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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콘 근크리트 - 전3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황학동 거리는 유난히 황량해보였다. 이미 청계천 공사때 윗층 반절이 그 무언가에 의해 깎여져 나가 있었던 상아빛 건물들은 이젠 그 벽 곳곳에 붉은색 라카로 철거라는 글자가 자리를 남기기 아까운 것처럼 틈틈이, 길죽하게 그어져 있었다. '한놈만 걸려라. 여기다 쓰레기 버리면 죽여버리겠다', 라는 글자도 덤으로 있었다. 그것은 철거민의 것이었을까 철거자의 것이었을까. 황학동 초입구에 있는 대부분의 가게는 셔터가 내려져 있거나 반쯤 부서져 있었고 그 초라한 건물들 뒤로 한때 공터였던 곳에는 롯데캐슬에서 만들고 있는 '명품주거공간' 롯데캐슬 베네치아의 웅장한 모습이 마치 제 앞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괴물처럼 위협적으로 건물들을 내리 깔고 있었다. 을씨년해 보이는 황학동 옛건물들은 그 괴물의 입 속에서 무력하게 박살날 시간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싸구려 관우 동상, 황소 모양의 부조, 손때 묻은 워크맨들, 어렸을 적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었던 '설산 속의 예수' 그림, 미군부대 쓰레기장이나 군부대 폐품 재고 창고에서 빼내온 듯한 색바랜 군복들과 베낭, 찌그러진 반합들, 먼지 끼고 기스난 플라스틱 케이스의 폴라 압둘 카세트 테이프, 한껏 다리를 벌리고 있는 유치찬란한 표지의 포르노 CD들. 과연 누가 사갈지가 의심되는, 노래방에서 촬영한 것 같은 뽕짝 뮤직비디오를 틀어대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판매상, 피곤에 지쳐 팔 속에 머리를 묻은 할머니 뒤로 늘어서 있는 가지각색의 딜도들, 권당 오백원씩에 파는 중고책더미와 그 뒤에 보다 비싼 값이 매겨져서 쌓여있는 복제 출판된 사전들. 그 모든 것이 약간씩 적어지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기력이었다. 혼이 억지로 뽑혀나간 것 같은 분위기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번달 말까지 다 정리하래."
나에게 벅샷 르팡끄를 알게 해준 중고음반점 안은 사장인 노인이 피우는 담배 연기로 니코틴 안개가 뭉실뭉실 만들어져 있었다. 이미 가게 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주름살이 박힌 노인들이 자리를 떡하니 잡고선 자신들이 차지할 LP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미 끝날 때를 알아챈 사냥꾼들이 훑고 지나간 듯, 빽빽하게 세워진 LP와 CD들 군데군데 뻥 뚫린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어? 얘기해봐."
사장은 면식이 있는 듯, 사이먼앤가펑클을 찾던 노인에게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영업권리니, 이득이니, 자산보장이니 하는 자신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LP사냥꾼인 노인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가게 안을 한차례 회빛으로 물들였다. 구석에 놓인 오래된 빨간색 TV 안에선 이승엽이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가고 있었다.
스즈키 : 3번가에는 겐파치가 하는 스트립쇼 극장이 있습니다. 50년도 더 전부터 이 거리의 사내들이 거기서 어른이 됐죠. 꼭 애들 놀이터로 바꿀 필요는 없잖습니까.
두목 : 하지만 거기도 지금은 댄서 수가 손님보다 많다잖아. 안 그래 생쥐?
[철콘 근크리트] 2권 P61~62
짐작컨대, 그곳은 죄많은 거리였을 것이다. 오래 전 그곳에선 유진의 전혀 야하지 않은 초기 단편집을 5000원을 받고 뭣도 모르는 애들한테 팔아넘기던 상인도 있었을 것이고 [여명의 눈동자] 1화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키라라 카오리의 최신작이라고 속여 판 상인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조폭들이 노점상들을 협박해서 자릿세를 받기도 했을 터이고 억대 재산을 가진 노점상이 생활보호대상자인 것처럼 속여서 동사무소에서 생활보조금을 타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갈라진 패거리들도 있었을테고 술에 취하면 길거리에 오바이트를 쏟고 가판대를 부숴가면서 개처럼 싸우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처리'는 거리가 짊어진 죄에 대한 합리적 이성의 승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그 지저분한 거리의 노스탤지어마저 지워버리긴 힘들다. 적어도 예전의 그 거리는 오늘처럼 죽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노인, 장애인, 약장수, 야바위꾼, 사기꾼, 파키스탄 노동자, 러시아보따리상인들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물건들로 만들어진 골목에서 득시글거렸지만 언제나 내일을 향해 걸어갈 힘이 있는 활기가 느껴졌었다. 그러나 오늘 그 거리에선 숨이 턱에 차오른 명멸감만이 느껴졌다. 도살장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철콘근크리트]에서 쿠로는 내내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차 있다. 그의 분노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계속 성이 난 채로 지옥의 거리를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사람들을 구타한다.
그는 청춘이자 과거이자 기억이다. 그리고 거리 그 자체다. 그는 뒤틀려가는 자신의 거리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거리가 아닌 변해가는 거리.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들어오며 사람들은 더없이 착해지고(정부 기준) 더이상 지저분한 것이 없어진, 깔끔하고 계획적이며 이상적인 거리. 그 변해가는 거리에서 쿠로는 광기와 폭력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말마따나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제 그곳이 사라지고 롯데캐슬의 웅장한 콘크리트 장벽 속에서 인공 청계천을 바라보며 자랄 아이들은 또한 그들이 보는 것을 더 미래에 고색창연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그리고 거기엔 리모델링과 관련한 집값 조정에 연계되는 아파트 주민 측의 보이콧과 님비현상에 관한 신고전주의적 이야기가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나의 노스탤지어는 '지금' 부서져 가고 있다. 나는 이제 미군 전투식량이나 필리핀에서 수입된 머쉬멜로우, 중고음반을 구하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그 명백한 사실이 나를 조금 피곤하게 만든다. 아마 그곳에서 산 마지막 물건이 될 싱가폴제 흑맥주와 미군식량 속 밀빵과 치즈소스, 그리고 로리나 멕케닛이 약간의 위로가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