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C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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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하기 전부터 미국감독이 중국배우들로 하여금 영어로 대사를 하면서 일본인 연기를 하게 만든다는 글로벌시대적 우스갯소리를 즐겁게 체현하는데 기어이 성공한 [게이샤의 추억]의 트러블로 가득 찬 제작과정을 보면, 결과야 어찌됐든 이 영화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발전적 완성과정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화가 자극하는 가히 범아시아적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 문제와 너무 반복되서 제작진에겐 못이 박혔을 터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게이샤의 추억]은 그 모든 논란적인 디테일을 일부러 무시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역으로 그 함정들에 고스란히 빠져든 흥미로운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롭 마샬은 이 영화를 게이샤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지향했던 지점은 팔자 기구한 여자들이 겪어야하는 고전적인 인생역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것은 이 영화를 보다 그의 필모그래피다운 영화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본토 섬나라쪽 제작인력들을 대거 빠져나가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롭마샬이 노린 것은 게이샤의 삶과 기모노의 아름다움, 미묘한 이국적 공간과 풍습들이 불러일으키는 순수한 드라마의 영역(영화와 뮤지컬의 접점을 모색했던 [시카고]의 서사가 처음부터 차지한 자리에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 부분)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카고] 때보다는 보다 덜 소란스러운 모양새로.

전작인 [시카고]를 더럽게 지루한데다 하도 번쩍여서 눈이 유난히 아팠던 기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나라 해도 감독이 선택한 그 방법론이 이 복잡한 혈통의 영화가 가진 제법 적절한 돌파구였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이종교배의 결과는 배우들의 어색한 영어연기와 분위기만 따온 것 같은 독특한 게이샤들의 공간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저점에 위치한 드라마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무척이나 서구적이며 도식적이고 세부적인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면모를 보인다는 점(처음부터 외부인의 시선으로, 겉돌기로 작정을 하고 만들었으니 당연하기도 하다)에서 발전적 융화라기 보다는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으로만 보인다.

엄청난 박력으로 몰아치는 예고편에 비해 심하게 정적인 본편은 지난번 영화인 [시카고] 때와 다를 바 없고.... 다 보고 난 뒤엔 뭐하러 봤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비슷했다.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이 게이샤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되새기자면, 이 설익은 듯한 영화가 최초로 개봉한 일본에서 별 재미를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융합과 타협이 간혹 놀라울 정도의 미학적 성과를 가져온다는 건 사실이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그 반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실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시종 배우들의 어색한 영어 덕에 유난히 게이샤라는 단어에 억양이 들어가서 툭툭 튀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데, 그 자리에 게이샤 대신 쁘레따뽀르떼라고 써도 좋을 성 싶다. 이 영화에서 건질 건 게이샤들을 패션모델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던 애초의 수많은 의도들중 그나마 가장 잘 지켜진 그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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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2-1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메..ㅠ.ㅠ 요기에 달려있던 제 댓글이 날라가 버렸네요
그저 단지 생각없이 봐서 시카고랑 게이샤를 재밌게 봤다는 둥의 말이었는뒹
쩝 지우신곤강..

hallonin 2006-02-1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그럴 리가 있나요-_- 전 댓글과 관련글이 제 생각과 심하게 안 맞으면 차라리 논쟁을 개시하지 지워버리는 짓은 안 합니다. 아마도 알라딘의 오류인 듯 싶네요.

배가본드 2006-02-1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용 오늘 O.T갔다왔는데 피곤한김에 컴터앞에 ㅋㅋ
D.J DOC와 신나게 놀아서 ㅎㅎ 창렬이 삼촌?(본인이 그러시더라구용)을 눈앞에서 봐서 다른건 재미없었어도 만족이 된다는..^^ 헛소리 그만하구..
'오만과 편견'이 영화로 나온대서 볼라고 좀 샀는데 책이 두꺼워 펼치기가 겁나네유
영화 개봉하묜(울나라는 멀었나?) 그것도 형님의 시각으루 평해주셨3 합니다

hallonin 2006-02-1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은 3월 초에서 중순 즈음에 개봉 예정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와 더불어 관람예정.
 

갑자기 떠오른 건 아니고, 예전에 저질렀던 인식적인 실수가 꾸준하게 머릿 속에서 굴러다녀서요. 바로 텔레비전에 대한 얘기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텔레비전의 미래에 대한 착각이었지요.

때는 마음의 고향 세기말로, 전자 네트웍이 불러올 세계 자체의 변화와 밀레니엄 오류에 의한 인류멸망에 기대를 걸고 살아가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울증이란 걸 가르쳐주고 있었고 [serial experiments lain]이 아는 사람에게만 열광적으로 전파되고 있었으며 오시이 마모루가 [공각기동대]를 만든 다음엔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로 떼돈을 벌었고 매스컴은 차세대라는 수식어를 중독이 된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죠.

어쩌면 저도 그런 것에 쉽게 동화되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즈음에 [카우보이 비밥]의 23화인 'brain scratch'편을 보면서 오만하게 비아냥대고 있었으니까요. 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 에피소드는 미래사회에서의 매스컴의 오용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구가 바로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절정은 마지막 부분의 대사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품이 무엇인지 아는가..."

저 답은 텔레비전이었죠. 세상에, 너무하는 거 아냐? 전자의 대기화가 예고되는 컴퓨터 시대에, 공간을 가리지 않는 전자 네트웍의 발생만을 기다리는 이 때에, 아니 심지어 저건 미래잖아. 저 미래에 가서도 텔레비전 타령이라니. 저는 그것이 [카우보이 비밥]의 고전활극적인 스타일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하나의 표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마디로 저 의미심장한 성우의 목소리로 연출되었던 대사 자체엔 눈꼽만치의 진지함도 부여하지 않은 거죠.

그러나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아주 완전히 틀린 거죠. 그래서 이젠 텔레비전이 가진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홈쇼핑의 대성공을 가리켜 봐야겠군요. 동영상 쇼윈도인 홈쇼핑은 하루종일,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수백가지 상품과 이벤트를 줄기차게 보여줍니다. 저는 홈쇼핑이라고 하는 것이 이정도로 성공할 줄은 솔직히 개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성질을 건드리는 현상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저는 사람들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일, 아니 나아가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데에조차 피로를 느낄 정도로 게을러터진 생물이 되리라곤 상상을 못했던 겁니다. 이부분이 바로 결정적으로 컴퓨터가 텔레비전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엠티비의 성공과 정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때까지도 이해를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은 서사를 원합니다. 이야기를 원하죠. 자신의 눈과 뇌를 만족시켜줄 대상물을 갈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점점 일을 할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더 분명해지겠죠. 혹은 일을 하는 도중에라도 상관없습니다. 재방송이나 반복방송의 진정한 위력이 여기서 발휘되는 거죠. 그에 따라, 자신의 기호를 일정 정도(그리 까다롭지도 않습니다) 만족시키는 특정한 발산체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서 내내 접하는 것은 금방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상태구요.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스타가 나와 홍보를 한 다음에야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을 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매니지먼트사들이 드라마와 쇼프로, 영화의 연계를 노리고 대개 비슷한 시즌에 동시에 일을 진행시키는 걸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투사부일체]만 봐도, 쇼프로란 쇼프로는 거의 모두 소화해낸 출연진의 노력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영화의 성공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있죠. [마이걸]은 자체로도 잘 빠진 트렌디 드라마였지만 이준기가 출연했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일일 겁니다. 양동근의 드라마 복귀작 또한 새영화의 개봉과 시기가 겹치고 있겠죠.

뭐 생각해보면, 저는 텔레비전을 거의 안 봅니다. 가끔 가다 뉴스나, 저녁 식사 시간이 겹치는데다 이영아가 출연하므로 보게되는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를 제외하면 말이죠. [별난여자 별난남자]의 지난한 일일드라마 지옥을 벗어난 것은 기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저에게 텔레비전이 가지는 의미란 무척 적군요. 그에 비하면, 예상 가능하듯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주구장창일 정도입니다만.

일단 텔레비전의 지속성과 채널의 분화, 그리고 그에 따른 정보의 정체상태와 게토화, 그리고 능동적 시청자의 자격과 타문화 매체와의 연계는 문제의 본질을 놓쳤던 저에게 일종의 컴플렉스적 화두가 될 것 같습니다. 파고들면 재밌을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39800원을 신봉하는 신흥종교가 나타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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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부제에서 비중 있게 '슈니츨러의 삶'이라는 타이틀이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성과 도덕에 관한 인간의, 정확히는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모순적 태도에 대한 현미경적인 분석을 이뤄낸 현상학적 보고서인 [꿈의 노벨레]의 저자인 슈니츨러의 일기에 적힌 사례들은 책의 각 주제를 여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할 뿐이다. 실상 수십년간 매일 썼다는 슈니츨러 일기의 방대한 분량과 사적영역에의 집중에 대한 부담도 부담이겠거니와  저자인 피터 게이가 노리는 지점은 그 열쇠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내는 커다란 의식의 풍경화다.

19세기 유럽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스팀펑크 장르의 인지적 바탕이며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문명의 희망이 넘치던 시기였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긍정적 시선이 넘치던 시기였다. 확실히 그 시간은 여러가지 문학작품과 영화들, 애니메이션들 속에서 다뤄지는 환상적 대체역사물의 소재로, 모험과 낭만이 동시에 어우러지던 세계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전해준다([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그 이면엔 빅토리아조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식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으며, 전통으로 말미암아 양식화된 귀족주의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어내던 때였고 기록된 역사상 최초의 시리얼 킬러인 난도질 잭이 그 시대적 상징과도 같은 음험한 악명을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다시 한 번, [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이 모든 현상적인 지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으며 어떤 행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그 정서적인 부분들이다. 19세기라는 시대를 만들어낸 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표상적으로 양식화되었으며 그 덕에 가장 분명하게 시대를 표상하는 부르주아라는 인물계층이 일궈낸 것들의 바탕엔 무엇이 있었는가. 우아하게 장식된 드레스와 통모자 안엔 무엇을 감춰두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는 그 시대의 말미에 현상 이후의 후유증을 분석하는 것으로 몸집을 드러낸 프로이트의 방법론을 빌어 슈니츨러의 글을 텍스트의 열쇠로 삼아 당대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잡아내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아련한 노스탤지어와는 거리가 먼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알고 있는 이라면, 피터 게이는 그 지식의 한 축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이미지에 가려 우리가 쉽사리 도식화하고 있었던 19세기 부르주아들에 대한 편견들을 하나하나씩 깨뜨려준다. 저자가 시대의 반영인 그 인물군에 대해 나름의 매혹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피터 게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리킨 유력한 시대의 적이었던 이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바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하는 작업은 오히려 신화를 깨어 그들을 보다 펄펄 살아있는 존재들로 만들려한다.

풍족한 미시사적 사료들의 제시를 통해서 벗겨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는 마치 [꿈의 노벨레]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모순의 정당화로 지탱되고 있다. 프로이트가 사건 이후에 남은 불가해한 찌꺼기들인 현실을 통찰하기 위해 모호한 꿈속으로 달려 들어갔던 것처럼, 여기서 보여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 이면은 단순정의만으론 채 설명하기가 힘든 복잡다단하면서도 총합적인 잡식성이 빚어낸 개개의 충돌이 하나의 태도적 반영으로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 '모호'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귀족도 아니고 서민도 아니며, 그 사이에 낀 계급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산업화에 따른 계급변동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하는 현상유지에의 욕구를 가진 부르주아 계층이 가진 다양하면서도 상충되는 면모의 현현이기도 하다.

말러의 공허와 미학에는 공감하지만 쇤베르크는 사기꾼이라고 여기는 슈니츨러의 내밀한 모습들은 그래서 그의 작품들의 무의식적 측면들과 더불어 시대의 뱃속에 감춰진 미궁의 입구로 적절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슈니츨러의 감춰진 세계가 외부와 충돌을 빚은 순간으로 귀환한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시대의 기억을 더듬고 자극하여 일깨우는 행위다. 슈니츨러의 트라우마가 바로 그 순간에 정립된 것처럼, 19세기라는 근대적 트라우마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형식으로든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로 귀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두 번에 걸쳐 벌어졌던 대학살극과 이미 열려버린 이상, 여즉껏 그 힘을 놓지 않는 몰이성과 혼돈, 부유와 해체의 시대를 당긴 방아쇠가 어디쯤이었는지를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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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선 어떤 경로로든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진 앨범이지만 1997년, 궤멸되어가는 얼터너티브씬이 그런지가 아닌 진정한 '대안' 음악으로의 가능성들, 하드코어에서부터 노이즈,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닉컨츄리힙합(=벡), 포스트락까지 유난스럽게 제시되는 것들 모두를 탐식증 걸린 것 마냥 먹어치우고 있을 때 가장 분명하게, 또한 정확하게 미래를 제시한 스페이스 카우보이들의 놀라운 걸작품. 서태지를 통해 그런지를 간접경험하고 앨범보다는 레일를 타고 전후좌우를 오가면서 'virtual insanity'를 부르는 제이케이의 뮤직비디오를 통해(혹은 그 이미지의 뻔뻔스러운 표절품들을 통해) 자미로콰이를 먼저 접해야 했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그루브 약빨이 듣기 시작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야 했지만. 도대체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로울 지경이다. 밤이든 낮이든 간에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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