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하기 전부터 미국감독이 중국배우들로 하여금 영어로 대사를 하면서 일본인 연기를 하게 만든다는 글로벌시대적 우스갯소리를 즐겁게 체현하는데 기어이 성공한 [게이샤의 추억]의 트러블로 가득 찬 제작과정을 보면, 결과야 어찌됐든 이 영화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발전적 완성과정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화가 자극하는 가히 범아시아적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 문제와 너무 반복되서 제작진에겐 못이 박혔을 터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게이샤의 추억]은 그 모든 논란적인 디테일을 일부러 무시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역으로 그 함정들에 고스란히 빠져든 흥미로운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롭 마샬은 이 영화를 게이샤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지향했던 지점은 팔자 기구한 여자들이 겪어야하는 고전적인 인생역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것은 이 영화를 보다 그의 필모그래피다운 영화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본토 섬나라쪽 제작인력들을 대거 빠져나가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롭마샬이 노린 것은 게이샤의 삶과 기모노의 아름다움, 미묘한 이국적 공간과 풍습들이 불러일으키는 순수한 드라마의 영역(영화와 뮤지컬의 접점을 모색했던 [시카고]의 서사가 처음부터 차지한 자리에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 부분)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카고] 때보다는 보다 덜 소란스러운 모양새로.
전작인 [시카고]를 더럽게 지루한데다 하도 번쩍여서 눈이 유난히 아팠던 기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나라 해도 감독이 선택한 그 방법론이 이 복잡한 혈통의 영화가 가진 제법 적절한 돌파구였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이종교배의 결과는 배우들의 어색한 영어연기와 분위기만 따온 것 같은 독특한 게이샤들의 공간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저점에 위치한 드라마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무척이나 서구적이며 도식적이고 세부적인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면모를 보인다는 점(처음부터 외부인의 시선으로, 겉돌기로 작정을 하고 만들었으니 당연하기도 하다)에서 발전적 융화라기 보다는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으로만 보인다.
엄청난 박력으로 몰아치는 예고편에 비해 심하게 정적인 본편은 지난번 영화인 [시카고] 때와 다를 바 없고.... 다 보고 난 뒤엔 뭐하러 봤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비슷했다.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이 게이샤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되새기자면, 이 설익은 듯한 영화가 최초로 개봉한 일본에서 별 재미를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융합과 타협이 간혹 놀라울 정도의 미학적 성과를 가져온다는 건 사실이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그 반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실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시종 배우들의 어색한 영어 덕에 유난히 게이샤라는 단어에 억양이 들어가서 툭툭 튀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데, 그 자리에 게이샤 대신 쁘레따뽀르떼라고 써도 좋을 성 싶다. 이 영화에서 건질 건 게이샤들을 패션모델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던 애초의 수많은 의도들중 그나마 가장 잘 지켜진 그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