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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나 하러 갑세다.

 

 

아 근데 투표하고 바로 일하러 나가야 함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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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12-1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종일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야근도 하라는데 학원가야 한다고 겨우 도망…
근데 그래봐야 전 한낱 알바라서 연봉협상도 안 되고, 고용도 불안정하고 월급 타봐야 수입의 9%를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뜯기고… 졸라 좋삼.
휴일에도 일하는 세상 만들어준 노무현 만세. 개혁세력 만세.

hallonin 2007-12-2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더 빡쎄게 살아봅시다 히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신중함과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이 연출에서 드러날 때 나락에 떨어졌던 틴에이지 팝무비도 햄릿의 영역으로 기적처럼 솟구쳐 올라 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스파이더맨]이 단계적으로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 [배트맨 비긴즈]는 보는 이가 피곤해질 정도로 꽉꽉 밀어넣은 스토리 속에서([배트맨 비긴즈]는 거의 드라마 1시즌 분량을 두시간 짜리 영화에 밀어넣은 것 같은 감각을 선사해준다) 트라우마와 신경가스, 파쇼적인 전투집단들을 등장시키면서 단숨에 성년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팀 버튼과 프랭크 밀러가 가면을 쓰고 검은 갑옷을 입은 채로 도시를 날아다니는, 초능력이 아닌 돈(!)과 신체 단련만으로 적을 상대하는 영웅 속에서 신경증적인 어둠을 발견해낸 지점과 같은 통찰이었으리라. 

조커와 배트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인물이다. 항상 심각하게 찌푸린 얼굴을 하고 표정조차 알 수 없으며 검은색으로 자신을 도배한 배트맨과는 달리 조커는 원색의 옷들을 두른 채 늘상 웃고 있으며 유희에 가깝게 사고들을 친다. 그러나 그는 배트맨이나 자신이나 같은 괴물이란 걸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조커를 극복해야 하는 배트맨의 통과의례, [다크나이트]는 악과 다른 얼굴을 한 괴물이란 어떤 자리를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 마땅한 수순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익숙하게 반복되어 왔지만 그 반복 만큼이나 흥미로움 또한 보장하는 자아와 정체성의 거울효과에 대한 고전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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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40대의 공무원. 별 열정 없이 문화계획시안에 도장을 찍어주는 걸로 월급을 버는 독신남. 일이 끝나면 핍쇼를 보러 가서 자위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화자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굴러 들어온 유산 덕분에 여유로운 주머니를 가지고 태국으로 섹스관광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레리를 만난다.

죽기 직전까지 끝없이 삶을 추구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무기력하고 일종의 '이미 죽어버린 자'에 가까운 존재다. 투쟁영역에서도 멀찌감치 벗어나 있으며 성적인 욕구는 충만하나 그걸 금새 인스턴트적으로 때워버릴 수 있는 의식과 행동의지를 가진, 현대사회의 회로 끝자락이 만들어낸 능률 안 좋은 단말체적인 존재. 그러나 그가 아버지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섹스다. 여성의 생식기. 어머니의 생식기, 이슬람 여성의 생식기. 그는 그 사실을 단 두 줄로 해치워버릴 만큼 무덤덤하게, 때로는 적개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더이상 얘기되지 않고 금방 치워진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차기에.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자이기에.

미셸 우엘벡이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하다. 그의 시선은 서구 유럽 사회, 특히 프랑스 사회라는 미시적인 영역에 대한 경멸적인 판단으로 드러난다. 그는 서구사회가 전파해 온 소위 '지성적인' 선택들이 실패였다고 꾸준히 얘기해왔다. 그리고 증거로 그 잘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평이란 것이 얼마나 쉬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잡아내는 데 귀신 같은 솜씨를 발휘해왔다. 그가 여기서 들이미는 카드는 여행이란 개념이다.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경험인 섹스관광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는 그 문제에 도덕성을 묻는 이들에게 되묻는다. 어째서 그들은 섹스관광을 떠나는가. 인간의 본능인 섹스는 왜 그토록 어려워져버렸는가. 인식이 본능을 제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가 정당한 것인가. 작가는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을 잔인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본능의 합리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사업가적인 감각이다.

바로 그렇다. [플랫폼]의 반쪽을 차지하는 건 사업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도덕적 판단의 차원을 훌쩍 넘겨버린 채 우리는 중반부에서부터 섹스관광을 합법적인 차원으로 올려서 돈을 벌려는 인물들의 재간을 볼 수 있다. 마치 [소립자]에서 보여줬던 SF적 과격함처럼, 사고를 넘어서서 행동의 경지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주먹구구식이었던 욕망과 쾌락의 제도화를 꾀한다. 그것은 가짜 위로지만 서구적 가치의 추구가 불러온 마지막 도착지이며 종말 직전에서 머뭇거리는 망설임이다. 잔인하지만 처연하진 않은 이 인식의 도살과정. 그리고 여기서 영토와 자본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섹스관광에 대한 직시와 그 활성화 방안에 대한 작가의 제시는 역설적으로 섹스관광에 낭만을 가져야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에 대한 직시기도 하다. 미셸 우엘벡에 따르면 현대의 프랑스에서 서구사회 지배 인종들 간의 섹스는 너무나도 고도의 행위가 되버려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얘기된다. 그래서 섹스는 인종 간의 경제격차, 혹은 지배격차에 의해서만 행위된다. [플랫폼]에서 법적 프랑스인들끼리의 섹스로 이뤄지는 경우는 오직 나와 발레리뿐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나머지는 SM이거나 난교, 아시아인이나 아랍인들과의 지위-경제적 격차로 매개되는 섹스들뿐이다.

그래서 발레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플랫폼]의 축이자 나머지 반쪽이 된다. 발레리는 투쟁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피로를 모조리 짊어져야 할 운명인 그녀는 자신이 차지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투쟁영역의 확장] 텍스트 자체의 인간화다. 끝없는 소모전 속에서 그녀는 나와 사랑을 나눈다. 섹스를 하고 난교를 하고 어떤 것도 제한 없이 행동으로 몰아부치지만 그녀와 나는 서로를 잊지 않고 향한다. 그러나 그녀는 SM에 대해선 혐오반응을 보인다. 합치될 수가 없는 관계가 증명되었을 때 향해야 할 고통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발전시킨 행위를 접하고 그녀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온갖 수단을 통해 본능을 외면하면서 파멸되지 않기 위해 잔인해지는 세계에 대한 분노다.

강제적인 신뢰관계를 폭력을 통해 구축해야 하는 SM과 달리 완전히 정반대의 위치를 가진 둘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로맨스 소설인가? 맞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커플로 그려지는 나와 발레리의 사랑의 과정에서 동인을 가지는 건 발레리 쪽이다. 그녀는 계산적인 성녀다. 나는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되묻는다. 자신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든 무언가가 있었는가. 대답은 항상 없다, 로 나온다. 끝까지 제시되지 않는 발레리가 그를 향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은 딱 그정도로 의문을 끝내버린다. 그들의 위치 자체가 그들의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게 만들기에, 이 환상극 부분은 소위 소설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내가 맞이하는 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아주 조용하고도 사근사근한 소멸이다. 마치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방치되서 죽은 아버지와 상반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게 된다. 저항의식이라면, 유전자가 후대로 배달되지 않았다는 아주 미약한 위안. 징글징글한 연쇄의 끝.

미셸 우엘벡은 유혹하지 않는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재발견해낸다(마치 소설 안에서 화자 '나'의 입을 빌려 말하는 예술론처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비의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 만든 소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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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들의 꿈이 이루어졌네요. 역시 아들은 계획임신이었던 건가.... 근데 뭐 이미 지난 달부터 아들은 인공수정으로 낳았고 여성 파트너랑 두 아들이랑 같이 넷이서 산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으니 그리 충격적인 건 아닌 듯. 이미 한참 전부터 레즈비언들의 여신님이었으니 완화도 됐고.

 

영화속에서 그녀는 남성권력의 자장에 의해 피해를 받거나 차별되는 역할을 유난히 잘 맡았었죠(개인적으론 [양들의 침묵] 원작에서 보여졌던 여성으로서 미국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꾸준한 문제제기를 보고 조디 포스터가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짐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액션배우가 아니면서 진지한 사회파-스릴러물에서 머리로나, 때로는 육체로까지 남자랑 맞짱 뜰 수 있는 아우라를 마련해 낸 몇 안되는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의 지성적인 포지션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의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작용됐던 것처럼 말이죠. 영 심심했던 [넬]은 두 젠더의 화해에 대한 조디 포스터 나름의 희망가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단순히 영화 속에서만 그런 피해를 받았던 건 아니죠. 리얼월드에서도 그녀는 그런 남성적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택시드라이버]와 연관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3살이었습니다. 연기인생에 대한 반전의 목적으로나 자기초극의 단계로서나 [피고인]을 선택했던 것도 의미심장하고요. 삶의 연쇄랄까. 생각해보니 남자에 질릴만도 하네요.

남성권력에 종속적이지 않기 위한 그녀의 선택은 지성적-직업적 차원에서 성적인 영역에서까지 성공적으로 이뤄냈다고 보입니다. 그 행로가 정말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여성해방적 절차를 밟아가는 거 같네요. 물론 정치적인 측면에서.

근데 조디 포스터 보고 가장 발정났었던 건 [매버릭]이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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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그렇구나..

hallonin 2007-12-1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