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없는 웰메이드의 풍경 <음란서생>

[음란서생]을 관통하는 최고의 화두는 역시 정빈(김민정)의 몸이다. 그녀의 몸이-속살이-과연 비치는가 안 비치는가에 대한 논의가, 혹은 욕망이 하나의 화두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위의 안시환의 비평에서도 충분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 [음란서생]을 슬랩스틱 코미디인 줄 알고 본 이들이나 김대우의 시나리오를 먼저 접하고 그 문학적 스위치들을 어떻게 가동시키나 궁금해했던 사람들이나 정빈이라는 키-이미지의 체현에 적잖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시환은 영화의 웰메이드적인 고상한 취향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음란함을 저버렸다고 비판한다. 과연 김민정의 홀딱 벗은 몸이 스크린 위에 장대하게 펼쳐지지 않은 이유가 나무액터스와 제작사와의 속살 노출 퍼센티지 계약 때문만이었을까.

[음란서생]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중에서 윤서(한석규)의 소설에 내려지는 황가의 비판, '뭔가 있는 척, 내려다보는 느낌'이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윤서는 그 비판을 듣고 그런 자신의 필체를 바꾸는가? 그는 되려 인기작가인 인봉거사의 것과 차별화되야 한다고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제까지 없었던 완전히 다른 영역을 개척해내는데 바로 자신의 글에 춘화를 삽입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블루오션이란 게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작가성을 지키는데 주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을 보장받고 싶었던 정치적으로 좌절한 유생이었던 윤서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음란서생]이 (수많은 이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도저히 음란해질 수 없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영화 속에서 현실의 욕망은 계속 꺾여나가고 그 빈 자리는 화려한 탐미적 감각의 미술들로 채워진다. 그러니까 정빈의 몸은 오직 망상만으로 스스로를 존재케 했던 윤서의 영원한 공상과도 같은 영역이며 닿지 못할 신천지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윤서는 끊임없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닿았을 때 자신이 맛봐야 할 공허감이. 현실에서의 실패에 대한 위로가 가능한 곳에서마저도 맞이하게 될 두려움이. 닿지 못하기에 영원히 향유가 가능한 망상을 할 수 있는 축복을 그가 과연 저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윤서의 태도가 바로 [음란서생]이란 영화가 가지는 그 머뭇거리는 태도, 영원히 닿지 못할 영역에의 갈구라는 욕망을 보장시켜준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문학 속 궁정식 사랑이 보여주는 끝없는 마조히즘적 욕망과 일치하는 이 긴장감으로 채워진 관계는 플로토닉한 사랑의 기이한 고착을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이뤄지는 윤서와 정빈의 대화는 이 미묘한 알레고리들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구속과 욕망, 강요와 자발적 의지, 진심과 망상, 겉과 속이 마구 뒤얽히는 두사람의 대화는 어떤 면으로 보면 영화 전체를 지배하던 알레고리들의 동시다발적인 폭발과도 같다.

[음란서생]의 주모티브가 정치적 실패자의 대리만족을 위한 본능적인 끌림의 공간으로서 음란소설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는 것은 그 글쓰기라는 행위와 결합된 성적인 추구라는 것이 본능의 한 영역이라는 것을 보장하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윤서 또한 가명으로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놔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음란한 것을 쓴다는 행위의 사회적 인식의 천박함을 이기지 못한 작가들은 혹여나 가명으로도 못 막고 드러나게 된 자신의 행위 앞에 '돈 벌려고'라는 핑계를 다는데 무척 익숙했다. 더군다나 돈을 벌기 위해 그런 소설을 썼다는 것은 인간극장풍 작가의 눈물 배인 직업쟁취기의 훌륭한 양념이 된다. 심지어 저 사드마저도, 라 퐁텐을 잇는 풍속소설가로서의 야심과 기이한 성적 환상의 세계에 빠진 자신을 구분했다. 얌전해 빠졌던 첫번째 쥘리에트의 이야기를 뒤이어 그가 불운한 영감에 사로잡혀 써내려간 과격한 속편이 나와서 그 가학적인 이야기의 저자가 '풍속소설가' 사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을 때 그는 격렬하게 그 사실을 부정해버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음란함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다. 외설소설들의 더미 속에서 때론 도저히 돈 벌기 위해서 그랬다고 보긴 힘든 문체와, 성찰과, 열정으로 가득한 소설들을 찾게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저명한 작가들의 음란한 소설들은 필명을 타고 흘러나왔되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일반에겐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수두룩하다. 역으로 사례를 찾아보자면 도스또예프스키도 원고료를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글을 줄줄 늘리곤 했었다. 그러니 어찌 생각해보면 음란소설들 앞에 붙는 작가의 궁색한 변명인 '돈 벌기 위해'라는 수사는 적절하게 무시해버려도 될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것도 80년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외설소설을 쓰고 싶어서 썼다고 나왔던 작품이 있었다. 장정일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음란서생]이 끝까지 김민정의 벗은 몸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소설 또한 끝까지 외설서적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이다(아울러 이후 장정일의 작품 목록에서 언제나 빠져있게 될 운명 또한 타고났다). 장정일이 실제로 겪었던 소년원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일단 구성상으로서도 뒤로 갈수록 힘을 잃어버리는 작가의 필력(장정일은 구상을 안하고 소설을 쓴다고 했는데, 그 습관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과 전개의 무리함, 그리고 메타소설적 구조의 번잡함과 유치함이 총체적인 균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을 제하고, 오직 외설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장정일을 보자면 그는 이 작품을 '꼴리게' 만드는데 실패한다. 이것은 애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소위 야오이 커뮤니티와 게이 커뮤니티에서 생산되는 일련의 동성애 포르노 소설들은 장정일이 만들겠다던 그 외설적 영역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공간과 상황, 일련의 전통적 코드들이 부여하는 구속과 강제성과 그 틀 속에서 꿈틀거리는 남성상에 대한 지독한 매혹 때문에 그 소설들은 철저하게 소비적이며 잔인할 정도의 가학성과 자기동일화를 몸소 실천해보이고 있다. 장정일은 애초에 소년원이란 속박적인 공간에 전혀 애정을 느끼지 않는 이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폭력은 알레고리를 향한 폭력으로 결정지어지지 결코 그 폭력적인 공간, 혹은 혹자의 눈에 따라선 애정행각의 잔치판일 폐쇄공간을 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1인칭 화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관조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 뒤로 갈수록 점점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묘사는 뒤로 갈수록 간소화되고 그에 따라 지루해지며, 결국 작가는 인물들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작품을 끝낸다.

어제는 침팬지의 사촌쯤 되는 보노보들의 생활을 담아낸 책을 읽어냈다. 프리섹스주의자인 이 히피스러운 유인원들은 섹스로 모든 트러블을 해결하는 멋진 짐승들이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외설서적 작가들이 도달하고자 하면서도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이 바로 여기에 펼쳐져 있었다. 구속이라는 장치에 마조히즘적 쾌감을 안고 기꺼이 뛰어들어 극단적인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사드가 보노보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면(물론 글도 쓸 줄 아는 보노보라는 전제가 있어야겠다) 결코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리라. [까트린 M의 성생활]의 섹스에 대한 해부학적 서술들을 기억하시라. 인간은 욕구불만일 때야 천국을 꿈꾸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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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예상했던 바이지만, 전국이 파란색으로 뒤덮히게 됐습니다. 아, 정말 예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투표 전에 이번 선거의 의의는 여당이 얼마나 박살이 나는지 기록을 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기록을 세웠군요.

한마디로 정치불신이란 거겠죠. 정치판에서 일하는 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란 인식이 이렇게 민주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서 확인된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추행에 공천비리에 뭐 별의 별 거 다 걸린 한나라당이 이렇게 올라올 리가 없는 거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자축연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이 능력 없는 개혁 보다는 비리가 있어도 능력이 있는 자를 원했다.'

글쎄요. 도대체 어딜 봐서 한나라당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철저하게 현 여당에 대한 반작용적 의미에서 나온 것이고, 그 뒤엔 '능력 있었던 사나이' 박정희에 대한 아우라가 두둥실 떠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의 업적으로 인한 결과주의에 대한 추종과 마초적 미덕의 만연은 대한민국의 총체적 불안에 대한 강력한 구심점 역할로 다가왔던 거겠죠. 더군다나 그의 딸은 한나라당의 아이콘이고 마스코트이며(여기서 이명박 파벌에서 박근혜를 비난할 때 쓰던 얼굴마담이란 칭호를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군요. 얼굴마담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은 너무 쉬이 생각했나 봅니다.) 동시에 순교 당할 뻔했다는 경험, 대한민국 정치사에서의 흔치 않은 신성마저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2대에 걸친 그 동화는 박정희 아우라에 씌인 사람들에게 거의 숙명론과도 비슷한 감동을 줄 것입니다.

덕분에 황선생 사태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세훈이 홍준표와 얼굴생김이 같았다면 서울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요. 장담하는데 절대 그렇진 못했을 겁니다.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결, 어느 한쪽이 더 강하고 자신있게 보이며 호감을 불러 일으키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일단 강금실은 열린우리당의 리스크를 모조리 떠안고 게임을 이끌어가야 했죠. 그런데다 강금실의 선거전략은 강한-굳은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유화였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잡아채는 것은 강철 같은-능력있는-남성스런 이미지인 것이 당연한 법이죠. 그 과정에서 여성 투표자들마저 강금실이라는 여성 아이콘에 대한 동화보다는 오세훈이라는 남성의 세련된 마스크(그리고 이면에 자리한 이명박-한나라당이라는 마초적 마스크)에의 순종적 종속에 더 이끌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남성들이야 뭐, 워낙 강금실이란 캐릭터에의 거부감도 만연했었거니와 고전적인 성차별적 정서-정치권력을 지배하는 남성적 의지에의 무의식적 동조도 한 몫 했겠지요. 결정적으로 '어차피 다들 똑같은 놈인 거, 보기라도 좋은 놈으로 뽑자'라는 정서의 승리랄까요. 미란 이렇게 위대합니다.

일종의 선후배 사이인 한나라나 열우나, 민노당이라는 이념 통합집단의 모순성에도 질려있던 저로서도 이번 선거는 꽤나 무기력한 선거이긴 했습니다. 뭐 그래도 역사는 작용반작용의 원리로 끊임없이 유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소위 진보세력의 무기력함과 보수세력의 득세로 결판난 이 선거에 대해서 좀 한심하다는 생각외엔 크게 상심은 안 드는군요. 일단 소위 민심이란 것의 유동성이 인터넷의 발달 이후 부쩍 빨라진데다 그에 기반하여 한나라당 승리의 기반이란 것이 흡사 폭탄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고, 이후 다량으로 펼쳐질 부정선거 논란에 의한 자격박탈 심사들 같은 이벤트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경남에서의 세력 점거에 대한 당외 홍보 집중과 강금실의 정치판 연착륙의지를 통한 당쇄신과 지지층 결속을 꾀하는 열우당의 다소 노련해진 솜씨에 비해 민노당은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우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여서 저쪽 동네는 여전하구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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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6-04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기분좋게 첫투표를 했건만,,ㅡㅡㅋ 제가찍은쪽은 골라서 피하더군요 ㅋ

hallonin 2006-06-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나름대로 충격이 있었을 듯-_-
 

지금 와 생각해보니 보르헤스에 대한 신선한 감각이 사라지게 된 중요한 두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은자답지 않은 그의 모습 덕이었다. 보르헤스는 피노체트에게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훈장을 받으면서 "그(피노체트)는 훌륭하고 정중하며 인자한 사람입니다. 무정부화되어 버린 대륙이자 공산주의로 가득한 이 대륙에서 이곳과 내 조국, 그리고 우루과이는 자유와 질서를 구해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칠일 밤]의 말미의 옮긴이가 쓴 것처럼 진지한 농담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런 배려적인 시선이 힘든 이유는 그가 분명한 보수당원이었으며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공공연히 지지했다는 사실이 떡하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인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가 차원이 다른 시대를 열어제꼈고 아직까지 그 영향력이 거둬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텍스트는 현실에 느슨하게 걸쳐진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이중적인 세계의 속성을, 그 방대하고 영원한 영역을 잡아냈다. 마치 그자신이 그리 원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문학적 성과들에 대한 매혹은 그의 '현실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유예하게 만든다.

보르헤스가 우회한 보수파였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길 꺼려했다는 세간의 판단은 명백히 보르헤스의 무정부주의적인 작품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미에서 보수파가 된다는 것이 중도주의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정도로 '현실적'이였다. 난 그 말에 동의했다. 그가 재창조해낸 불한당들의 이야기보다 그 한마디가 계속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 보수성을 넘어선 우익스러움을 보여줬던 그의 선택을 덮어줄 것 같진 않다. 심지어 그것이 '현실적'인 차원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요란스러운 유혈시민혁명으로 인한 무질서적 폭력과 무혈정권교체를 통한 독재자들의 지속적인 학살이 서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었다면 보르헤스는 차라리 진짜 은자가 되는 법이 더 나았을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이 설혹 더없이 뜨겁고 효과적인 파시즘을 설파했던 간교한 레니 리펜슈탈의 차가운 방법론이었을지라도.

반페론주의자이자 반공산주의자로서의 그를 뭐라고 할 순 없다. 말마따나, 그는 다른 남미작가들의 고질적인 해외체류(정치적 이유에서든 일신상의 이유에서든) 성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오랫동안 고국에서 머무르면서 색깔있는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이 사실은 소위 그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영역에 넣게 만드는 국지적-남미지역적이라는 특성과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면모에 스위치를 걸면서 보르헤스라는 인물의 통합적이고도 부조리한 면모를 두텁게 만든다.

그는 무정부주의에서조차도 무정부주의를 그리던 순환 오류적인 '진짜' 무정부주의자였을까? 확신하긴 힘들다. 왜냐면 그조차도 보르헤스가 가진 면모의 한부분일 터이니. 어쩌면 그의 멀어버린 눈 너머에는 페론주의에 반대하며 보수파를 선택할 정도의 그의 면밀한 면모(움베르토 에코는 어쩌면 이 부분을 간파하고 호르헤 수도사를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를 담당하는 뇌세포의 작동으로 자신을 '그 모든 것'으로 만들 의도된 행동선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론, 무정부주의의 영역을 추구하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뻔한 과오를 그대로 따랐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의 아름다움과는 반비례하여 안타까움을 저버릴 수가 없다.

남는 것은 '지금' 읽는 자의 선택뿐이니. 이래서 미래는 언제나 우리의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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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해서 이걸 20권까지 다 봐버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공수 시뮬레이션으로 전환시키면 말이죠, 데즈카는 역시 공인 건가?"

"네, 그럴리가요. 데즈카는 수예요."

"뭐? 원작에선 완전 공의 화신처럼 그려지던데."

"동인지 보면 다들 수로 쓰는데요. 공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해가 안 가는데.... 개인적으론 어떻게 생각해요? 데즈카의 포지션."

"데즈카는 수죠."

"수예요?"

"완벽에 가까운 수죠."

"음.... 그렇군요. 원작에선 너무 강력한 공으로 그려지니까. 동인지는 욕망과 망상의 분출구인 만큼 반대적인 상상력을 받아들이는 거군요."

"아....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료마는 수로 하면 되겠군요."

"네? 료마는 공인데요."

"...공이요? 료마가? 아, 그 땅꼬마 말이죠."

"네, 공이요."

"료마는 원작에서도 공스럽잖아요."

"그렇죠. 동인지에서도 거의 공으로 쓰여요. 수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걸요."

"그 뭐시냐.... 원작에서 워낙 싸가지 없는 공 같아서 동인지에서만큼은 막 학대 당하는 입장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아닌데요."

"...왜요?"

"글쎄요.... 어쨌든 료마는 공이에요."

 

거참 어떻게 작동하는 회로구조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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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05-2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이해되시는 거군요. 아무튼 전 이해가 안된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액의 맛

입사, 혹은 구강사정. 뭐 그렇게 불리는 행위에 대한 사나이쪽에서 바라본 온전한 환상이 구현된 위 픽션-반논픽션에서도 고백하듯이, 그 문제의 행위는 수많은 포르노물에 빠짐없이 넣어지는 관례적 씬으로서의 익숙함만큼 남자에게 있어서 일종의 환상이자 강렬한 욕구라는 걸 부정할 순 없겠다.... 왜 그런 걸 꿈꾸냐고 되묻는 리플이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꿈꿔지는데-_-

입은 행위에 있어서 또하나의 통로-구멍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성기의 대리체. 구멍에 대한 남자의 페티시적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일례로는 장정일의 단편소설인 [제 7일]을 들 수가 있겠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형식적 측면에서의 전초전이자 일종의 포르노소설이었던 그 소설에서 남자는 여자의 모든 구멍에 사정을 하고 싶어한다. 그 소설은 타나토스-신화에서의 의미 그대로-적 욕구의 소산과 행위의 노골적인 면모가 추구하는 에로스의 결합을 추구함으로써 어둠-구멍-욕망의 인지관계를 구축해냈다. 더럽힘이라고 표현하든 점령이라고 표현하든, 아니면 접촉이라고 훨씬 순화해서 표현하든 남자는 자신의 '상징'을 영토화의 수단으로 써먹기 마련이다. 부카게란 단어가 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무튼.

위에 링크된 이야기에서 남녀의 대등한 입장을 강조하는 분들이라면 분노할 수 있을 부분이 그 노골적인 표현수위와 유익할지도 모르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 화자인 남자가 직접 경험한 부분은 없다는 점에서일 게다. 자신의 노골적인 욕구를 익명을 통해 분명하게 밝힌 화자는 차마 자신의 정액을 먹을 생각은 못한 모양이고, 또 글에서는 그 행위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의식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래에 달린 리플에 따르면 사람에 따라선 알러지 반응마저 일으키는 것이 그 행위라고 한다. 말인즉슨 재수가 없으면 먹다가 목이 막혀서 저세상으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섭고도 놀라운 얘기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포르노 여배우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생계를 버텨나가고 있는 것인가....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잠깐 숙연해졌다. 69체위가 그 조형적 공평함에도 불구하고 무력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적어도 여자의 애액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남자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얘기로 돌아와서 구강사정을 허용하는 여자의 입장이라면 뭐,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숫컷에게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겪게끔 만들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공지영의 저 뻔뻔스럽고도 유명했던 소설 탓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자에게 있어서의 섹스라는 행위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무슨 표현을 갖다써도 좋다. 사랑의 결실, 애정의 심정적 확인의 중요함 등등. 아무튼 섹스란 사람들에겐 일종의 승화이며 고상한 것이고 가치있는 행위로 여겨질 때가 많다. 배설이 아니라. 그렇게 여겨지는 게 강요되기도 한다.

그게 그렇게나 출중한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는 교육에도 불구하고, 정액의 신성성은 저 바닥에 머무르고 있는것처럼 여겨진다. 장담컨데, 섹스의 숭고함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아니 남자들 대부분은 구강사정을 원하는 것만치로 자신의 정액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굳이 먹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의 맛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뭐 그런 상황 자체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여자들은 알러지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남자들의 욕망을 채워주지만 남자가 자신의 정액을 맛보는 것,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인에게 있어서의 골든과 같은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은 여자 입장에선 확실히 거부감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선 기본적인 평등의식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러니까 자위를 통한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도 나오고 그러는 거다.

하긴, 요가의 달인이 되어 셀프오랄이라도 가능하지 않는 한엔 필요에 따라서라도 남자들이 자신의 정액을 먹을 일은 흔치가 않다. 하지만 그 이전에 경험가능성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기본적으론 남자들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사출물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자들도 남자들이 가지는 거부감에 못잖을 것 아닌가.

신빙성이 없는 민간요법 중에는 오줌섭취를 통한 암의 치료 같은 안타깝기까지 한 요설도 있으니.... 정액의 고단백성에 대한 홍보가 널리 퍼지면 웰빙식품으로서 인기를 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일전에 익명게시판에서 봤던 리플, 자신은 펠라치오를 해준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끝나자마자 키스를 퍼붓는다고. 그녀의 입술가에 남은 시큼하고 떫은 맛을 맛보게 될지라도. 뭐 굳이 유사보복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남근적 영토화를 극복한다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결말이 가장 무난할 듯. 윤리란 이런 순간에 비로소 필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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