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부제에서 비중 있게 '슈니츨러의 삶'이라는 타이틀이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성과 도덕에 관한 인간의, 정확히는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모순적 태도에 대한 현미경적인 분석을 이뤄낸 현상학적 보고서인 [꿈의 노벨레]의 저자인 슈니츨러의 일기에 적힌 사례들은 책의 각 주제를 여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할 뿐이다. 실상 수십년간 매일 썼다는 슈니츨러 일기의 방대한 분량과 사적영역에의 집중에 대한 부담도 부담이겠거니와  저자인 피터 게이가 노리는 지점은 그 열쇠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내는 커다란 의식의 풍경화다.

19세기 유럽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스팀펑크 장르의 인지적 바탕이며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문명의 희망이 넘치던 시기였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긍정적 시선이 넘치던 시기였다. 확실히 그 시간은 여러가지 문학작품과 영화들, 애니메이션들 속에서 다뤄지는 환상적 대체역사물의 소재로, 모험과 낭만이 동시에 어우러지던 세계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전해준다([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그 이면엔 빅토리아조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식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으며, 전통으로 말미암아 양식화된 귀족주의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어내던 때였고 기록된 역사상 최초의 시리얼 킬러인 난도질 잭이 그 시대적 상징과도 같은 음험한 악명을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다시 한 번, [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이 모든 현상적인 지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으며 어떤 행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그 정서적인 부분들이다. 19세기라는 시대를 만들어낸 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표상적으로 양식화되었으며 그 덕에 가장 분명하게 시대를 표상하는 부르주아라는 인물계층이 일궈낸 것들의 바탕엔 무엇이 있었는가. 우아하게 장식된 드레스와 통모자 안엔 무엇을 감춰두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는 그 시대의 말미에 현상 이후의 후유증을 분석하는 것으로 몸집을 드러낸 프로이트의 방법론을 빌어 슈니츨러의 글을 텍스트의 열쇠로 삼아 당대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잡아내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아련한 노스탤지어와는 거리가 먼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알고 있는 이라면, 피터 게이는 그 지식의 한 축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이미지에 가려 우리가 쉽사리 도식화하고 있었던 19세기 부르주아들에 대한 편견들을 하나하나씩 깨뜨려준다. 저자가 시대의 반영인 그 인물군에 대해 나름의 매혹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피터 게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리킨 유력한 시대의 적이었던 이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바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하는 작업은 오히려 신화를 깨어 그들을 보다 펄펄 살아있는 존재들로 만들려한다.

풍족한 미시사적 사료들의 제시를 통해서 벗겨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는 마치 [꿈의 노벨레]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모순의 정당화로 지탱되고 있다. 프로이트가 사건 이후에 남은 불가해한 찌꺼기들인 현실을 통찰하기 위해 모호한 꿈속으로 달려 들어갔던 것처럼, 여기서 보여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 이면은 단순정의만으론 채 설명하기가 힘든 복잡다단하면서도 총합적인 잡식성이 빚어낸 개개의 충돌이 하나의 태도적 반영으로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 '모호'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귀족도 아니고 서민도 아니며, 그 사이에 낀 계급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산업화에 따른 계급변동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하는 현상유지에의 욕구를 가진 부르주아 계층이 가진 다양하면서도 상충되는 면모의 현현이기도 하다.

말러의 공허와 미학에는 공감하지만 쇤베르크는 사기꾼이라고 여기는 슈니츨러의 내밀한 모습들은 그래서 그의 작품들의 무의식적 측면들과 더불어 시대의 뱃속에 감춰진 미궁의 입구로 적절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슈니츨러의 감춰진 세계가 외부와 충돌을 빚은 순간으로 귀환한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시대의 기억을 더듬고 자극하여 일깨우는 행위다. 슈니츨러의 트라우마가 바로 그 순간에 정립된 것처럼, 19세기라는 근대적 트라우마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형식으로든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로 귀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두 번에 걸쳐 벌어졌던 대학살극과 이미 열려버린 이상, 여즉껏 그 힘을 놓지 않는 몰이성과 혼돈, 부유와 해체의 시대를 당긴 방아쇠가 어디쯤이었는지를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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