로 반증하는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무간도]에서의 그 둘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뛰쳐나와도 될 것 같은 그런 여유로움마저 느껴졌거든요. 시나리오적으로 봐서도 그 둘이 약간의 트러블을 감수하면서 얌전히(적어도 유건명이 한침을 살해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었다는 건 다소 설명부족인 감이 있으며 동시에 그 둘이 그곳을 뛰쳐나오지 않고 파멸의 운명으로 향한다는 흐름 자체는 홍콩 하드보일드 특유의 후까시적 면모를 강조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디파티드]는 시나리오를 약간 바꿈으로써 거의 완전하게 그 둘이 지옥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고 있죠.
물론 전 [무간도]도 [디파티드]도 매우 즐겁게 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비약적이라고 욕먹을까봐 안 적은 건데 [디파티드]의 마지막은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의 라스트씬을 은근하게 불러오게 만드는 어떤 아우라가 있습니다. 박찬욱과 스콜세지가 만났었다는 얘기가 계속 떠오르더군요. 헐헐.

2006-11-27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11-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편은 훌륭하고 3편은 글쎄올시다... 입니다. 절제된 후까시, 저 또한 사랑하는 미덕이죠.
 























http://5cm.yahoo.co.jp

 

내년 봄 개봉 예정. 내용은 두 연인을 바라보는 세개의 짧은 단편 모음이 될 것이며 SF적 요소는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연애물이 될 것이라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더 강력해진 광원효과의 달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예고편만 봐도 신카이 마코토의 트레이드 마크격인 씬들이 모조리 업글되서 다 들어가있군요. 자, 전부터 얘기된 것이지만 역시나 스토리가 관건.... 이지만 SF라는 어깨뽕이 빠진 현재, 국문과 출신이라던 그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제목인 '초속 5센티미터'는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http://www.mncast.com/outSearch/mncPlayer.asp?movieID=10005167320061123032219&player=7

 

 

 

 

 

 

 

EF - a fairy tale of the two. 제작 minori. 12월 발매 예정.

에로겜입니다.

뭐 신카이 마코토가 모조리 감독했다는 건 아니고 오프닝만 맡은 것인데. 아무튼 그 짧은 오프닝에서마저도 자신의 재활용 이미지들을 모조리 드러내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감췄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봤을 듯. [초속 5센티미터] 제작비 벌기 위해서였나 아무튼 알바도 확실하게 해치우는 신카이 마코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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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6-11-2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는데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의 작품은 다 봤네요. 제 짧은 생각에, 그의 서정성은 SF쪽 보다는 현실적인 연애담에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화면 하나하나의 색감이나 분위기가 참 좋네요. 좋은 소식 고맙습니다.
게임은 통 문외한이지만, CF만 봐서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순수한데요.

hallonin 2006-11-24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낭만적인 배경을 병풍 삼아 순수해보이는 캐릭터들이 나와서 XX를 %고 &\를 #으며 **에 $?를 !는 게임입니다!
 

언제쯤 끝장날려나?

 

 

 

그러나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05&article_id=0000000155&section_id=104&menu_id=104

토끼 유전자를 심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습니다.

 

 

 

 

뭐 부럽다는 건 아니고....

 

 

 

 

토끼 하니까 생각나서 하나 더.

 

http://youtube.com/watch?v=MnXR5Baq0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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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스하게. 거칠었던 기억들. 또한 조심스럽게.

바라지는 않았던, 그러나 피하지도 않았던. 혹은 눈감으면서 원했던.

미필적 고의의 죄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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