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떠오른 건 아니고, 예전에 저질렀던 인식적인 실수가 꾸준하게 머릿 속에서 굴러다녀서요. 바로 텔레비전에 대한 얘기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텔레비전의 미래에 대한 착각이었지요.

때는 마음의 고향 세기말로, 전자 네트웍이 불러올 세계 자체의 변화와 밀레니엄 오류에 의한 인류멸망에 기대를 걸고 살아가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울증이란 걸 가르쳐주고 있었고 [serial experiments lain]이 아는 사람에게만 열광적으로 전파되고 있었으며 오시이 마모루가 [공각기동대]를 만든 다음엔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로 떼돈을 벌었고 매스컴은 차세대라는 수식어를 중독이 된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죠.

어쩌면 저도 그런 것에 쉽게 동화되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즈음에 [카우보이 비밥]의 23화인 'brain scratch'편을 보면서 오만하게 비아냥대고 있었으니까요. 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 에피소드는 미래사회에서의 매스컴의 오용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구가 바로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절정은 마지막 부분의 대사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품이 무엇인지 아는가..."

저 답은 텔레비전이었죠. 세상에, 너무하는 거 아냐? 전자의 대기화가 예고되는 컴퓨터 시대에, 공간을 가리지 않는 전자 네트웍의 발생만을 기다리는 이 때에, 아니 심지어 저건 미래잖아. 저 미래에 가서도 텔레비전 타령이라니. 저는 그것이 [카우보이 비밥]의 고전활극적인 스타일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하나의 표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마디로 저 의미심장한 성우의 목소리로 연출되었던 대사 자체엔 눈꼽만치의 진지함도 부여하지 않은 거죠.

그러나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아주 완전히 틀린 거죠. 그래서 이젠 텔레비전이 가진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홈쇼핑의 대성공을 가리켜 봐야겠군요. 동영상 쇼윈도인 홈쇼핑은 하루종일,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수백가지 상품과 이벤트를 줄기차게 보여줍니다. 저는 홈쇼핑이라고 하는 것이 이정도로 성공할 줄은 솔직히 개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성질을 건드리는 현상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저는 사람들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일, 아니 나아가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데에조차 피로를 느낄 정도로 게을러터진 생물이 되리라곤 상상을 못했던 겁니다. 이부분이 바로 결정적으로 컴퓨터가 텔레비전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엠티비의 성공과 정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때까지도 이해를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은 서사를 원합니다. 이야기를 원하죠. 자신의 눈과 뇌를 만족시켜줄 대상물을 갈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점점 일을 할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더 분명해지겠죠. 혹은 일을 하는 도중에라도 상관없습니다. 재방송이나 반복방송의 진정한 위력이 여기서 발휘되는 거죠. 그에 따라, 자신의 기호를 일정 정도(그리 까다롭지도 않습니다) 만족시키는 특정한 발산체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서 내내 접하는 것은 금방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상태구요.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스타가 나와 홍보를 한 다음에야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을 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매니지먼트사들이 드라마와 쇼프로, 영화의 연계를 노리고 대개 비슷한 시즌에 동시에 일을 진행시키는 걸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투사부일체]만 봐도, 쇼프로란 쇼프로는 거의 모두 소화해낸 출연진의 노력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영화의 성공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있죠. [마이걸]은 자체로도 잘 빠진 트렌디 드라마였지만 이준기가 출연했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일일 겁니다. 양동근의 드라마 복귀작 또한 새영화의 개봉과 시기가 겹치고 있겠죠.

뭐 생각해보면, 저는 텔레비전을 거의 안 봅니다. 가끔 가다 뉴스나, 저녁 식사 시간이 겹치는데다 이영아가 출연하므로 보게되는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를 제외하면 말이죠. [별난여자 별난남자]의 지난한 일일드라마 지옥을 벗어난 것은 기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저에게 텔레비전이 가지는 의미란 무척 적군요. 그에 비하면, 예상 가능하듯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주구장창일 정도입니다만.

일단 텔레비전의 지속성과 채널의 분화, 그리고 그에 따른 정보의 정체상태와 게토화, 그리고 능동적 시청자의 자격과 타문화 매체와의 연계는 문제의 본질을 놓쳤던 저에게 일종의 컴플렉스적 화두가 될 것 같습니다. 파고들면 재밌을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39800원을 신봉하는 신흥종교가 나타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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