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HS의 문호가 열리게되고 70년대를 아우르는 타이틀들을 쏟아내던 80년대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소위 아마조네스와 코난을 섞어놓은 것 같은 도착적 환타지 영화들이었다. 비키니를 입은 몸에 기름을 한 바가지는 바른 것 같은 남녀 주인공이 착 달라붙어서는 어딘가를 아련하게 노려보고 있는 장면이 싸구려 질감이 나는 포스터용 그림으로 그려져 붙어있던 영화들은 십중팔구 정글이나 신전 같은 비스무리한 신화적 장소에서 고난한 모험을 펼치면서 괴물과 악당들을 물리치고 진정한 사랑을 쟁취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까지 고마울 정도로 많은 벗은 몸뚱아리들이 나오긴 하지만. 묘한 레즈비어니즘과 우회한 난교의식, 마초적 영웅전설과 핀업걸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그런 영화들은 [코난] 이후 일종의 캠프적 지표를 가지면서 대량생산되어 B급 영화시장을 장악했던 아이콘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거기서 아놀드 주지사와 폴 버호벤과 리들리 스콧, 심지어 쥬스트 자킨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도 만들어졌는데 프랑스에서 만들어지지 말란 법 있냐. [그웬돌린]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이쪽 계열 영화의 거의 결정판에 가까운 물건이다. 수도원 기숙학교 학생인 그웬돌린은 꿈에서 위험에 처한 아버지를 보고 나비 수집가인 아버지를 찾아 보모인 베스와 함께 중국 어딘가에 있는 옉예익이라는 곳에 밀항한다. 그러나 화물을 뒤지던 도둑들에게 발견되어 카지노 주인, 유키에게 팔리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막 일을 당하려던 찰나 유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튀어나온 마도로스 모자를 쓰고 통통배를 보유한 건달 윌라드에 의해 구출되고, 그에게 빠진 그웬돌린은 아버지를 찾아 오지로 떠나는 여행에 그를 고용한다. 신비한 나비를 찾아 험한 오지로 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그들은 오지의 원주민인 키옵스족에게 제물로 희생된 아버지 얘기를 듣게 된다. 의문을 풀기 위해 계속 나아가던 그들은 키옵스족에게 붙들려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키옵스족이 두려워하는 ‘칼리비두’라는 초자연적인 사막의 모래돌풍 덕분에 살아남는다. 드넓은 사막에서 그웬돌린은 꿈에서 본 광경을 마주하게 되고 아버지의 나비를 잡기 위해 지하 도시로 뛰어든다. 그 지하도시엔 여왕님이 지배하고 있는 아마조네스 비스무리한 애들이 살고 있던 것. 얘네들은 남자가 없는데 그 이유가 남자 하나를 붙들면 최강의 여전사와 한 번 섹스해서 애낳는데만 쓰고 죽여버리기 때문이란다. 당연히 윌라드가 붙들려서 그런 꼴을 당하게 생겼는데 어쩌다보니 평화주의자인 그웬돌린이 정체를 숨기고 최강의 여전사로 뽑히게되고 이어서 그웬돌린과 윌라드의 목숨을 건 감동적인 빠구리가 펼쳐지게 된다(물론 예리한 감독은 이부분에서 여왕이 관음증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그러던 중 초반에 등장했던 중년 아저씨에 의해 왕국 멸망~ 물론 우리의 남녀주인공은 어찌어찌 위험을 피해서 살아남아 사막을 한참동안 뒹굴며 키스를 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스케일부터가 장난이 아닌 스토리지만 보고나면 남는 게 없는 전형적인 이쪽 장르의 영화다. 직접 시나리오까지 집필하신 감독인 쥬스트 자킨은 저 전설적 시리즈물 [엠마누엘]의 감독. 감독의 전력 탓인지 장르의 전통 탓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팔에 손만 대도 오르가슴에 이른 표정을 짓는 여주인공과 후반부에 쏟아져나오는 웃통 벗은 아마조네스 전사들은 이 영화의 방향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주는 풍경들이다. 쓸데없이 길게 늘여쓰게 만들 정도로 복잡하기만 한 스토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계열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도원 기숙학교를 나온 여주인공(대개 세상물정은 모르지만 순진한 색기가 넘치게 마련인)과 가슴에 털난 마도로스형 남주인공, 당연한 것처럼 왜곡된 중국의 이국적 풍경(이 감독의 장기다)과 범죄의 소굴 카지노, 사람 잡는 미개종족과 괴상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웃통만큼은 여한 없이 벗어주는 여인왕국 등등. 이 모든 게 나비 때문에 그러는 거란 걸 알면 그 인식의 스케일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영화 속에서 나비는 제대로 신경쓰이지도 않지만. 여기에 시대를 앞서는 유사 폰섹스까지 나오는 걸 보면 과연, 감독의 상상력의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엉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경찰청 사람들]의 재현극 정도만 기대해도 유쾌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완성도가 아름다운 영화다.
1. 뭐, 문제의 유사폰섹스씬을 보다보면 옛적엔 도색소설들이 저런 용도로도 쓰였겠지.... 하고 생각이 들어서, 웬지 좋은 시절이었겠다는 생각이 듦-_-
2. 아마조네스들이 입고 다니는 출처불명의 일본풍 복식과 헤어스타일은 이 영화가 가진 환상적 오리엔탈리즘이 전해주는 결정타.
3. 케이블 MBC무비에서 가끔씩 방영해준다고 함.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